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의 편지 창비시선_다시봄
강은교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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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오랜만에 강은교를 읽는다. 헌책 샀다. 이이의 《허무집》과 《풀잎》 이후 시집으로는 처음 읽는다. 그동안 잡지에 나오면 읽고 아니면 말고 그랬다. 우리나라 리얼리즘 시인으로 이름을 높이지만 정말 그런 시만 쓰고 싶었을까,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나는 그것이 의심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1945년에 함경남도 흥원에서 태어난 서울 사람. 출생 이후 줄곧 서울 살다가 80년대 중반이 지나서 박사 받고 동아대학 국문과 교수하느라 부산에 살았으니 이 정도면 서울 사람이라고 해야지 뭐. 애초에 허무와 존재를 고민하던 시인이었으나 세월이 점점 험해지니 참여의 길로 한 발을 디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애초에 깔린 모던한 사색을 어찌 몽땅 털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지. 하여간. 내가 아는, 이라기 보다, 내 기억 속 강은교와 가장 가까운 시는 이거였다.



  벽 속의 편지

      그날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이

  이 세상의 모든 흐린 눈들과 헤어지는 날


  이 세상의 모든 상처가

  이 세상의 모든 곪는 살들과 헤어지는 날


  별의 가슴이 어둠의 허리를 껴안는 날

  기쁨의 손바닥이 슬픔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날


  그날을 사랑이라고 하자

  사랑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하자


  그대, 아직

  길 위에서 길을 버리지 못하는 이여.   (전문)



 이 시를 70년대, 80년대에 읽었다면 “그날”에 관해서는 누구나 다 말도 한 마디 할 필요 없이 읽는 순간 팍, 이해를 하고, 아니면 시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해했다고 치고 “개벽”이라 말했을 거 같다. 그러나 시집이 나온 시기가 1992년. 시인의 나이 마흔일곱 시절.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왕년의 민주투사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을 하고(했나? 며칠 더 있어야 하나?), 여전히 자본 카르텔에 대한 저항은 저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목이 터질 망정, 하여간 그날을 이젠 꼭 다 같은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달인이 강은교, 라고 생각했다. 모던한 인텔리이지만 리얼리즘을 노래해야 했던 불운한 시기에 빌어먹을 전성기를 달린 시인. 예를 들어 <울음의 線 – 그 첫번째>의 첫 연을 읽어보면:


  나의 이름을

  골리앗 크레인

  ‘외로운 늑대’라고 불러다오

  별을 세고 있으면 문득 별이 사라진다

  새벽 2시

  어둠이 동지들 곁

  씨멘트 위에서 끓고 있다   (부분)


  강은교의 팬들에게 돌팔매를 맞아 죽을 말이겠지만 현직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노래치고는 공허하다. 난데없이 등장한 외로운 늑대는 또 뭐여?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 농성하는 사람, ‘동지’들이 외로운 늑대라고? 내가 단어를 잘못 알고 있는지 싶어 ‘외로운 늑대 lone wolf’ 검색해봤다. 하여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지는 알겠으니까 그건 그냥 넘어간다 쳐도, 동지들은 새벽 두 시에 찬 씨멘트 위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것이 선생한테 그렇게도 사무치는지,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어차피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는 그들에게 한 다리 건너다. 오늘 도리스 레싱 작품에서 더 적절한 문구를 읽었지만 인용하지 않는 것은 나 역시 강선생의 오랜 독자라서임을 통촉하시옵소서.

  다음엔 이것 한 번 읽어보시라.



  새우



  꼬부라진 등을 메고

  비릿한 수염이 허공을 뻗어 있는

  희푸른

  그 새우를 아는가.


  허허벌판 접시 위에서

  모진 이들에게

  살껍데기를 다 벗기우고

  가끔씩 푸들푸들

  세상맛을 보는 듯 경련하는

  그 새우를 아는가.


  퍼덕이는 말과 말 사이로

  미사일들의

  숨죽인 굉음과 굉음 사이로

  가끔씩 푸드드득


  푸드드드득.   (전문)



  1992년 출간 시집이니 이 당시 산 채로 껍질을 벗겨도 아직 신경은 살아 있어 가끔 접시 위에서 푸드득 살을 떨던 새우는 요즘에 양식해서 자주 상에 오르는 대하가 아니다. 보리새우라고 부르고, 당시엔 ‘오도리’라 했던 남해 특산 어종이었다. 단맛이 일품이고 주문하면 종업원이 직접 껍질을 까주기도 했다. 술꾼들이 상 위에 껍질 벗긴 보리새우를 올려놓고 수다를 떠는 광경이다. 그러나 창비 진영의 작가, 시인,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면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를 떠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술꾼들의 수다를 미사일 터지는 장면으로 변환할 수 있고. 이럴 때 시인은 시치미 뚝 떼고 뒷짐을 지고 있으면 된다. 해석은 당신들이 하라고. 그냥 껍질 벗긴 새우의 장면을 연상하면 더 좋은 시가 될 터인데, 끙. 내 의견대로 읽는다면 괜찮은 모더니즘 시일 수 있을 텐데.

  비슷한 수산물이 하나 더 있다. 강은교는 수산물엔 폭탄이 터지는 습관이 있다.



  아구



  오늘 아구 한 마리 사왔네

  멋진 아구찜, 아구탕의 꿈을 위하여


  쭉 찢어진 아가리가 몸뚱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네

  그 녀석의 뼈는 또 왜 그리 억세던지

  칼로 내려치는 나를 향해 연신 비아냥거리고 있었네

  그 녀석의 미끌거리는 잿빛 살껍질도

  날아가는 로켓탄 같은 아가리도


  ‘어둠이 질기면 얼마나 질기랴’

  그 녀석의 짓무른 눈

  젖어, 고함치고 있었네.   (전문)



  이 시도 마찬가지다. 기껏 통통하게 살 오른 아구 한 마리 사와서 칼로 치다가 작은 따옴표 쳐서 강조하기를 ‘어둠이 짙으면 얼마나 질기랴’ 한 마디를 해야 속이 풀린다. 아구탕 걸지게 한 국자 떠 마신 것처럼. 바로 앞 연의 마지막 행 “날아가는 로켓탄 같은 아가리” 역시 ‘어둠이 질기면 얼마나 질기랴’를 쓰기 위해 굳이 로켓탄까지 찬조출연한 거 같다. 아구찜, 아구탕 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큼지막한 식칼로 아구의 몸을 우당당탕 치고 있다가 시인의 눈에 큼지막한 아구의 아가리가 로켓탄처럼 보였고, 하고 많은 중에서 하필이면 로켓탄처럼 보였고, 싱싱하지 않았나? 짓무른 눈도 지 까짓 것이 얼마나 질기겠어? 고함을 친단다. 그럼으로 해서 시인은 동류의 동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 내 말이 뭐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명인이라니까. 매콤한 아구찜, 얼큰한 아구탕으로 시작했다가 어둠 규탄대회로 끝나는 거 말이지. 하긴 뭐. 시는 시고, 삶은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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