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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초록 천막 1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0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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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1943년생. 스탈린 치하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스탈린이 죽었으나 극소수 소비에트 엘리트를 위하 전체주의는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등이 성공적으로 계승해 울리츠카야가 마흔여섯 살이 되는 1989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니까 작가의 젊은 시절은 세계적 냉전 기류 속 도청과 감시, 밀고, 불법 구금, 집단 수용과 유형 수준의 징역의 세상이었다. 물론 소비에트만 그랬던 건 아니다. 다 아다시피 미국에서도 메카시즘 광풍이 있었고, 로젠버그 부부를 전기의자에 올려놓은 일도 있었다. 당연히 미국 및 서유럽의 반공주의를 소비에트에서 행해진 공산주의(체제 유지를 핑계로 행해진) 파시즘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스탈린이 죽은 1953년 이전에 비하면 재판 없는 공개 총살 같은 야만적인 처형은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수준의 탄압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당하는, 즉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전체주의/파시즘/독재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장 그 고통이 언제나 엄혹한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철권에 의한 시민 통제에 반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어럽게 찾을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1970년대, 80년대 민주화라는 이름의 자유 회복 운동을 떠올리면 직방이다. 울리츠카야는 자기 나이 또래 반정부 활동을 했던 집단을 주인공으로 해서 스탈린 사후인 1953년부터 1996년 세월까지 이들의 성장과 운동가로의 변모, 이후의 고난 등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그렸으니 바로 <커다란 초록 천막>이다.
제목 "커다란 초록 천막"이 무엇일까? 프롤로그를 포함해서 작품의 여덟 번째 챕터의 제목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천막'은 근본적으로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역자 승주연도 역자 해설에서 "작가도 '천막'이라는 주제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라고 내 의견을 지지해주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이 천막 또는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러시아 멸망 시기, 즉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이어진 레닌과 스탈린 시대, 그리고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등의 후계자 시대를 통해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되었거나, 저항하다 죽음을 맞았거나, (크건 작건 간에) 고통에 찬 '나머지 삶'을 살다가 생을 접은 모든 사람들, 좁게는 등장인물들 주변의 사람들의 죽음을 말한다.
울리츠카야의 작품은 단편집 <우리 짜르의 사람들> 한 권만 읽었다. 그 책이 많지 않은 분량에 서른 몇 편의 단편을 실은 작품집이라 그리 인상깊지는 않았는데, 울리츠카야가 메릴린 로빈슨에 이어 (세계적인 문학상이었으면 좋았을) 제2회 박경리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조금 관심이 생겼다가, 얼마 안 되어 잊혔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두 권, 본문만 천백 쪽에 육박하는 장편소설을 읽으니, 내용이야 어려운 시절을 보낸 당대 소비에트, 특히 모스크바 시민들에 대한 헌사인 것은 맞지만, 에피소드들이 과하게 복잡하게 얽히고 등장인물도 너무 많아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하지 않으면 많이 헷갈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건, 흔히들 그러하듯이 각 단계/챕터를 단편소설 쓰듯 해서 그것들이 서로 연결이 되는 구조라 그랬지 않을까 싶다만, 내가 뭘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읽혔다는 것 뿐이다..
세 명의 사내 아이들이 있다. 작품의 주인공들이다. 일리야 브랸스키, 미하 멜라미트, 그리고 사냐 스테클로프. 시절은 40년대 후반 또는 50년대 초반. 43년생 정도의 이들이 1학년에 입학한 시기다. 이들은 사막의 늑대들이 횡행하는 교실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다. 강하고 사나운 두 늑대 무리를 이끌고 있는 무리긴과 무튜킨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잠시의 평화시기를 누릴 때만 되면, 대장 늑대들과 그들의 추종자이자 꼬붕들이 조심하라는 경고로 쉬는 시간이나 화장실에서 가볍게 취미삼아 두드려 팰 수 있는 타악기로 존재하기도 했다.
일리야는 비쩍 마르고 키만 훌쩍 컸다. 엄마는 우울증이 있는 홀어멈이라 허름한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남루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법석 떨면서 광대처럼 웃기기 좋아했고 가난한 자기 상황을 희화 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눈에 번히 보여 더 슬픈 아이였다.
