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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니가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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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 오지게 덥기 바로 전인 7월 중순 지날 즈음해서 <마지막 연인>을 인상깊게 읽었다. 그러나 다른 찬쉐의 작품을 고르게 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중국의 선봉파 기수라는 타이틀을 여전히 견지하는 몇 안 되는 작가라서 이이의 아방가르드 적인 포스트모던 스타일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선뜻 자신이 없었던 거였다. 그리하여 당시엔 <마지막 연인> 말고는 딱 한 편 밖에 없는 찬쉐의 단행본 <오향거리>를 보관하기만 했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읽겠지 싶어서. 시간은 흐르고 찬쉐를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망설이기를 벌써 반 년, 앗차, 도서관 개가실 신규 구입 도서 진열 선반에 이이의 데뷔작인 <황니거리> 즉 <황니가黃泥街>가 놓여있던 거였다. 그래 두꺼비가 파리 채듯 널름 주워들었다. 이게 읽은 내력이다. ‘주식회사 열린책들’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엽기적 책표지를 뒤로 한 채. <황니가> 이전에 단편소설 <더러운 물 위의 비누방울>을 발표했다고 책 앞날개에 쓰여 있기는 하지만 보통 <황니거리>를 데뷔작으로 치는 거 같다. 1987년 출간작품. 이후 (우리나라 출판사들의 헛갈리는 출판정보에 의하면) 다음 장편소설 <오향거리>를 읽기 위해서 독자는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문학동네는 <오향거리>를 찬쉐가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광고하기도 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그게 문제가 아니라, 30년? 그러면 2017년. <오향거리>를 읽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을 지도 모르겠다, 라고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랬으면 좋을 뻔했다.
찬쉐를 일컬어 중국의 카프카니, 중국의 보르헤스니 하는 건 과장된 수사는 아니다. 특히 카프카 분위기를 <황니가>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황량한 디스토피아 지대. 세기는 끝나가고 도시 변두리 거리는 시간이 감에 따라 땅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쇠락을 넘어 멸실을 향해 그저 흘러가 버리는 광경. 콕 집어서 <성>을 둘러싼 마을, 물론 총동원과 문화혁명을 거친 20세기 중국이라서 <성>의 촌락보다 훨씬 살풍경한 도시 변두리 지역이지만 하여간 <성>과 그 일대를 떠올리게 되더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성>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스너의 두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와 <사탄 탱고>와 더 비슷하다. 두 작품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카프카를 확장하여 (카프카가 모색한)한 개인을 넘어 도시/마을 전체의 집단적 히스테리에 초점과 관심을 두었다. 첸쉬의 경우도 황니거리에 사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들 모두의 점진적 몰락과 쇠퇴, 멸절에 렌즈를 맞추어 나간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에서는 몇 년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추위가 도시를 급습하거나(저항의 멜랑콜리), 새벽의 보헤미아 벌판을 가로질러 이미 무너져내린 교회당에서 들릴 리 없는 종소리가 이 가을의 첫번째로 쏟아지는 비를 뚫고 들려온다(사탄 탱고). <황니가>는 거의 결말 부분에 접어들기 전까지 잿빛 속에 약간의 노란색을 띄는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진다. 한 때, 예전에 황니거리엔 검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하늘에서 죽어버린 물고기가 쏟아진 적도 있고, 그것을 주워 소금을 뿌린 다음 말려 구워 먹다가 독창이 나 죽은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이기도 했다. 그런 시절은 아직도 계속된다. 카프카는 다음으로 하고 크러스너호르커이를 연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떠오를 만큼 비슷한 분위기. 이 정도면 아실 듯.
아마추어의 의견이지만 내 생각을 말하자면, 독자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작가는 전혀 모른 척할 것 같다. 찬쉐도 자신이 어떤 의도로 작품을 썼는지 굳이 독자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작품은 완전히 메타포에 입각에 쓰였으며 마치 측량사가 그렇게 한 번의 면담을 바랐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는 성주처럼, 독자는 <황니가>가 끝날 때까지 왕쯔광(王子光)이라 불리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존재, 이상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 존재. 사람인지 아닌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물건(이라 해두자). 아주 오래 전에 왔었다고 하는 일종의 암시이자 광상(光狀: 빛을 내는 형상) 또는 한 덩이의 불. 다만 찬쉐가 카프카, 크러스너호르커이와 다른 점은 동구사람들이 말이 거의 없어서 대신 사변적이고 서술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반면, 단 한 번도 정막 속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최고 번식력을 자랑하는 국가의 작가답게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말이 많다. 말은 정말 많지만, 그들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다. 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대신 각자는 각자의 말을 할 뿐. 다변 속의 고립.
