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와 에밀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8
도리스 레싱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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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스 레싱이 여든아홉, 우리 나이로 아흔 살 되던 해에 출간한 작품이다. 여든아홉 살에 책을 내는 일 하나만 가지고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놀랍게도 레싱은 당시 2008년까지도 여전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었다. 지금 보니 별로 읽은 것 같지 않으면서 제법 레싱을 읽은 편이다. 여태 읽은 레싱의 책들을 쭉 둘러봤다. 어느 작가가 그렇지 않겠는가만, 레싱도 자신이 겪었던 일, 그것도 자주 가족과의 관계에서 깊이 주름이 잡힌 기억을 소환해 작품을 쓴 것이 많다. 많고 많다. 이 가운데 데뷔작인 <풀잎은 노래한다>와 <마사 퀘스트>는 레싱 가족, 그러니까 테일러 가족이 페르시아를 떠나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살던 시기를 토대로 여기에 허구, 스토리를 입힌 작품이었다. 이때의 테일러 가족이 겪었던 일을, 맏딸 티그스(아명)의 눈과 기억으로 <앨프리드와 에밀리> 2부에 써놓았다. 시각은 티그스가 도리스 테일러로, 다시 도리스 레싱이 되었다가 이제 여든을 훌쩍 넘긴 만년의 작가의 눈이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짐바브웨를 떠나기 전까지. 기구한 가족들의 이야기.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에 아들이 참전했던 시기를 보낸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았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소한 일도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프랑스 전선의 참호 속에 복무하던 아버지 앨프리드 쿡 테일러는 급성 맹장염에 걸려 맹장이 터지는 바람에 1주일 후에 벌어질 참혹한 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 죽지 않았다. 회복을 하고 다시 진흙탕 참호로 돌아가서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오른 다리에 유탄을 맞아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또 이것 덕분에 벨기에 땅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전이었던 파스샹달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앨프리드의 친한 동료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만다. 앨프리드는 다리 한 쪽과 목숨을 바꾼 셈이다. 명이 길기는 했지만 당사자는 그걸 행운이라 여기지 않은 채 나머지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지독한 당뇨가 와서 신체의 모든 장기가 아주 느린 속도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동안 끔찍한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최후의 순간까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이하 “PTSD”로 씀)로 시달리게 된다. 그의 아들이자 레싱의 동생인 해리 테일러는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침몰할 수 없는 배”라고 불리던 리펄스 호에 탑승해 복무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단 20분 만에 침몰하는 배에서 극적으로 탈출, 상어가 득시글거리는 바다에 빠진다. 배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름을 온 몸에 뒤집어쓰고 둥둥 떠다니는 건 해리 혼자도 아니었고, 살아 있는 사람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몇 시간을 떠 있다 영국 해군에 의하여 구조된 해리는 다시 지중해에 배치 받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하며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청각이 쉴 새 없이 터지는 대포 소리에 거의 망가진 채 귀가했는데, 저 예전의 해리가 아닌, 어딘지 먹먹하고 답답해서 뭔가에 의하여 적어도 한 겹 이상의 커튼 뒤에 있는 듯한 상태였다. 이렇게 사십여 년을 지낸다. 결국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하기 바로 직전에야 누나에게 그게 PTSD 였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지만.

  이런 남편과 아들하고 함께 사는 에밀리는 어땠을까? 매사에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거의 콘서트 피아니스트만큼이나 연주에 일가견이 있던 에밀리는 학교에서도 거의 완벽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도 잘 해서, 당시에는 거의 예외라고 할 수 있었을 경우로, 아버지가 딸에게 대학 진학을 권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냉정한 성격의 의붓어머니와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진 에밀리는 대학은 무슨 대학, 더 이상 의붓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느니 차라리 독립을 하겠다는 각오로, 1902년 8월, 전 유럽이 벨에포크, 가장 화려한 시절, 물론 중산층과 부르주아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지만, 이 시절엔 하녀들, 시민 가운데 가장 하층 시민들이나 하던 직업인 간호사가 되기 위하여 왕립자선병원에 들어가 소위 ‘간호부’가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간호부는 간호원이 되었다가 다시 간호사로 인플레이션 바람을 타긴 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체력과 활달한 성격으로 한 지역의 크리켓 팀에선 서로 스카우트해오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앨프리드. 그러나 전쟁 때문에 한 쪽 다리를 잃고 정신마저 PTSD로 먹먹해진 남자와,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 진취적인 여성 에밀리의 만남은 어떻게 됐든지 간에 하여간 고난으로 채워진 실패의 삶이었다. 적어도 도리스 레싱의 시각과 기억으로는 그랬다.

  이제 세월을 정리하는 단계의 도리스 레싱. 이이는 생각한다. 만일 아버지 앨프리드와 어머니 에밀리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친정의 불행은 세계대전에서 왔으니, 만일 전쟁이 없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리하여 레싱은 이런 전제로 중편 소설을 쓰니, 이 책의 1부 <중편소설 「앨프리드와 에밀리」>다.


