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바라보며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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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면 소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심지어 음식이면 음식까지 사통팔달 도무지 막히는 데 없이 무제한의 오지랖적 박학다식을 과시하는 키 큰 지식인 줄리언 반스가, 이번엔 몇 달만 있으면 백 세가 되는 잉글랜드 유대인 진 서전트 Jean Serjeant 할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식료품 가게 주인의 딸로 1922년에 태어난 진은 순진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주저없이 내용 그대로를 흡수하고, 세상에 많은 질문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남들은 어리석은 질문으로 여긴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면서 성장하는 소녀였다. 아무리 백 년 전이라도 변변한 학교교육도 받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전통적인 유대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당시의 안정된 보통 집의 보통 소녀로 자랐다.

  진의 인생에는 대강 네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가 레슬리 아저씨. 삼촌인지 당숙인지 정도의 친척으로 콧수염을 길렀던 사랑스런 악당이라고 기억한다. 그를 “오징어 먹물 같은 품행”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 작품에선 진의 앞을 못 보게 하고 그 틈을 타 자신은 내 빼는 품행이라는 뜻? 아직도 모르겠다. 진이 일곱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슬리 아저씨는 히아신스 구근을 신문지에 싸서 선물로 주며 빛이 들어가면 싹이 나지 않을 터이니 절대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 포장을 열고 한쪽 눈으로 구근을 보여주었는데 정말 작게 싹이 나고 있었다. 일곱 살 소녀가 다음 늦봄까지 댓 달 동안 눈에 번히 보이는 신문지 뭉치 속 싹이 돋고 있는 히아신스를 몰래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말이지. 진은 당연히 전지불을 들고 수시로 종이 뭉치를 열어 빛을 비쳐보았지만 싹은 여전히 크리스마스 때 처음 본 딱 그 모습대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는 거였다. 봄이 돼도 마찬가지. 그래서 신문지 뭉치를 펼쳐 보았더니 히아신스 구근은 없고, 여태 싹이라고 알고 있던 건 흰색의 플라스틱 골프 티일 뿐이었다.

  그래도 진은 멋있고 귀여운 악당 레슬리와 “녹색의 천국”이라 불렀던 골프장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부리는 마술도 보았으며, 푸는데 앞으로 9십년 이상을 들여야 할 수수께끼도 생긴다. 이런 수수께끼들:

  ① 영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왜 골프를 좋아하지 않지?

  ② 무솔리니는 종이가 어느 방향으로 접힐지 어떻게 알았을까?

  ③ 천국이 진짜 굴뚝 위에 있을까?

  ④ 어째서 밍크는 유별나게 생명력이 강할까?

  그리고 훗날 영국공군에 의하여 목록에 보태질 다른 하나의 수수께끼

  ⑤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할 때 다섯 개의 샌드위치를 가지고 가서 한 개 반을 먹고 나머지는 아직도 샌드위치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 같은데 그런 박물관이 정말로 있고, 거기에 가면 린드버그가 먹고 남긴 샌드위치를 볼 수 있을까?

  담배를 피우면서 필터 끝까지 하얀 재만 남길 동안 재가 담배에서 떨어지지 않게 피우는 묘기의 비밀은 먼 훗날 레슬리 아저씨의 영면의 침상에서 역시 노년에 접어든 질에게 가르쳐준다. 담배에 바늘 하나를 꽂으면 재가 떨어지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이 더 믿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연기를 해주어야 하지. 2차 세계대전이 날 것 같으니까 미국으로 가 징집당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떳떳하지 못한, 그렇다고 사기치는 건 아닌 사업을 하다가 목소리가 큰 여성 주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생을 마감하는 독신자. 혼자 몸이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 진에게 한 푼도 남겨주지 못한 말만 그럴듯한 허풍선이.


  두 번째 남자는 책을 열자마자, 1941년 6월의 어둡고 조용한 밤에 프랑스 북부 상공에 침투하여 전투비행을 하고 있던 영국공군 조종사 토머스 프로서. 독일 폭격기와의 전투 없이 회항을 하다가 수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솟는 광경, 장엄함에 넋을 놓고 있던 청년. 그러다가 바다에 함정 한 척이 운항하는 것을 발견, 급강하해 수색을 해보니 상선이어서 다시 고도를 높아는 동안 또다시 나타난 황금색 태양. 그는 이날 생전 처음 두 번의 일출을 보게 됐고, 이 화려하고 장엄하며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일출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작품의 제목 <태양을 바라보며>도 이 장면에서 따온 듯.

