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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먼 트릴로지
스테파노 마시니 지음, 조원정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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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마시니는 1975년에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소설가, 극작가, 에세이스트인데,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이 지금 방금 내가 읽기를 끝낸 <리먼 트릴로지>, 즉 <리먼 삼부작>이라고 한다. 마시니는 플로렌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밀라노의 피콜로 극장, 플로렌스의 마치오 뮤지컬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먼 트릴로지>를 발표하고 이게 영국과 브로드웨이에서 대박이 나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은 끝에 미국 브로드웨이 연극상인 토니 최우수 연극상까지 수상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영미 외에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알제리, 멕시코. 페루, 러시아, 그리고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무대에도 올려졌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예술대학 공연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안드레아 파치오토 교수가 희곡 작품집 출간에 정성을 쏟고 있는 출판사 지식을위한지식(지만지)에 출판을 제안해 이를 받아들여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등록 공인 번역사 조원정의 번역으로, ‘현대’ 이탈리아 극작가의 작품으로는 아마도 첫 출판물이라고 한다. 파치오토 교수는 책의 해설과 작가 소개도 썼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 즉 눈에 뜨일 정도를 넘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건 2015년에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할 때 연출을 맡은 연출가 루카 론코니가 쓴 서문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정말 한 번 휘리릭 열어본 적이 있는데, 분명히 희곡, 드라마라고 알고 있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아서, 이거 또 문제작, 읽어내기는커녕 읽어갈수록 뇌가 헝클어지거나 심하면 꼬여버려 최악의 경우에 뇌졸중이 올 정도로 부조리하거나 형이상학적 작품 아닌가 싶어 약간 쫄아 있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한다. 이런 상태에서 진짜로 연출을 한 연출가의 허리상학적 서문을 읽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더욱 야코가 죽게 만드는 일이었다. 요즘 진보적인 희곡/연극은 극작가보다 연출가와 드라마트루기(또는 드라마터지)의 비중이 더욱 중요해지는 거 같은데,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 <리먼 트릴로지> 아니겠나 싶다. 그러니까 희곡을 놓고 이것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 어떤 상징을 차용, 응용 또는 창조할 것인지는 당연히 연출가의 몫이다. 연출가 론코니는 자신의 연출 경향을 매우 지적으로, 독자의 기가 죽을 정도로 현학적인 표현을 구사했다. 그랬을 뿐이다. <리먼 트릴로지>는 2008년 숨이 끊어진 미국 4위의 글로벌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사의 탄생부터 쇠망까지를 조망한 작품으로, 이를 “흑인 노예로 유지되던 앨라배마의 ‘라인의 황금’이 결국 신성을 지닌 경제 지수가 지배하던 월스트리트의 황혼에 도달하기까지”의 바그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구라를 치니, 거 참, 입담 한 번 대단하다.
자, 현대, 근대도 아니고 현대 이탈리아의 극작이라고 나처럼 쫄지 마시라. 작품의 특징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희곡이며, 따라서 분명히 등장인물이 있고 특정 대사를 하긴 하다. 하지만 등장인물을 특정하지 않는다. 즉 누가 이런 대사를 하라는 것도 없고, 특별한 지문도 없다. 무대에 대한 묘사도 당연히 생략하고 오히려 소설과 드라마 사이의 경계가 달군 프라이 팬 위의 버터처럼 스스륵 녹아버렸다. 극작가 스테파노 마시니는, 내가 이탈리아어를 아는 것도 아니고, 원본을 본 것도 아니라, 이게 운문인지 산문인지도 구별이 가지 않는데, 그냥 마치 자유시를 쓰듯이 이야기를 툭툭 할 뿐이다. 한 스토리와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가지고 누구에게 어떤 대사를 시킬 것인지는 전적으로 (드라마터지의 사용여하를 포함해서) 연출가가 결정할 사항이다. 또 모르지, 연출가가 배우들을 다 모아놓고 스터디를 하는 수도 있으니. 그게 더 좋은 거 같기는 하지만 론코니 같이 콧대가 높아 보이는 먹물 연출가 같은 경우에 자만심에 기스 날까봐 그냥 고집대로 할 수도 있고. 정말이다. 자유시 같은 스토리 말고 아무것도 없다. 이러하니 그냥 스토리를 말해야 할밖에.
