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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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인생의 황금시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된장인지 청국장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20대에 유서 깊은 뮌헨 대학 의학부에 입학해서 한 학기 만에 때려치우고 연극판에 들어간다. 1922년엔 희곡을 발표해 클라이스트상도 수상하는 등 앞길이 유망했다. 지금 뮌헨은 오케스트라, 오페라, 연극, 하다못해 축구 같은 전방위적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다른 건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변두리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야심이 꼭대기까지 찬 브레히트는 1924년 베를린으로 옮겨와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1920년대의 독일. 1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물어주어야 했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등 정치, 경제 역시 폭망 상태에 이르러 당연히 정상적으로 운행되는 사회 시스템은 전무했다. 먹을 것이 해결된 다음에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기는 것이니까.

  브레히트를 스타덤에 올려 놓은 것은 우리에겐 숱한 재즈 싱어가 노래한 노트 “Mac the Knife”가 든 <서푼짜리 오페라>일 듯. 이 작품은 현대음악 작곡가이지만 전혀 어렵지 않은 흥미로운 곡으로 일세를 풍미한 쿠르트 바일이 1928년에 정말 오페라로 작곡해 기존 오페라 가수의 발성법과 판이하게 다른, 제3제국의 근엄한 지도자들이 듣기엔 심각하게 저속해서 싸구려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의 독일, 베를린이 전 세계에서, 그리고 독일의 전 역사를 통해서 가장 싸구려 신세로 떨어진 것과 묘하게 닮아 있었던 거다. 이렇게 독일의 딱한 정치 경제 실정을 체득하게 된 브레히트가 필요에 의해서 사회현상을 공부하다가 마르크스 주의에 근접하게 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그렇다고 공산당에 입당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근데 독일엔 벌써 1920년부터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즉 나치가 존재했고, 나치가 전력을 다 해 박멸해야 할 것은 장애인 등의 육체적 약자, 유대인, 그리고 공산주의자였으니, 이들의 눈 속 장작개비 같은 존재 가운데 한 명이 브레히트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33년. 2월 28일 나치 일당은 독일의 제국의사당에 불을 싸질러 버렸고, 퇴폐 예술가로 낙인이 찍혀 이미 나치의 살생부,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던 브레히트는 즉각,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독일을 탈출한다. (책의 해설에 의하면 그렇고, 위키피디아에는 1월에 벌써 망명길에 올랐다고 쓰여 있다. 내가 귀신이 아닌 바에 어느 게 맞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유럽 각지를 배회하던 브레히트는 덴마크에 정착하는 듯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스웨덴, 핀란드,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미국행 화물선으로 로스앤젤레스 해변을 밟는다. 이때가 1941년. 좋았을 거 같지?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를 호환, 마마보다 훨씬 무서운 것으로 취급해 브레히트는 줄곧 사찰의 대상이었으며, 일체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해 먹고 살기 위하여 원고를 쓰고 팔아야 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대표 희곡 작품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등. 앞에서 말한 <서푼짜리 오페라>와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합해 네 작품을 한 권에 묶어 동서문화사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한 권 장만해 책장에 꽂아 놓아도 큼지막한 장정이 근사할 터. 그러라는 말씀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


