신경 좀 꺼줄래
케빈 윌슨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2020년에 케빈 윌슨이 쓴 <펭씨네 가족>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출판사 은행나무가 그만 절판시켜 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사람 정서에는 맞지 않지만 그럴싸한 현대적 엽기, 괴기 가족 이야기, 저 오래 전 유럽 북부를 지배했던 베오 울프 족의 후예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딸랑 한 가족만 남았는데 멀쩡한 사람을 죽여 피를 빨기는커녕 예술지상주의 이 가운데서도 행위예술에 전심전력을 다 하는 난장판, 이게 미국사람 마음에 꼭 들었는지 할리우드에서도 니콜 키드만을 캐스팅해 우리말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는 거다. 나도 하도 기막힌 스토리라서 작가 케빈 윌슨이란 이름을 딱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새 책이 작년 8월에 나왔다는 걸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얼른 새 책 사주세요, 희망도서를 신청했더니 어느 눈 밝은 독자가 있어서 벌써 신청이 되어 있어 해가 바뀐 뒤에야 읽게 된 거다. 나도 나름대로 오래 기다렸다는 말씀.


  이 책도 <펭씨네 가족>만큼 어이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펭씨 가족처럼 베오 울프의 후손이라 예전에 사람의 피를 주식主食으로 빨아먹는 유전자가 있어서 송곳니가 기형적으로 발달했다는 등, 이런 거 말고 그동안 세월이 조금 흘렀으니 좀 더 어이없는 방향으로 상향 진화하여, 미합중국 테네시 주 상원의원 로버츠 씨네 후손들 가운데 특정 유전자를 가진 자손들은 화딱지가 나거나, 상처를 입거나, 그래서 아프거나, 누가 괴롭히거나,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지만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체온이 처음엔 슬슬, 그러나 잠깐 사이에 팍팍 올라가는 증상이 있는데 열이 얼마큼 오르느냐 하면 화르르륵 파랑과 노랑 불꽃이 가슴에서 시작해 머리로, 양 팔로, 다리로 확 번져서 입고 있는 옷이 금방 불에 타고 옆에 재수없게 인화물질이 있으면 그냥 화재가 일어나고 말 정도였으며, 한 시절엔 테네시 주에서 가장 유능하고 능력있고 저 유명한 네이처 잡지에 다수의 논문도 발표한 존경받는 꼬부라진 은퇴 의사가 진찰을 하고는 자기 판단에 “성령이 임하여” 성령의 불꽃을 발산하는 것과 같거나 비슷해서 아이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삼배체 형질 또는 지옥의 대마왕 루시퍼와 같은 형질이 분명하지만, 자기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인체발화의 특성상 불꽃이 일어나 화재를 일으킬 정도라면 당사자 역시 불꽃, 그것이 아니라도 연기에 질식해 심각한 부상을 입든지 아니면 죽어야 마땅할 터인데, 어떻게 생겨먹은 아이들이고 어떻게 터져 나온 플라즈마인지 몰라도 화재 발생 당사자는 머리카락 한 올 까닥하지 않고 옷과 만 달러짜리 커튼과 삼만 달러짜리 카펫만 태우고 멀쩡한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아이들이 이름을 베시와 롤란드라고 하는 열 살짜리 쌍둥이 남매인데, 아빠 재스퍼 로버츠 씨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테네시 주 상원의원이면서 지금 국무장관을 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 튼튼한 육체를 자랑하는 국무장관이 숟가락을 놓기만 하면 그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어 자신의 주변, 특히 가족사항에 흠 하나 없이 하고 싶어한다. 왜 아니겠어, 명색이 국방과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국무장관 후보자인데 아이들이 몸에서 불을 뿜는 위험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적어도 자랑스럽지 않잖아? 글쎄, 내 생각엔 자랑도 아니지만 굳이 험이 되는 거 같지도 않지만 말이지. 하여간 쌍둥이를 낳은 첫번째 아내 제인한테 엄한 불평 불만 짜증 등 기타 온갖 난리를 죽여 결국 제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이혼과 동시에 친정집으로 가서 홈 스쿨링을 하건만, 테네시 주에서 무지하게 큰 사업을 하던 친정아빠가 한 순간에 거덜이 나 감옥에 갈까 말까 하는 신세가 되어 그래도 정이라고 옛 사위가 뒷배를 봐주어 전과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많고 많던 재산은 다 휘리릭 날아가버리고 초라한 별장 비슷한 거 하나만 남아버렸으며, 제인 본인도 심각한 우울증이 생겨 아이들을 거의 방임 수준으로 키우다가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그동안 모으고 모으고 또 모은 온갖 약을 밥공기로 몇 개를 한 방에 삼켜 드런 세상 하직하고 말았다. 이 사이에 상원의원 아빠 재스퍼 로버츠는 겁나게 재산이 많고 말타기와 말 수집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여성과 결혼을 했는지 결혼 비슷한 것만 했는지 하여간 그런 상태로 있다가 성격차이로 헤어진 후에 선거 캠프에서 눈에 확 띄는 유능한 여성, 더군다나 늘씬하게 큰 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밴더빌트 대학 졸업생 매디슨 빌링스와 결혼하여 아들 티머시를 낳아 키우고 있다. 로버츠 씨 입장에서 전 아내가 죽었으니 좋거나 싫거나 하여간 쌍둥이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생겨버렸으니 이 불덩이들을 어찌할꼬. 이때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외모면 외모, 어디 한 구석 빠지는 구석이 없는 젊은 아내 매리언이 적절한 베이비시터 또는 예전 말로 여성 가정교사 한 명을 남편이자 쌍둥이 아빠한테 소개하니 드디어 이 책의 주인공이 나타난다. 사실은 첫 장면부터 등장하지만 그렇게 후다닥 소개해버리면 재미가 적을 거 같아서 뜸 좀 들였다. 좋게 봐주시라.


