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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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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 북쪽에 오밀조밀하게 모인 군도 잔지바르 술탄령에서 1948년에 출생했다. 잔지바르는 1963년에 술탄이 통치하는 군주국으로 독립하였으나 불과 한 달 만에 혁명이 일어나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했다. 아버지가 예멘에서 이민 온 비즈니스 맨, 아마 인도와 아프리카 무역상의 대리인 아니었나 싶은데, 구르나 집안도 이슬람 문화권이라서 1968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영국에 도착한 구르나는 기독교 문명과 백인 사회의 백안시와 은근한 차별을 견디며 1982년 서른네 살 이 되는 해에 켄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83년부터는 켄트 대학의 영문학, 탈식민주의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하다 2017년에 퇴임하고, 202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아직까지 영국 켄터베리에서 살고 있다. <낙원>이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갔고, <바닷가에서>가 역시 부커상 예심에 올랐지만 결국 부커 재단은 구르나를 외면했다. 글쎄 내 말이 맞다니까. 부커 상이 노벨 상보다 윗길이라니까. 부커 상을 타는 게 노밸 상보다 더 어렵다고.
2021년에 스웨덴 한림원이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자 문학동네는 잽싸게 영국의 블룸스베리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우리나라 유명 영어 역자 네 명에게 번역을 맡겨 2022년에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 그리고 <배반>을 출간한다. 독자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이 팔린 것 같지는 않다. 이후에 이 사람 책이 더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나도 2022년에 책 좀 읽는 독자들이 상찬을 하시는 걸 보고 한 권 사둔 것이 <배반>이었다. 이제서야 읽었다. 올해 도서관에 무슨 캠페인이 있어서 줄창 도서관 책만 읽다가 캠페인이 끝나서 말입지. 올해에도 구르나를 읽고 좋다는 분이 많지만 아무래도 작년 같지는 않다. 한 숨 돌린 다음에 새롭게 당시의 문제작, 문제작가를 읽는 일도 괜찮다.
1899년. 영국인 청년 마틴 피어스는 이집트에 체류하면서 아비시니아, 지금의 에티오피아에 관심이 많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미남 피어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아마추어였으며 약간은 언어학자 스타일이기도 해서 다른 영국인과 달리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아덴을 출발해 소말리아로 가고자 해서, 마침 우간다로 떠나는 영국인들과 합세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젠트리 세 명, 연국인 하인, 백인 사냥꾼과 다수의 흑인 길잡이와 짐꾼을 동반한 캐러밴은 피어스의 일정과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짐승이란 짐승은 몽땅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으면서 행진하는 바람에 이들의 주변엔 피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 가죽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뭐든 죽이는 일을 혐오하는 피어스는 케냐 남부까지 와서 그들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백인이 아니더라도 타지 사람이 아프리카 황야를 혼자 걸어가는 건 아예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라 젠트리는 소말리족 안내인 세 명을 그에게 붙여주고 함께 여행을 하게 했다. 안내인들과는 따로 약속을 해 모종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렇지 않아도 아프리카에서 배반과 잔혹의 대명사인 소말리족 안내인들이 피어스를 따라가면 자신들이 받을 보수가 적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자기들끼리 불평을 할 때 조심해야 했는데 그는 그걸 무시한 것이 잘못이었다. 며칠 동안 황야를 걷다가 안내인들은 갑자기 피어스를 덮쳐 권총을 빼앗아 총구를 머리통에 대고 그의 모든 소지품과 주머니에 든 돈을 몽땅 가져가버렸다. 자기들끼리 피어스를 죽여버리자, 내버려 두면 황야를 걷다가 저절로 죽을 거니 우리가 죽일 필요 없다, 이렇게 말다툼을 해가면서.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 피어스는 정말로 갈증과 기갈에 의하여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상태가 되어 케냐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몸바이에서 제법 떨어진 소도시의 이슬람 마을 골목에 쓰러져 있었다. 이 소도시의 이슬람 신자들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하사날리였다. 주로 곡물이나 버터 같은 식료품을 취급하는 상점 주인으로 키가 작고 포동포동한 체구의 이 남자는 몸에서 도무지 동글동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걱정이 많은 소심한 스타일인데 2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가 이 소도시에 온 다음부터 가장 일찍 일어나 곧바로 어두운 골목길을 일부러 돌고 돌아 모스크의 첨탑(미너렛) 꼭대기에 올라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얼른 일어나 기도하라고 외치는 ‘무에진’이었다. 비록 아이도 없고 앞으로도 낳지 못하겠지만 남은 평생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살 아내 말라카와의 결혼생활이 잘 되게 해주고, 생과부가 된 누이 레하나의 슬픔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알라는 유일한 하느님이시며 무함마드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시니라!” 외치기만 해도 괜찮다고 이맘이 말을 했건만 굳이 모스크 계단의 먼지와 모래도 깔끔하게 쓸었다.