​  1902년 8월, 영국의 롱거필드 마을. 얼라이드 에식스 앤드 서퍽 은행의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의 일환으로 은행은 동네에서 제일 넓은 농장을 빌려, 한 쪽에 테이블을 늘어놓고 위에 맛난 음식을 잔뜩 올려 참가자들의 (영국식)폭식 취향을 만족시켰다. 물론 대부분의 영국 시민은 음식이 남아 개나 돼지한테 줄지언정 헐벗은 집시 아이들이 음식에 손을 대는 꼴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넓은 초원에선 크리켓 경기가 펼쳐지고, 당연히 이 경기의 최고 스타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지만 벌써 성인 경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앨프리드 테일러다. 앨프리드한테는 친한 친구, 요즘말로 하자면 여사친 데이지가 있었는데, 오해하지 마시라, 데이지는 그냥 친구, 앨프리드는 오히려 데이지의 어머니 마리 레인 여사를 친어머니처럼 따랐으니. 레인 부인이 원래부터 오지랖도 넓고, 마음 쓰는 것도 곱기가 비단이라 마을의 나이든 축은 물론이거니와 앨프리드 같은 젊은이들도 존경해 마지 않았는데, 데이지가 물심 양면으로 거의 추앙하는 친구 에밀리 역시 진짜 엄마처럼 레인 부인에게 모든 고민거리를 상의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앨프리드한테 에밀리는 친구의 친구 이상이 아니다.

  이날, 에밀리는 레인 부인에게 런던 왕립자선병원으로 떠날 것임을 레인 부인에게 말했고, 레인 부인은 차마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고 싶은 마음에, 거긴 보수도 적고 일은 빡세고, 급식도 형편없으며 까지만 이야기했다. “가장 밑바닥 출신들이나 하는 일이야.”라는 이야기는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에밀리가 레인 부인을 떠날 때, 부인은 속으로 안타까이 외칠 뿐이었다. “아, 안돼. 아, 안돼. 너무 아깝잖아.” 에밀리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해서 이미 아버지로부터 공식적으로 내쫓긴 상태였다. “다시는 내 집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물론 이후에 에밀리의 방은 계속 청결하게, 떠날 때 모습 그대로 몇 십 년간 조금도 변하지 않게 보관하기는 한다. 부모가 다 그렇지 뭐.

  은행원이지만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일에서 해방감을 찾는 아버지를 둔 앨프리드는 수많은 은행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 은행원이지만 그것보다는 크리켓 선수로 활약하다가, 나이 들어 자리를 내준 후에 정식으로 근무를 하면 되니까. 그러나 앨프리드는 천생 농부. 은행원이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앨프리드는 절친 버트 레드웨이의 집에 머물면서 레드웨이 씨를 위해 농장 일, 이 가운데서 특히 목축 일에 전념한다. 버트는 곡식을 재배하는 걸 맡고. 임금을 다른 고용인의 두 배 정도를 받는 것을 보면 능력 또한 탁월했던 모양이다. 레드웨이 씨는 외아들 버트 때문에 고민이 많다. 술이 과해서. 앨프리드는 노상 버트를 따라다니며 그를 관리해주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일 때문이 아니라 우정이 깊어서.


​  도리스 레싱은 두 주인공, 앨프리드와 에밀리를 알아도 너무 잘 안다. 그리하여 이 둘을 적어도 성적으로 만나게 하지 않아야 하리라. 이들이 결혼해서 맏딸 티그스(도리스 자신)과 아들 해리를 낳지 않았다면, 이라는 전제다. (사실 이런 상상은 모든 사람들이 해보는 거 아닌가? 하여간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정여사가 이주사와 맺어지지 않았다면 행복했을까?) 이들은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 어떤 성격을 지닌, 작가가 아닌 다른 소생들을 낳고, 어떤 손길로 아이들을 키울까? 레싱이 나이든 건 사실이다. 이이의 작품을 읽으며 해피엔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명확했다. 내게는. 하지만 나이든 레싱은? 세월이 흘러 이이의 모서리를 어느새 둥글게 마모시켰다. 편안한, 아주 편안한 앨프리드와 에밀리를 볼 수 있으리라. 둘 다 이 정도면 잘 살았다, 라고 감상을 남길 수 있을 정도의. 그래야지. 작가도 늙으면 좀 이렇게 부드러워져야지. 그게 현명한 노인이지. 독자도 레싱을 거의 처음으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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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5-27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우리 부모님 보고 그 생각 많이 했어요. 다른 이와 맺어졌더라면 (나는 없겠지만) 행복했을까?

Falstaff 2023-05-27 09:48   좋아요 1 | URL
그죠, 그죠. 누구나 한 번 상상해보는 거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