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버린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96
문충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

  정말 오랜만에 문충성의 시집을 샀다. 그리고 1년 하고도 열 달이 지나 첫 장을 열었다. 지독한 게으름이다. 문충성은 80년대 초반에 조금 읽고, 이후 드물게 우연히 읽게 되면 읽고, 아니면 말고, 그냥저냥 그랬다. 우리 나이로 마흔 살에 등단해 첫 시집 《제주 바다》를 당시 모교 아르센 루팡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지, 빈 주머니를 털어 두부김치에 막걸리 한 통을 마실까 주저하다 돈 주고 사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읽었다. 별로 감흥이 없었나 보다.

  문충성이, 아이고, 그동안 “우리나라 나이”가 없어져 그냥 여든다섯. 하기는 내 턱을 따라 돋은 터럭에도 눈 내린 지 오래니까.  이 시집이 나온 해가 2011년. 일흔셋일 때 출간했다. 말이 일흔셋이지, 시인은 이제 서울 나들이를 하더라도 며느리의 삼촌이 대나무로 깎아준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선다. 시인은 병들고 시인의 아내는 아프다. 앞서거니뒤서거니 혹은 며느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행이 다반사다. 그래도 아직은 그림자가 둘이어서 조금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노인들은 조금씩 쇠하는 게 아니라 큰 계단처럼 한 방에 훅 가고, 얼마 있다가 또 한 방에 훅 가고, 몇 번 훅, 훅 가다가 툭, 떨어진다. 그걸 시인이라고 모를 턱이 있나. 그리하여 시집의 마지막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꽃들 지고


  여름날

  왕잠자리 날 듯

  벙그는 연꽃들과 눈 맞춰뒀다

  고양시 호수공원

  연꽃 밭

  다리 아파

  갈 수 없다

  산책 갔다 온 막내딸애

  말한다

  연꽃들 졌더라고

  만딱!  (전문)



   마지막 행의 “만딱”에서 ‘만’은 “아래 아”를 쓰는데 지원이 되지 않아 그냥 ‘만’이라고 썼다.

  소감? 나도 딸 하나 있었으면. 아들 집에 가봐라, 서로 불편하다. 며느리는 호수공원을 바로 앞에 두고도 혼자 산책하러 나가기 눈치 뵈고, 갔더라도 연꽃이 졌다고 얘기하기도 눈치 보이고, 시부모도 마찬가지로 다리 아프다 한 마디 하기도 뻑뻑하다. 그냥 하는 얘기다. 딸이건 아들이건 다 크면 각자 사는 게 장땡이다.

  문충성이 정말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시를 읽으면 “연꽃들 졌더라”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히면서 ‘나’의 시간도 이젠 질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이런 시를 쓸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터이니.

  민영, 고 오탁번, 정희성 등등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말년 시는 주변의 자잘한 사물, 일상 같은 것을 새롭게 보고 듣는 노래가 많다. 이이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령 이런 시.



  동동



  파란 달빛 소리

  파르르

  눈 떴다


  아무런 생각은

  잠자고


  방 하나 그득

  넘쳐난다 달빛이


  파랗게 떠간다 파랗게

  아무런 생각이

  동동  (전문)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노년의 시인이 자다 깼다. 방 안 가득 달빛이 들어오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생각들이 동동 달빛에 희뿌윰한 어둠 속에 동동 떠있는 그림, 또는 노래. 어떠셔? 귀엽지? 또 이 시절의 시인한테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종의 특권이 주어진다. 젊은 사람들이라고 추억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수십년 오래 묵어 고릿하게 묵은 내가 나는 추억, 연상 만하겠는가. 문충성은 자신의 20대를 추억한다.



  가짜 사기꾼



  이제야 알았다

  사기꾼들 세상

  언어의 감옥에서

  동대문시장에서

  그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길 위에서

  도주하라

  1960년대 가난한 그

  전당포에서

  명동에서

  전차에서

  아니면 충무로에서

  이고 다니던 하늘

  싸구려로 저당 잡혔다

  냄비 우동 한 그릇 값에

  그리고

  얼굴 붉히며

  사기꾼들 사이에 끼어 아직

  사기꾼이 되지 못한 가짜 사기꾼

  120 당구를 치고

  막걸리 대폿집 지나 ‘달 다방’으로

  점심 값 살리고

  어깨 구부리고

  걸어 들어갔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브람스 들으러  (전문)



  여기서 “가짜 사기꾼”은? 시인 자신이다. 한 번 까볼까? 제주에서 살다가 서울 유학 온 “1960년대의 가난한 그”라고? 쇤네도 돈 아까워서 당구 한 판 안 쳐봤습니다. 당구 10분 칠 돈이면 막걸리가 한 되인데 어떻게 손 떨려서 큐를 잡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브람스도 열라 들었습지비. 학교 음악감상실에 죽치면서 듣든지, 한 겨울 종로1가 르네쌍스에서 그애하고 덜덜 떨며 듣던지. 시퍼렇게 얼 정도로 벌벌 떨다가 냄비우동은 자주 사 먹었군.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시인이나 소설가가 쓰면 그럴듯하고 나같이 무지렁이가 쓰면 꼴값을 하는 거다. 그러니 보통의 독자여, 어디 가서 함부로 궁상 떨지 맙시다. 괜히 가오만 떨어지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런 거 하나 더 있지? 첫사랑 이야기. 그것도 길게 해봐야 꼴값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그러나 이 시집 《허물어버린 집》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대사의 큰 비극 가운데 하나인 4.3 사건과 사라져가는 제주도 언어와 제주 사람들이다. 내가 4.3 사건과 제주에 관해 아는 것이 없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해 말하지 않았다. 시인이 열 살 때 직접 눈으로 본 산간마을에서 있었던 참사를 내가 뭐라고 아는 척을 할 수 있겠는가.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참수한 사람의 머리통을 죽 늘어놓은 광경. 그걸 본 열 살의 소년은 30년 후 시인이 되고, 다시 30년이 더 지나 본 것을 노래한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3-12-04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딸 하나 있어봤자 되바라지게 아빠 드러워!! 꼰대애!!! 할 걸요 저기는 옛날 딸이라 연꽃 진 거도 알려주고 그러지 ㅋㅋㅋ 옛날 이야기 독후감에 잔뜩 팔아먹은 입장으로 꼴값처럼 보일 수도 있구나…안 본 눈 사드릴 수도 없고 어쩌지 계속 꼴값이나 떨어야지…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2-04 10:19   좋아요 1 | URL
그 딸도 ‘옛날 딸‘이 될 즈음엔 늙은 아빠한테 연꽃이 졌다고 하지 않을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