때는 1899년. 아직 전 세계적으로 유령, 사탄, 악마, 도깨비, 귀신들이 창궐했던 때라 하사날리가 아직 어둠에 휩싸인 골목을 잔뜩 겁에 질려 걸어가고 있다가 저 앞에서 뭔가 검은 것이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음산한 음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소름이 좍 끼치면서 등골이 삐죽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크, 악마가 틀림없구나. 사색이 된 하시날리는 무서움에 오금이 얼어붙는 것을 무릅쓰고 그쪽이 모스크로 가는 길이라서 조심조심 접근해보니 글쎄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거였다. 사람이 이런 참혹한 상태로 떨어졌으니 일단 살리고 보자는 생각에 아직 열지 않은 카페 문 앞에서 주인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점원 두 명을 데려와 반죽음이 된 유랑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치료사 마마케 자이투니와 도시에 한 명 밖에 없는 돌팔이 접골사 우두둑 씨를 불러오라고 해서 보여주었다. 마마케 자이투니가 유랑인의 옷을 가위로 잘라내니 피부가 하얀 유럽인이었고,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아픈 곳은 없지만 지치고 심한 탈수현상이 있는 것으로 진단해 따뜻한 꿀물을 먹이라고 처방했다. 어깨에 심한 멍이 들어 골절 또는 탈구가 아닐까 싶었던 것도 우두둑 씨가 몇 번 만져보니 그냥 어디에 부딪힌 거란다. 그리하여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황야를 횡단해 거의 죽은 상태로 소도시에 도착한 마틴 피어스에게 꿀물을 먹여 다시 소생시킨 사람이 하사날리의 불쌍한 누나 레하나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레하나에게 당연히 부자들한테 청혼이 많이 들어왔었다. 당시가 19세기. 이슬람에서는 처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다. 이제 부자가 된 이슬람 놈팽이들이 처가 한 명 또는 두 명 있어도 젊고 아름다운 처녀를 얻을 욕심에 레하나에게 청혼을 한 것이고 그땐 또 그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레하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만일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될 지 몰랐겠지만 이제 법적으로 헤라나의 보호자는 소심한 남동생인 하시날리여서 두 번이나 청혼을 물릴 수 있었다. 하시날리는 누나의 거절에 마음이 많이 상해 앞으로 누나에게 청혼할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정말로 남자들은 레하나를 경원하기 시작했다. 기껏 한 명 나타난 구혼자는 환갑이 넘은 늙은이의 네 번째 자리였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슬슬 포기 모드에 들어간 레하나에게 하시날리는 인도-아프리카 무역상의 아프리카 대리인으로 인도 구자라트 출신의 독실한 이슬람 신자이며 인도에서 아버지 자카리야 씨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아자드를 집에 초대하여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때 레하나와 안면을 트고, 연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적절한 타이밍에 청혼을 받아, 이를 수락, 결혼에 이른다. 그렇게 조금 살다가 이제 큰 액수의 교역이 발생해 직접 인도에 가서 수금을 해야 하는 사정이 생긴 아자드. 당연히 여자는 남자 하는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라 했건만, 아자드는 그 길로 집구석을 내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책에서는 “군수郡守”라고 번역을 한 영국인 시장 프레더릭 터너 씨는 영국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구조되어 아프리카인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아주 위압적인 태도로 그를 사택으로 옮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도시에 영국인이라고는 이 두 명 밖에 없어서. 시를 좋아하고 랭보부터 예이츠 등등을 암송하는 걸 즐기는 터너 씨는 나중에 영국의 대학에서 영문학 강사를 할 정도의 인텔리이지만 식민지에서는 기꺼이 현지 유색인을 얼마든지 무시하고, 모멸할 수 있었다. 그는 하시날리 집에서 피어스의 물건을 훔친 것으로 판단해 다음 날 그의 집을 찾아가 큰소리 뻥뻥 치면서 내놓으라고 위협서린 말을 쏟아 내기도 했다. 손바닥에 말채찍을 탁탁 두드려가면서. 이 말을 들은 피어스는 훗날 날을 잡아 하시날리 집에 직접 찾아가 자기를 구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유창한 아랍어로. 외국인이 예상외로 자기 말을 쓰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지상정. 하시날리는 그를 점심식사에 초대했으며, 이 초대는 갈수록 빈도가 잦아졌는데, 이 와중에 생과부 레하나와 눈이 맞아 급기야 피어스-레하나 커플은 대도시 몸바사로 사랑의 도피를 해버린다.
이후 무대는 1950년대부터 63년의 잔지바르 섬. 이 섬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피어스-레하나와 얽히게 되는지 차마 말할 수 없다.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를 풀어내는 것이 독자의 큰 즐거움이 될 것임을 알면서 그걸 가르쳐드릴 수 없다 책은 모두 3부로 되어 있고 위에 쓴 건 1부 요약이다.
2부와 3부는 1부와 비교해서 재미있다. 1부가 불만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내가 1부를 좀 지겨워하면서 읽었다. 없어도 되는 에피소드가 마치 중요한 일인 것처럼 연속적으로 나와서 그랬을까? 작품은 사랑 이야기다. 간혹 여성주의 적이기도, 탈식민주의 적이기도 하다. 스토리는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스포일러가 분명할 거 같아 말을 아끼게 된다.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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