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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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수의 시는 쓸쓸하다. 스산하고 애잔하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이 난감의 언덕을 넘지 않아 궁상스럽지 않다. 시집을 열자마자 곧바로 독거노인과 개펄 일을 마친 쪼그랑 할머니다. 데뷔 28년 만에 첫 시집을 낸 3단短short, 체구가 작고 가방끈이 짧고 극약같이 짤막한 시만 쓰는 서정춘이며, 씨멘트를 반죽해 벽을 바르는 미장이 사내였다가, 맹물에 밥 말아 밥 떠넣고 장 떠넣고 밭에 나가 그 길로 세상 등진 경운기 할아버지이고, 법원 앞 신호등 무시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무법자 할머니이기도 하다. 어쩌면 가여운 모든 이들한테 시인은 “이만할 때 고만 돌아가이소.”라고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시집의 해설을 쓴, 시인한테 띠 동갑 아우이지만 많지 않은 나이에 고인이 된 평론가 김양헌은 “꼭지는 슬프다. 질기고 질긴 슬픔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울음부터 들은 꼭지. 계집 꼭지는 그만 똑 떨어지고 사내아이 점지하라는 부적, 꼭지.” 라고 해설을 시작하여 마치 이 시집을 남성한테 핍박받은 여성의 박복한 모습을 그린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으나, 읽어보면 조금 오버한 거 같다. 김양헌이 말한 “꼭지”는 시집에 제일 먼저 실린 시의 제목이다.



  꼭지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전문)



  장면을 머리에 그릴 수 있다. 독거노인 꼬부랑 할머니가 동사무소에 가서 일을 보고 달동네 언덕 골목길을 애터지고 느리게 걸어 올라가다가 힘이 드는지 전봇대 아래 쉬어 가는 길, 난데없이 등장한 노란 민들레꽃. 꼬부랑 할머니한테는 노란 것이란 젖을 못 먹어 노랗게 뜬 아이의 얼굴을 연상시킬 뿐이라, 탓하니 가난해서 젖조차 말라버린 자신의 젖꼭지, 이미 그 시절도, 노랗게 뜬 얼굴의 아이도 주전자 뚜껑 꼭지 떨어져나가듯 새처럼 날아가 혹시 모르지, 늙은 가슴 숨 들이마셔 한숨 한 번 폭, 쉬고 펴지지 않는 무릎 억지로 끌고 다시 휘적휘적 골목길 걸어 올라갔는지. 인생 뭐 있나. 한 번 나와 살다가 가면 그만인데, 하필 나한테 이런 신난곤난이 떨어져, 한탄 한 번 하고 싶은 삶이 어디 한두 개냐마는, 그것도 신난곤난 나름이지 문인수의 손끝은 제일 신난한 삶을 이젠 거의 다 마친 이들을 찾아간다.



  만금이 절창이다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 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전문)



  제목에서 ‘만금’이 뭘까? 많은 돈萬金은 아닐 거 같고. 조개잡이 할머니 대사가 전라도 사투리인 것을 보면 부안 개펄, 만금, 이제 바닷물로 수몰이 됐거나 내가 모르는 지역으로 하여튼 새만금이 들어서기 전의 근처 어느 곳 아닐까 싶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곳으로 썰물이 지면 조개잡이들이 물을 밀며 걸어 들어가 배밀이 같이 개펄을 뒤집어 숱한 바지락 등을 잡고 밀물이 들어오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데, 등에 진 무거운 조갯짐 망태의 무게를 견디기에 이제 너무 늙은 할머니. 기어이 저린 다리로 귀환해 망태를 부리며, “죽는 거시 낫겄어야.” 하는 대사가 늙은 연명, 늙어서 명을 늘이는 동안의 절창이라는 시인. 그리하여 시인은 시집의 저 뒤편에서 고향 경상도 성주 사투리로 “이만할 때 고만 돌아가이소.”라고 할 수 있었을 테지. 연명도 연명 나름, 독거노인 꼬부랑 할머니나 조갯짐 망태 진 만금 할머니나, 비닐봉지나 다 거기서 거기다.



  비닐봉지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

  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떴다 가라앉다 하면서

  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

  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 뒤에, 두둥실

  웬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누군가의 발목에서 떨어져나온 그림자, 그늘인 것 같다. 과거지사는 더 이상 다치지 않는다. 이제

  적의 멱살도 박치기도 없는 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또 잔뜩

  바람을 삼킨다. 대단한 소화능력이다. 시장통,

  거리의 밥통이다. 금세 홀쭉하다.  (전문)



  운전하면서 여태 아스팔트 위를 나는 검정 비닐봉지 한 번 못 본 사람은 없을 터. 바람이나 차량의 속도에 의한 공기의 이동에 따라 넘실넘실 춤을 추는 것 같이 날아다니다 이 차에 치고, 저 차에 치다가 결국 차의 뜨거운 머플러에 녹아 한 세상을 마감하던지, 그냥 그렇게 휘날리며 시간을 죽이다 운 좋게 인도로 날아들어 마음씨 좋은 행인에게 걸려 쓰레기통에 들어가거나, 청소부에 의하여 장사지낼 검정 비닐봉지. 시는 절대 한 번도 기미를 보이지 않지만 나는 시를 읽으면서 왜 슬프고 쓸쓸했을까? 다정도 병인 양한다고? 아마 비행 또는 활무活舞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태한 도로에서 무거운 쇳덩이에 충돌 당하며 흐느적 거리는 때문이겠지. 이미 알맹이를 내주어 빈 껍질만 남은 것이. 사람이나 비닐봉지나 자기 속의 것을 다 내준, 시간의 끝 무렵은 늘 그런 것이겠지. 문인수가 시집을 낼 때의 나이 예순 셋. 그래, 이제 이런 시들을 쓸 때가 됐었다. 이왕 쓰는 김에 조금 더 오래 써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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