  때는 1995년 늦봄. 화자 ‘나’의 이름은 릴리언 브레이커. 아빠가 아니라 엄마 이름이 브레이커, 깨뜨리는 자, 망치는 자, 일 수도 있다. 아빠는 릴리언이 태어나서 코빼기 한 번 못 봤다. 엄마와 한 집에서 살았는데 릴이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엄마는 릴의 방에 노르딕 트랙 런닝머신을 들여놓고 릴을 다락방으로 쫓아버렸다. 아니꼬우면 나가면 되니까. 성인이잖아. 릴이 기억하는 시기부터 릴은 가난했고,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28세의 릴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슈퍼마켓의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두 곳의 사장 두 명한테 미움도 받고 돈도 받고 편의는 하나도 못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릴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 있는 떡잎이었고, 겁나게 전도유망한 소녀였다. 일찍이 세 살 때 알파벳은 물론이고 글자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별로 공부도 안 하면서 전과목 A를 채집하는 걸 취미생활로 했고, 여전사들의 훈련장인 줄 알고 철자법 대회에 설렁설렁 나가 최우수 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카운티 과학경시대회에 기존 과학논문을 조금 유치한 수준으로 다운 그레이드 시켜 베낀 것을 제출해 최우수상을 먹은 전력이 있다. 이밖에 무수하게 많은 호화로운 이력은 지면이 아까워 생략하거니와 골짜기 마을에 신동이 하나 나왔다고 동네 아줌마들 입술에 침이 마를 새가 없다는 거였다.

  테네시 산골짜기에 아이언 마운틴 사립여학교라고 기숙학교가 하나 있었다. 이곳이 전 미합중국에서 제일 돈 많은 집안의 딸들이 전국각지에서 모여 교육받는 곳으로 학비도 엄청나게 비싼 곳이었지만 전원을 부르주아의 딸로만 채우기 좀 거시기해서 공부 잘하는 극소수의 소녀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어서 그걸 다른 아이도 아니고 우리의 릴리언 브레이커가 땄다는 거 아닌가. 이에 감격한 중학교 교사들이 비싼 교과서를 직접 구입해 릴에게 선물해 드디어 릴은 전국 최고의 기숙여학교에 가기로 결정을 했으나, 이 꼴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는 똥을 쥐고 세상에 나왔는데 더 나은 걸 원하는구나. 똥을 금으로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렵단다. 어쩌겠니. 행운을 빈다.”

