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작가선 3
서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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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인. 이름만 소리내 읽어도 참. 옛 생각 나는 작가다. 학창시절 이 양반의 단편 속에 푹 빠져 산 적이 있다. 당연히 단편집 《강》. 그리고 십여 년 후 민음사에서 낸 세 권짜리 장편소설 <달궁>. <달궁>은 한 서너 번 읽은 거 같다. 하도 애정이 깊어져서 그랬던 것이 분명한데, 한 권은 넘어진 소주 병에서 흘러나온 알코올과 돼지고기 김치찌개 국물에 푹 적셔졌고, 그걸 아무 생각 없이 양지바른 베란다에 널어놓았더니 너무 바싹 말라 책 한 가운데가 쩍 갈라졌다.
  이이는 글도 무척 오래 쓴다. 오랜만에 읽는 중단편집이다. 마지막 작품 <뜬봉샘>이 2017년 발표한 것이니 이이의 나이 여든한 살이었다. 30년대 생 작가 거의 대부분이 이젠 여유작작한 은퇴생활을 하던지, 돈 좀 손에 쥔 이들은 자기 이름을 댄 문학관을 짓고 사숙을 받던지, 아니면 집구석이나 양로원 또는 요양원에서 영원의 쉼을 기다리던지 하는 것에 비하면 노익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정인은 1962년에 『사상계』에 <후송>을 발표해 등단했다. 이 책 《귤》에서도 제일 앞에 실은 작품이다. 도대체 뭐 하나 정상적인 절차와 이유로 진행되는 법이 없었던 전후 우리나라 사회의 어긋난 톱니바퀴를 다룬 병영문학이다. 한 시절을 풍미한 수준을 넘어 신춘문예에서 크게 유행을 했던 장르가 병영 소설이었는데, 서정인의 것이 다른 작가들과 다른 건, 주인공이 사병이 아니라 장교라는 점이다. 장교라고 하더라도 도무지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던 것은 사병과 마찬가지인 것이 첫째요, 주인공 성 중위의 병증이 이비인후과 질환인 심한 이명이라 그것이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얼마나 자주 들리는지, 어떤 음높이로 공명을 하는지 당시 의학 장비로는 도무지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둘째 걸림돌이었다. 하여간 성 중위가 후송을 가기는 가는데, 서울이 아니고 저 멀고 먼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가게 되며, 야전 병원에서 상급 야전병원, 상급에서 차 상급 병원을 거쳐 육군병원으로 갈 때마다 짜증나게 똑 같은 거부 혹은 곤란함을 받아야 했다.
  당시엔 다 그랬다. 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동회, 요즘말로 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 등본 한 장 떼러 가는 길에도, 할아버지는 내게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시면서(작은 돈 아니다. 서울에서 괜찮은 집 한 채에 백만원 할 당시였다) 창구에 있는 주민등록 담당 공무원에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건네라고 이야기를 하시고는 했다. 당시엔 청사진으로 복사를 하던 6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러지 않으면 그깟 주민등록 한 장 떼는데 하루는 기본이고 이틀, 사흘, 심하면 나흘, 닷새도 걸렸다. 책에 실린 <어느 날>의 경우가 이와 비슷하다. 1974년 작품인데도 직장인 김해동은 전셋집을 얻기 위해 은행에서 ‘생활안정기금’을 융자받아야 해서 본인의 주민등록 초본을 발부 받아야 했고, 이를 위하여 전입신고를 해야 했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내 경우엔 이미 수차례 경험을 해본 “급행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정해진 경로를 따라 전출신고, 전입신고와 이에 부속하는 각종 관련인, 예를 들어 통반장의 확인 인장 같은 것들을 꼬박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복잡다단한 우리나라 행정절차에서 의례 그랬듯이 김해동 선생이 아무리 신경써서 서류를 챙겼다 하더라도 꼭 한두 개씩은 빠진 것이 있는지라, 동회 전입관련 공무원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한 사나흘 후에 다시 한 번 와 보슈.” 오라는 것도 아니고 와 보라는 거다. 될지 안 될지는 본인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때 가서도 빠진 서류나 인감 같은 것을 또 발견하면 다시 일 주일 정도 있다가, 왜 일 주일 씩인가 하면, 일단 관에 접수시킨 서류는 이미 공문서이니 신청자 개인이 관의 문서를 가져가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관공서에서 관공서로 우편을 보내 저짝 관공서에 접수를 시키고, 저짝 관공서에서 처리를 한 후, 이짝 관공서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읽는 것만 가지고도 열이 뿔뿔 날 것이란 점은 이해를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잘 살았다. 적어도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으면 지금보다는 높았을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렇게 가진 거 없이 매사 불편하게 살면서도 시집, 장가 들어 딸 아들 관계없이 생기는 대로 낳고 살지 않았는가 말이지.