미하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아이다. 엄마는 열차 폭파 사고로 죽고, 아빠는 전사한 고아로 지난 주부터 새로운 후견인이 된 게냐 고모 댁에 얹혀 살고 있는 빨강머리에 주근깨투성이 얼굴, 지독한 근시를 가졌다. 전학을 와서 세 명의 집단에 늦게 가담했다.
사냐는 지난 시절 거의 최고 귀족 가문의 후예로 피아노 연주에 러시아 식 천재를 가지고 있으나, 후에 장난으로 시작한 눈싸움 도중 늑대 대장 무리긴에 의해 오른손 손가락 세 개의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연주자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얼마 안 지나 무리긴도 미하가 선물받은 스케이트를 빼앗으려는 와중에 질주하는 전차에 치어 참혹한 모습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접어버리고 말지만.
이들은 스스로 '트리아농'이라고 했다. 이 트리아농이 베르사유 궁정에 속한 빌라를 말하는 것인지, '트리'라고 했으니 삼총사 비슷한 것인지, 세 명이니까 삼총사에 더 가깝지 않을까 궁리하고 있는 바, 아직까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말 세 마리가 끄는 마차가 트로이카, 삼총사 쪽이 더 비슷하지 않을까? 하여간 이 '트리아농'은 20년 후에 사진에 관한 한 도사 수준이 된 일리야를 상대로 한 고위직 공무원이 국가 안보에 관한 위압적인 대화를 하면서 처음 언급한 이름이다. 이들은 어쩄거나 학교라는 이름의 정글/사막 속에서 생존에 성공하여 5학년에 진급을 했고, 위대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2차 세계대전 참전 상이군인이자 담임 교사인 빅토르 율리예비치 선생으로부터 모스크바 골목골목, 광장 건물마다 그곳에 담긴 러시아 문학의 흔적을 좇는 "러문애", 러시아 문학 애호가들이란 서클이 탄생한다. 당연히 세 명의 트리아농 멤버들은 러문애 회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며, 빅토르 선생을 통해 또래에서 가장 넓은 문학적 스펙트럼을 지니게 되는데, 이때 쌓은 소양은 훗날 이들의 중요한 자산이 되기도 한다. 좋은 교사 한 명 만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이렇게 세 명의 주인공들은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한다.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일리야는 대학 진학을 자진해 포기하고 생물학적 아버지가 준 마지막 선물, 소련산 독일제 라이카 카메라의 모방품인 FED-S 카메라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19세기 초부터 혁명가들의 숨은 사진을 추적하고, 당대 소련의 다양한 운동성과 생활상을 촬영하는데 전력을 다해 다양한 아카이브를 만들어 나간다. 이 가운데 거의 대부분을 소련 당국에 압수당하기는 하지만 일부는 서유럽으로 유출하여 그곳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소개가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리야는 특유의 활달함과 넓은 인간관계로 당대 가장 중요한 반정부 인사의 한 명이 되며, 두 명의 죽마고우들이 곤경에 빠질 때마다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방패막이가 되주기도 한다.
미하는 어려서부터 시인이었다. 나중에 스스로 생각해보면 그리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하여간 시인은 시인이라서 마음이 여려 어려운 처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려 하다가 곤경에 빠지고 만다. 소련 당국은 유대인 미하에게 이스라엘로 이민을 권하기도 하지만, 소련에서 낳고 자라고 러시아 말로 시를 쓰는 시인에게 러시아 땅에서 떠나라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진퇴양난이 되고 만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사냐는 끝내 여자친구 리자와의 애틋한 사랑을 6촌 남매라는 멍에 때문에 이루지 못한다. 사냐는 세 손가락의 신경이 절단되어 연주를 포기하면서 진정으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연주자 대신 음악 이론가의 길을 선택해 성과를 이루지만 이 시기에 청춘의 강을 건넌 사람들 가운데 슬픔 없는 이가 없다. 세 친구를 모두 사랑했던 할머니 안나 알렉산드로브나가 숨을 거두자마자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떠난 과부 엄마가 남자와 함께 돌아와 집을 차지하면서 사냐는 소련 탈출을 꿈꾸기 시작한다.
시절들. 비교를 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는 작품이 <커다란 초록 천막>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의사 지바고>. 지바고가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기에 젊음을 소진한 세대를 향한 헌사였다고 하면, 울리츠카야가 자기와 동 시대를 보낸 세대에게 바친 헌사가 <커다란 초록 천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장한 장편소설을 읽은 후의 포만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챕터 별로 다양한 에피소드가 들어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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