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가시 대산세계문학총서 184
시마오 도시오 지음, 이종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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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오 도시오라는 일본 소설가의 이름은 처음 들었다. 요즘 활발하게 세계문학을 소개하고 있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184번으로 출간했는데, 전적으로 출판사와 대산 총서의 명성을 믿고 읽었다.

  시마오는 1917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부모의 고향인 후쿠시마를 오가며 성장했다고 책의 앞 갈피에 소개가 되어 있다. 1917년생 일본인 남자. 초년 운을 잘 견디더라도 애초에 아주 드문 확률로 자연사 할 팔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시마오 역시 다를 바가 없어서 규슈 제국대학을 조기졸업한 1943년 10월에 해군 예비학생을 지원, 뤼순 해군 예비학생 교육부에 입학한다. 1944년 2월에 1기 어뢰정 학생으로 요코스카 해군수뢰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5월에 소위로 임관한다. 1944년이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연합군에게 밀리던 시기, 시마오는 특공병기 ‘신요’로 배치되었다. ‘신요’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터. 신요 또는 신요 보트는 쉽게 이야기해서, 가미카제 비행대의 해상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인용 또는 2인용 보트에 폭탄을 가득 싣고 적의 구축함 같은 대형선박에 직진하는, 자폭 공격단이다. 오키나와 근해에서 실전 투입한 적도 있고,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신요 부대가 주둔했었다 하는데, 워낙 열악한 보트라 전쟁 말기에 일본 해변과 주변 도서에 배치만 했을 뿐 본격적인 전투 무력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한 인격체가 정상적인 전투요원이 아니라 백 퍼센트 사망을 전제로 하는 자살 특공대에 들어가, 틀림없이 가까운 시기에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늘 세뇌를 당한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지금 당장, 아니면 내일 또는 모레에 갑작스럽게 죽게 되더라도 별로 동요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가 된 병사. 드디어 1945년 8월 13일, 시마오에게 특공전 출격 명령이 떨어지고, 이제 죽음의 시행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리틀보이와 팻맨이 버섯 구름을 일으켜 일본은 이미 거덜이 난 상태, 작전은 취소되고, 일본은 조건 없이 항복하고, 시마오는 죽음 바로 앞에까지 갔다가, 다시 삶으로 복귀해야 했다. 가고시마 현, 아마미 군도, 가케로마 섬에 주둔한 시마오 소위는 결국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비자발적 자살과 옥쇄의 명예 대신 섬에 사는 고운 아가씨를 아내로 삼아 도쿄로 이사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시마오의 초기 작품은 죽음을 숙명이라고 생각해야 했던 전쟁 말기의 자살 특공대 경험을 많이 담았다고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죽음 대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남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전후 불안감을 드러내기 위해 초현실주의 소설을 썼단다.

  시마오 도시오의 대표작으로 오늘 독후감을 쓰는 <죽음의 가시>를 든다. 평론가들은 전형적인 일본식 사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글쎄, 자기 나라의 문학에 정통한 일본 평론가들의 주장이 맞기는 하겠지만, 이웃 나라의 한 독자인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로테스크한 상세 묘사가 깊고도 독한 여운을 주는 것 때문인지, 전후 데카당 문학의 하나로 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전후 데카당이라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를 말하지만, 1차 대전엔 그저 명함만 걸어 놓은 일본에서 전후라면 당연히 2차 대전을 들어야 한다. 이 작품은 1960년부터 1977년까지 발표한 열두 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하나의 장편으로 엮은 것으로, 완성에 무려 17년에 걸린 역작이기도 하다.


​  화자 S 도시오는 저 남쪽의 섬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섬처녀 ‘도호’와 결혼해 전쟁이 끝나고 도쿄에 정착,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결혼 10년 차 소설가다. 부업인지 본업인지 하여튼 소설가 말고 한 주에 두 번 야간학교에서 세계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치며 돈을 벌고, 당연히 모자란 소득은 소설이나 수필 같은 것을 잡지와 신문에 기고해 원고료를 받아 충당하며 산다. 무대가 1950년대 중순이니까 그 시절을 생각해보자. ‘나’ S 도시오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인텔리겐챠, 아내 도호는 저 멀고 먼 작은 섬 출신에 가방끈 역시 보잘것없는 촌 여자. ‘나’의 친구들 역시 좋은 교육받은 동료 작가와 잘 나가는 저널리스트. ‘나’는 당연히 이제 비상을 준비하는 작가 초년생으로 여러 문학 집단의 동인이어서 그들과의 “문학적으로 효용이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필요하여 날이면 날마다 형이상학적 논의를 해갔으며, 동아시아의 이런 부류들이 종종 그러했듯, 아내가 아닌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작품에서는 한 마디, 입도 벙긋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 깊은 곳엔 작은 섬 출신의 배운 거 없는 아내를 우습게 아는 마음이 넘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내 도호는 10년간 아이 둘을 낳고, 기르며, 남편 ‘섬기고’, 없는 살림 쪼개 꾸리느라 애면글면 했다가 이제 30대에 접어들어 자아가 생겼을 무렵. 처음엔 의심만 하고 설마, 설마 하다가, 마음 속에 짚이는 바가 있어서 수고비로 거금 5만엔과 함께 흥신소에 의뢰해 남편의 생활을 추적한다. 흥신소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나’와 다른 여자 사이의 온갖 생활을 총천연색으로 브리핑해주고, 결정적으로 집안 청소 도중에 ‘나’의 일기장을 발견해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아내기에 이른다.