  전쟁중인 시절, 영국 정부는 서전트 씨 댁에 전보를 통해 “군인숙사제공명령서”를 보낸다. 군인 한 명을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재워주고 먹여주라는 명령이다. 이때 집에 들어온 사람이 토미 프로서. 영국공군 제복을 입은 조그맣고 호리호리한 사람. 훗날 다시 비행명령에 의하여 출격했다가 행방불명,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는 의견을 받게 되는 사람. 그는 비행중 적과 교전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상 비행이 관측되어 비행부적격에 이은 비행금지 판정을 받아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토미는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을 진에게 이야기해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1941년 6월 새벽에 있었던 일출의 태양.

  전쟁과 비행중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인생을 돌아보게 된 토미는 얼마 후, 진과 세번째 남자 마이클이 데이트를 시작하고, 결혼을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자 조언을 해주기를, 한 번 불에 데어봐야 해. 그래야 두 번 데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거든. 토미와 진은 비겁과 용기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용감한 것은 늘 달라지는 법이라고.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겁에 질린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용기라며.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몇 달 전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단편소설 <신문배달 소년의 명예>가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악당과 지독하게 무서움을 타는 커다란 덩치의 사나운 개가 달려들며 짖어대는 대도 아들을 대신해 자전거를 타고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을 배달해주던 아버지는 결코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내용. 토미 프로서가 이런 의미에서 용기가 있던 조종사였는지는 끝내 모르지만 그는 대서양 한 복판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시 등화관제 업무를 맡은 경찰관 마이클 커티스. 첫 방문과 두 번째 방문은 등화관제를 핑계로, 세번째는 지나가는 길이라고 둘러대며 진과 연애를 시작한다. 스무 살이 된 진은 나이만 그렇다는 것이지 남녀가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면 서로가 서로를 만지고 싶게 되는지, 키스를 하고 싶게 되는지, 더 나가서 어떻게 성적 결합을 하게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없는 숙맥이었다. 오죽했으면 옆집에 사는 바레트 부인이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면서 “젊은 부부를 위한 조언집”이란 책을 주었을 정도다. 이 책에는 부부생활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당연히 1930년대 양식에 입각해 가능한 한 가장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가사, 요리, 빨래, 옷 짓는 법은 물론이고 침대에서의 과정과 기교까지. 진은 다른 모든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특히 성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탐독을 했지만 하는 이야기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 또는 멍청했고, 심지어 웃음만 나고 설렘 같은 건 1도 없었으며, 수치로 설명하고 있는 남성의 생식기의 길이에 경악을 할 뿐이었다. 당연히 마이크도 진과 데이트를 하면서 손을 맞잡는 거 말고는 여간해 진도를 뺄 수 없었다. 몸을 만져보기는커녕 키스 한 번도 제대로 못했지만 결코 성급해하지 않는 마이크.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은 후, 마이크는 진의 처녀성에 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런던의 여의사 닥터 헤들리에게 보내 여성에게 필요한 검사를 시킨다. 검사는 무슨 검사. 섹스할 때 여성의 몸에 삽입하는 고무 재질의 피임기구를 사용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다. 의사는 아직 어떤 물질도 왕래한 적 없는 진의 몸을 질경을 삽입해 조사한 후 페서리의 사용에 적당한 구조라고 단정한다. 이후 삽입 연습과정은 생략.

  마이크는 뭐 그냥 잡놈이다. 아니면 40년대 보통 남자들이 다 그랬든지. 이때도 콘돔은 널리 알려졌음에도 비싸고, 사용할 때마다 아프고, 간혹 출혈도 나는 페서리를 아내한테 사용하라고 하는 건, 지금과 비교해 무지하게 두꺼워 성감을 제대로 느끼기 힘든 콘돔을 사용하기 싫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잘 하기나 하면. 진은 마이크와 지지고 볶으면서 20년의 세월을 산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20년 만에 임신을 한다. 자기 몸에 네번째 남자 그레고리가 든 순간, 이제 절대로 마이크와 함께 살지 못하겠음을, 자기 힘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이가 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결심하면서 임신 일곱달일 때 서류작업 없이 집을 나온다. 출산을 하고 그레고리를 혼자 키우면서 힘든 세월을 보낸다. 마이크 역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진에게 유증해, 이제 나이든 진은 자기가 만든 세계 7대 불가사의와 그랜드 캐니언을 찾아다닌다.

  또 세월이 흘러, 백 살을 몇 달 앞둔 시점에, 진은 쉰아홉 살이 된 독신 그레고리와 함께 두 번의 태양을 바라보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한 세월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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