2008년에 미국에서 터진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이 투자은행의 부채 6,130억 달러가 문제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충격이 크긴 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여 조금 덜 쇼크를 먹었다. 그건 이 사태가 터지기 십년 전에 외환위기를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어서 외화보유에 각별한 신경을 쓴 기업과 정부가 상대적으로 건실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혹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지만 십년 전에 얻어터진 악몽이 너무 커서 뭐 이 정도 쯤이야,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면 당시 내가 잘 나가던 반도체 분야에서 빵을 빌어먹고 있어서 충격 자체를 느끼는 감이 진짜로 별로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미국 내의 부동산, 주로 집값의 거품이 꺼지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해 수많은 미국 중산층 시민이 집도 절도 없이 홈리스나 텐트족으로 대책 없이 추락했으며, 이럴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대규모 정리해고까지 당해 졸지에 극빈층으로 떨어진 실제 장면이 당시 외신을 타고 TV를 통해 시청할 수도 있었다.
스테파노 마시니는 이런 불행의 방아쇠를 당긴 리먼 브라더스의 탄생부터 추적하기 시작한다. 리먼 브라더스는 독일 바이에른의 림파르에서 출발해 뉴욕에 도착한 헤이움 레만 Heium Lehmann과 그의 두 형제 이매뉴얼과 메이어, 이렇게 삼형제가 앨라배마에서 연 작은 포목점에서 시작한다. 19세기 초중반에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미국 세관에서 관원이 부르기 쉽게 이름까지 멋대로 바꾸는 바람에 헤이움 레만은 헨리 리먼 Henry Lehman으로 되고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의 형제관계도 저 야곱의 아들 열두 형제들에서 볼 수 있듯이 개과 동물과 비슷해서 장자, 둘째, 막내 이렇게 차근차근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큰형 헨리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머리, 둘째 이매뉴얼은 실행하는 팔, 막내 메이어는 이 둘을 중재하는 식물인 감자로 비교한다. 왜 감자가 둘을 중재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여튼 막내 메이어가 머리 하나는 팽팽 잘 돌아가서 초기 리먼 브라더스의 이익과 사업 번창을 위해 중요한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 그의 아이디어로 포목점은 농기구와 씨앗 같은 것도 파는 만물상이 되었다가 때마침 닥친 대화재를 기점으로 목화 중개업으로 도약한다. 게다가 메이어가 장가를 잘 들어 당시 미국 남부의 시골 부자집엔 피아노를 연주하는 딸이 하나 이상은 꼭 있던 때인데 하필이면 거의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와 결혼해 아내 덕에 목화를 대규모로 매집하는 놀라운 영업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물산과 돈이 모이는 곳이 뉴욕의 거래소. 장남 헨리는 아깝게 황열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둘째 이매뉴얼이 뉴욕 사무소에서 목화 판매를, 셋째 메이어가 앨라배마에서 목화 수집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합중국 남부에 의하여 분리독립전쟁이 발발해 목화 중개업은 사양길에 접어든다.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틴 형제는 종전 후 메이어가 앨라배마 주지사를 만나 자신이 앨라배마를 다시 복구할 테니 자금을 대라고 배팅하는 데 성공해 드디어 유대인의 혈관 속에 유장하게 흐르는 돈놀이, 좋은 말로 금융업 진출의 기반을 닦는다. 이후 뉴욕에서 형제가 만나고, 리먼 브라더스 은행을 설립해 큰 규모로 번성시킨다. 위에서 말했다. 전통적 삶을 유지하는 유대인 형제 간에는 다툼도 없이. 이들은 나이를 먹고, 동생이 먼저 죽고, 형도 죽어서 가족은행은 2세 필립이 회장을 맡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철도에 투자해 더 큰 돈을 모은 리먼 브라더스는 이후에도 유정油井, 석탄, 철강 등 가리는 것 없이 다양한 투자로 더욱 몸집을 불린다. 세월은 흐르고 1세대에 이어 2세대, 3세대까지 몽땅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드디어 리먼이란 이름을 쓰지 않는 리먼 브라더스의 회장이 자리에 몇 번 더 앉은 다음에 충격적인 리먼 브라더스의 서브모기지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재미는 있지만 공연하는 데 다섯 시간 이상이 걸리는 대작이란다. 그리하여 희곡 한 편이 본문만 무려 574쪽 분량이다. 글 자체가 자유시 같다고 했으니 글자 수로 따지면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니라서 읽는데 부담이 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나 정도는 어림없고 연극이나 극작 공부를 좀 한 탄탄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작품을 선뜻 출판한 지만지 출판사도 대단한다. 번역의 수준은 내가 모르지만, 우리말로 바꾼 번역문 또한 매끄러워 까탈 잡을 일이 없다. 하여튼 이 작품이 현대 이탈리아 희곡 가운데 처음이라니 <리먼 트릴로지>를 시작으로 앞으로 다양한 이탈리아 희곡이 번역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이탈리아 영화는 자주 본 반면 희곡/연극은 거의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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