  해서 옷 가운데 가장 예쁘고 점잖은 걸 골라 입고 엄마의 똥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보니 제일 언짢은 수준의 학부모 차가 BMW였다나 어쨌다나. 도무지 릴의 입장에선 말 한 번 붙여보지 않았던,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았던 같은 또래의 소녀들 무리에 끼어, 결코 주눅은 들지 않은 채, 기숙사에 들어가 만난 룸메이트가 훗날 재스퍼 로버츠 상원의원의 아내가 되는 매디슨 빌링스였던 거다. 이때부터 매디슨은 키도 크고, 예쁘고, 운동 특히 농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밤에 몰래 기숙사를 탈출해 근처에 있는 예술대학 남학생들과 술집에 가서 마리화나와 코카인 맛도 보고, 적당히 즐기기도 하는 별세계 소녀였지만, 자기하고 비슷한 부잣집 아이들을 최악으로 생각하는 당돌한 아이였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면 부잣집 예쁜 아이들하고 밥을 먹으며 그 아이들하고만 외출을 했는데 뭐 그런가보다, 했던 릴. 이 또래 가운데 제일 덜 예쁜 아이가 무슨 심통이 났는지 교무실에 가서 매리언의 책상에 코카인이 있다고 고발을 해서, 선생이 들이닥쳐 서랍을 열어보니까 정말 코카인이 있는지라, 즉빵으로 매리언의 아버지가 새벽같이 학교로 쳐들어왔다. 왔지만 어떻게 하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코카인인데. 그리하여 이날 빌링스 씨는 그동안의 우정을 봐서 릴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해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음식점에 가니까 글쎄 엄마가 와 있는 거였다. 이렇게 두 식구 네 명이 밥을 먹다가 빌링스 씨는 위스키를, 엄마는 마티니를 홀짝거리다가 취기가 살짝 돌 즈음해서, 빌링스 씨가 은근히 엄마한테 제의를 한다. 사랑한다고? 천만의 말씀. 백만장자가 가난하고 나이든 과부를? 어림도 없는 얘기.

  매리언은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해서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걷기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 이름난 기숙학교를 그만두지 못할 상황이다, 반면에 릴은 가난한 집 딸이라 오히려 학교에서 선처를 해줄 가능성이 높고 그만두더라도 사실 잃는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러니 매리언의 책상 서랍에 있었던 코카인이 사실은 릴의 것이라고 이야기해주면 엄마한테 만 달러를 주겠다고.

  엄마는 즉각 수락하고 빌링스는 그 자리에서 이미 엄마 이름이 쓰여 있는 만 달러짜리 수표를 봉투에 넣지도 않은 채 그냥 건네준다. 이튿날 매리언 대신 이미 더플백을 싸 놓은 릴이 퇴학처분서를 받고 엄마의 똥차를 탄 채 골짜기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며 다시 공립학교에 다닌다. 자신의 인생에 반전의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는 걸 이해하고 더 이상 삶의 총기를 발휘하지 않은 채.

  여름이 되자 매리언이 편지를 보냈고, 전화는 한 번도 없었지만 편지는 3~4 개월에 한 장씩 릴의 집 앞에 떨어져 이제 매리언과 릴리언은 펜팔이 된다. 모든 일에 용의주도한 매리언은 혹시 이런 방식으로 릴을 자신의 충실한 동지, 어떤 일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해줄 충성스러운 병사 한 명을 키운 거 아닐까? 해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내가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십여 년이 흐른 후, 매리언 빌링스였던 매리언 로버츠는 두 군데 슈퍼마켓의 파트타임 계산원 릴리언 브레이커에게 편지를 해 자기 전처 자식의, 옛날 말로 가정교사 자리를 제의하고, 릴은 수락해 이 불꽃 튀는 쌍둥이 남매와 여름 한 철을 보내게 된다. 바로 그 이야기.


  이 책에서 가장 애간장을 녹였던 한 마디.

  “자기 애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망치지 않은 부모를 하나라도 아냐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