황니黃泥. 누런진흙. 황니가라면 길거리가 진흙으로 된 변두리 마을이다. 도시보다 더 오래 되었지만 이제는 더 없이 쇠락한 지역. 거리가 시작하는 곳에 S기계공장이 하나 있어 거리의 랜드마크로 기능한다. 황니가의 독생자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 마음 속에 유일하게 거리의 가치를 높여주는 쇠구슬 생산공장. 5~6백명에 달하는 직원의 대부분은 황니가 사람들이고 이들은 매일 아침 회사에서 내주는 소형 버스를 타고 출퇴근한다.
그러나 좁고 긴 거리. 지금은 너무 낡고 쇠락해서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다. 거리 사람들은 원래 모든 쓰레기를 강가에다 그냥 흘려 버렸으나, 언젠가 한 번은 동네 아낙이 집의 연탄재를 어느 음식점 앞에 쏟아버렸다. 며칠 후, 연탄재가 쌓인 것을 본 이웃 사람이 또 거기다 연탄재를 부었으며, 어느 새 연탄재는 자그마한 동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동네 사람들은 집안의 모든 음식 쓰레기와 심지어 요강까지 그곳에 비우기 시작해 썩는 냄새와 이 냄새를 맡고 새카맣게 몰려든 곤충과 그것들이 낳은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 즉 구더기들이 창궐하더니 거리엔 부스럼과 역병이 돌기 시작했고, 유난히 높은 암환자 비율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하늘에선 항상 검은 먼지와 더러운 불순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거리 옆의 화장장은 늘 바쁘게 가동해야 했는데,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공기 정화 시스템을 갖추지 않아 사람을 태운 그을음, 검댕이 굴뚝을 빠져나오자마자 기압골에 눌려 황니거리 상공을 포위해 밤새 진주했던 거였다. 미친개와 고양이, 미친개가 물어 죽인 닭과 돼지의 시체들 역시 광견병의 위협 때문에 먹지 못하고 쓰레기 산에다 내다 버리고, 이 와중에 밤새 몰래 낳은 영아도 거적대기에 둘둘 말려 던져버리는 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검은 비가 내리고 하늘은 항상 검은 그을음과 먼지, 그리고 더러운 불순물이 떨어져 내려, 작품 속에 일관되게 높고 높은 습도를 유지해 온갖 곳에 곰팡이가 피고, 대가리와 몸통이 초록색인 파리, 모기가 들끓었으며, 어이없이 크게 자라는 시궁쥐들이 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거리. 띠 풀과 나무로 올린 지붕도 습기와 곰팡이와 세월을 이기지 못해 한 블록 씩 쏟아져 내리고, 집 전체가 일정한 속도로 땅 속으로 가라앉는 곳에서 사람들은 햇빛 속에서 기이하고 왕성한 생기를 토해낼 왕쯔광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쯔광, 빛의 형상 또는 한 덩이의 불이 그러나, 사람이 죽기 직전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한 순간임을 모른 채. 그리하여 거리 사람들은 종이에 표어를 써서 벽에 붙인다.
“어둠은 지나갔다. 곧 빛이 왕림할 것이다!”
거의 망해버린 집단농장에서 “보란 듯이 잘 살게 될 것이다. 마음껏 즐기며 살게 될 것이다!” 라고 주민들의 옆구리를 쿡쿡 지르는 <사탄 탱고>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연상하지 않겠는가 말이지.
쉽지 않다. 황니거리. 검은 비가 내리는 진흙 거리. 아스팔트 포장을 생각할 수 없는 멸실의 거리가 징그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능한 만큼 오염시키고, 감염되고, 배설하고, 썩어 문드러지는 광경.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짐승들의 헐벗고 병들고, 죽어 함부로 버려졌거나 부패해가는 시신의 상태. 하염없이 쏟아지는 검은 비 때문에 재래식 화장실에서 넘쳐 마당과 부엌과 거실과 거리로 함부로 흘러가는 모습.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일을 보는 중국의 재래식 화장실 전경. 감염된 사람의 몸 속에서 억지로 잡아 빼거나 스스로 몸 밖으로 나오는 생명체의 덩어리. 이런 모든 것을 감수해야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수도물에서 며칠동안 비린내가 난 이유가 물을 끌어오는 입수 펌프 앞에 사람의 시체가 둥둥 뜬 채 파이프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물을 먹어도 아무도 즉각적인 몸의 이상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파리의 대가리와 날개를 떼고 요리해 먹는 것도 비위좋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일부(또는 많은) 독자는 이런 장면을 질색하지만 전향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중국 선봉파의 진짜 기수 찬쉐의 데뷔작품이다. 이이는 이런 허들을 데뷔작에 은닉해 놓았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더했다. 진짜 읽으실 분은 각오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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