  유럽의 모처에 숨어 살던 브레히트는 1937년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베를린에서 보고 체험했던 것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자기는 망명길에 올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나중에 탈출한 사람에게서 들었거나, 유럽 각지에서 송출하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들었거나, 신문, 잡지, 보고문을 읽었거나, 망명 전에 경험하고 들은 것을 토대로 상상한 것을 작품으로 쓰는데, 프롤로그 격인 “독일 열병식”에서 말한 것과 같이 1933년 1월 30일 다수당 당수로 총리 자리에 오른 히틀러가 정권을 탈취한 후 모든 전쟁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한 햇수로 5년째, 1937년 현재, 완전한 전체주의 국가, 일인 독재국가, 경찰국가 치하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각양각층 사람들이 나치 치하에서 겪는 공포와 허위, 배반, 불신, 적응, 밀고, 피해의식 같은 것이 다양하게 스물일곱 장면의 쇼츠로 구성된다.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불평불만자를 고발하려고 동네를 순찰하다가 소리나는 곳에 대고 무작정 총질을 하는 친위대 간부들, 이웃이 친위대에 체포된 것을 보면서도 이웃이 입은 두툼한 재킷에 더 신경이 쓰이는 소시민 부부, 대화를 즐기면서도 사소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이웃의 어깨에 흰색 분필로 은밀히 십자를 표시하는 돌격대 대원, 진실과 일신상의 안전 사이에서 판결을 고민하는 지방법원 판사, 수용소에서 다친 공산주의자 수형인을 직업병이라고 판정하는 의사,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채용하지 않는 과학자, 아들 앞에서 약간의 사회비판을 하고 혹시 아들이 돌격대에 신고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부모 등등의 쇼츠. 1970~80년대 파시즘 국가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인, 또는 생활이었던 것이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과거를 지녔다는 것이 많이 쪽팔렸다. 이 파시스트 개자식들의 공통점. 자신들이 하는 악마 같은 행위가 정의롭고 최선인 줄 안다는 거. 징그럽다, 징그러워. 다중 선동에 의한 다중에 의한 독재.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다.


  원래 브레히트는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을 <공포: 나치 치하 독일 민족의 정신적 고양>이라는 제목의 다섯 편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도 모두 27편의 쇼츠 가운데 몇 개, 3편 <분필 십자 표시>와 5편 <적법한 판결>, 8편 <유태 여인>, 9편 <밀정>이 상대적으로(쇼츠라고 하기엔) 분량이 많고, 내용을 조금만 더 보태 독립해서 공연해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나머지 편들은 ‘몽타주 기법’이라고 하는데, 몽타주라는 말도 그럴 듯하나, 조각 그림으로 한 그림을 완성하는 직소퍼즐 식이라 해도 어울린다.

  아직 세상은 좌우 가릴 것 없이 파시즘의 재래를 기다리는 미치광이 신도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자기들의 꿈이 파시즘인 것도 모르는 정치배들. 그리하여 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독재의 폐해를 알리는 작품을 읽어두는 일은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미덕일 수 있으니, 이를 어쩔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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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11-1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들의 꿈이 파시즘의 재래인걸 모르는 정치배의 예시가 궁금합니다
한편으론 제 입장에선 이미 파시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하나의 예시로는 생존을 볼모로 이주민 차별이 제도적으로 당연하고 그걸 또 공공연하게 언론에서 주장하고 제도화하는 일상이라
돈 가진 사람의 안전만 보장되는게 당연하고. 보상이 불가능한 재생산 돌봄 노동을 하며 경력인정도 안되고 가난한 사람도 많고요.
한편으로는 안전지대도 없이 폭격하는걸 공공연하게 공적발화로 지지하기도 하네요…최근의 팔레스타인 학살도 그렇고요 그걸 바라보는 서방언론이나 한국의 주류 언론이나 잔인하고.. 병원, 학교, 어린아이는 죽이지 말자는 최소한의 무엇도 없는 학살이었잖아요.
자본주의 시스템과 사회가 제도적으로 배제하고 방관하는 죽음들은 파시즘과는 무관한가요?
코로나 시국에 확인했듯, 개개인이 어딜가도 동선이 파악되는 것부터 그렇고요
재판에서 밝혀졌지만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의 부모도 국정원 감시하에 있었고..

Falstaff 2023-11-16 18:52   좋아요 1 | URL
예. 하신 말씀 공감합니다. 필요 이상의 과학 발전도 네오 파시즘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전 구식이라 그런지 몰라도 권력 자체가 이미 전체주의 속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들 스스로 정의롭다고 굳세게 믿는 집단을 저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백년 전 쯤에 태어났다면 아나키스트가 됐을 지도 모르겠네요. ㅎㅎㅎ

우끼 2023-11-16 20:19   좋아요 1 | URL
헉.. 저도 중앙집권화된 권력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논의하는 것을 아직은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없이 회의주의에 빠지고서야 당장 숨쉬는 것도 힘들어서요
그리고 변화가 실현가능하도록 계속 움직이는 일원으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