  이렇게 초기 서정인은 현실 속 삶의 이야기, 즉 리얼리즘 적 시각으로 무장한 인텔리겐치아 화법으로 눈에 보이는 족족, 물론 큰 이야기, 큰 비리나 잘못 같은 건 말고, 현상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게 내가 서른 살까지 알았던 서정인이다. 즉 단편집 《강》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역과 직장 생활 덕택에 오랜 세월 책과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하지 않은 나는 그냥 그렇게 살았다. 세월을 죽였고, 알코올 속으로 숨었고, 좀 더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아예 소도시로 박혀버렸다. 산 좋고 물 좋은 작은 도시의 작은 책방에서 눈에 띄었던 책이 저 위에서 말한 <달궁>이었다.
  <달궁>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서정인을 발견했다.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럴 정도로 크게 변모할 수 있었는지 깜짝 놀랄 수밖에. 현실 비판적 리얼리스트 고뇌형 먹물이 이젠 상당히 앞선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물론 서울대 불문과 출신 두 명의 모더니스트 최수철의 <고래뱃속에서>와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가 이미 책방 서가에 꽂혀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정인이 <달궁> 같은 것을 쓸 줄은 몰랐었다. 물론 불문과 두 사람하고 영문과 서정인이 같지는 않다. 그냥 쇼크 먹었다, 하는 걸 이야기하려 했는데 좀 오버한 거 같다. 양해하시라. 아마추어 뻘짓이 다 그렇지 뭐.
  다시 이 책 《귤》으로 돌아와 보면, 서정인의 대표작을 골라 실은 것 같은데, 물론 대표 단편집 《강》의 타이틀 작품을 실을 수 없으니 그건 제외하고, 1977년에 발표한 <춘분> 다음에 실린 것이 1991년 발표작인 <해바라기>였다. 그러니 이 책을 기준으로 보면 서정인이 언제 모더니즘으로 바뀌었는지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씀. 처음에는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유신 말기와 미친 공화국의 말도 안 되는 독재 시절에 이이가 침묵했을 수도 있다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했다니까! 작가가 작품을 쓰지 않는 것도 이게 쉬운 일이 아니거늘, 혹시 저 남산이나 남영동, 아니면 이문동에 한 번 다녀온 거 아닐까 싶기도 했었으니,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몰라.
  1991년 작품인 <해바라기>는 광주 옆의 나주 시청 점거 사건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영장이나 비슷한 종이 쪼가리 하나 없이 모처에 감금되어 몇 날 며칠을 물먹고, 전기 먹고, 두드려 맞은 기록이다. 내용이야 우울해 마지않고 절망적이며, 시대의 아픔이 새록새록하건만, 서정인은 이 모든 과정을 남도 사투리를 써가며, 사투리를 세상에 이렇게 백퍼센트 알뜰한 맛소금처럼 아낌없이 뿌려대며, 전라도 것 아니면 흉내도 내기 어려운, 하지만 경기지역을 뺀 강원, 충청, 경상, 제주, 각 지방마다 똑 같은 주장들을 하고 있기는 해도, 하여간 어렵고 어려웠던 시기의 우울한 이야기를 애써서 스스럼없이 써내려 갔다.

  그래도 내가 제일 공감하면서 읽은 작품을 고르라면 표제작인 <귤>이었다. 주인공 인우는 오래 전 고향을 떠나올 때 하도 집구석이 곤궁하여 자기 한 몸만 대처로 나갈 수 없어 당숙 아저씨한테 장리빚으로 쌀 열 섬을 얻어 일단 부모와 누나한테 배나 곯지 말라고 했었는데, 장리 빚이면 연 50% 이자가 붙나? 빚을 썼으면 얼른 갚아야 하건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5년이 지나 돈이 좀 생겨 이제 고향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인우는 오자마자 백화수복을 한 병 사 들고, 제일 먼저 뺀찌로 이마빡을 쥐어 뜯어도 피 한 방울 흐를 것 같지 않은 당숙에게 찾아가 여차저차 했으니 5년이면 갚아야 할 쌀 섬이 일흔다섯 섬이지만 3부만 쳐서 서른일곱 섬만 받으라고 제의를 한다. 그동안 인우의 부모는 다 돌아가고, 인우는 부모 운명은커녕 탈상치례로 하지 못해 죄가 많은데, 당숙은, 그 빚은 절름발이 이발사에게 시집을 간 누나가 다 갚았으니 일 없다고 한다. 인우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부모 돌아간 거야 어쩔 수 없으나, 절름발이 이발사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처자식 먹여 살리고, 처가에서 빚진 쌀 섬까지 모두 갚았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1970년대의 사나이라고 속이 무너지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이런 상태에서 당숙의 둘째 아들, 동네에선 망나니라 소문이 났지만 그래도 재종 형제들하고는 은근한 정이 없지 않았던 동석과 작은 읍내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러나 당숙네와 관계한 서운함은 기어이 주먹다짐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더 이상 말을 보태는 것은 과해도 너무 과한 스포일러라서, 안 알려줌.


  재미있다. “재미있다”는 말로 부족하다. 좋은 책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장인의 빼어난 작품들만 골라 한 권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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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5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름만 아는 작가의 책 이야기 즐겁게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8-15 10:4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