  이런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외박을 하고 해가 꼭대기에 떴을 무렵 느긋하게 집에 들어오니, 집은 텅 비어 있고, 서재의 책상과 다다미 바닥과 벽에 잉크가 피처럼 끼얹어져 있었다. 이 한 가운데 너저분하게 내버려진 문제의 일기장. 아내와 두 아이는 멀리 떠나려다 영화관에 가 영화를 반도 보지 않고 그냥 돌아와, 1년이 넘는 지옥 같은 심판의 나날을 시작한다. 아내는 십년 너머 참다가 드디어 폭발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지금 사는 게 아니라고, 죽겠다고, 똑바로 기억하라고, 당신의 내 삶의 전부였다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대가가 이거라고, 신문 성 문답을 시작한다.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으면서. ‘나’는 물론이고 여섯 살 신이치, 네 살 마야를 먹일 밥도 짓지 않는 아내 도호. 집요하게 계속 물고 늘어지는 심문의 결론은 맹세 3장, 여자와 관계를 끊을 것, 절대 자살하지 말 것, 아이들 양육을 책임질 것. ‘나’는 즉각 이를 맹세하고 진심으로 여자와 관계를 끊겠다고 마음먹고, 정말로 끊어버린다.

  아내는 다음 날, 일기를 쓰고 여자한테 편지를 보냈던 만년필, 그리고 여자에게 보여주었을 내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 만년필과 내의를 사온다. 하지만 책상과 벽에 뿌려진 잉크 자국은 어떻게 하나. 몸과 마음을 씻는 의미로 목욕탕에 다녀오니 아내는 결혼할 때 입던 비단으로 지은 기모노를 입고, 얼굴과 입술에 화장을 한 채,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 아껴 두었던 깃털 이불을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나’의 가슴은 철렁 내려 앉는 거였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이제 문제는 이 일로 아내 도호의 정신이 착란 증세를 일으키기 시작한다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착란 또는 발작이 일어나고, 그랬다하면 끈질기게 ‘나’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집착과 연상을 하면서 ‘나’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기 시작해 둘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는데, 시도 때도 없으며, 아이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으며, 아침이거나 새벽 두 세시거나도 가리지 않으며, 전철이거나 버스 안이거나 길거리거나 병원 안이거나도 없다. 결국은 ‘나’가 노끈이나 가죽 허리띠를 목에 두르고 양 손으로 잡아다녀 곧 죽어버리겠다고 힘을 주어 얼굴이 붉게 땡땡 부어오를 때까지 조르고 나서야 아내는 긴 하품을 끝으로 발작 혹은 착란 증세를 멈추는 거였다. 한 번도 아니고 수시로 이런 장면이 등장해 읽어 나가기가 매우 힘들다. 부부싸움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원형경기장의 글래디에이터들의 검투 장면이 차라리 읽고 보기에 나을 정도다.

  이들은 도쿄 동부 변두리 고이와 역 근방에 살다가, ‘나’ 혼자 외출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라 야간 학교로 강의를 갈 때조차 처자식을 다 데리고 가야 했으니, 거의 모든 돈벌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호는 입원을 포함한 신경정신과 치료가 반드시 필요해서, 고이와 집을 팔고 남부 변두리, 거의 농촌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 했는데, 거기서도 사달은 멈추지 않아 결국 아내와 ‘나’는 환자와 간병인으로 입원을 하고, 아이들은 남쪽 멀리 처가 식구네도 보내기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은 스토리보다, 아휴,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내 경우엔 읽으면서 고문당하는 듯한 환장하는 기분 때문에 내가 다 미쳐버리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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