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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ㅣ 창비시선 367
민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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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갑술생 개띠 시인 민영이 여든 살 때 출간한 시집. 근데 이이가 환갑 넘어 찍은 시집 《유사를 바라보며》 와 별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해가 바뀌었으니 벌써 이 시인이 어느새 망백望百. 정말 세월이 겁난다. 외로울 땐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듯 눈을 감겠다는 <단장斷章>을 외웠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 세기 가까운 시간이 휙, 지나쳐버렸으니, 그런데도 아직 시를 쓰고 있으니 참 무서운 세월이고 무서운 시인이다. 시들은 2007년, 그의 나이 일흔다섯부터 여든까지, 칠십 대 후반의 시작詩作 모음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유사를 바라보며》와 많이 다르지 않다. 저 아득한 유년시대를 보낸 만주 간도의 화룡현, 그곳에서 함께 놀던 동무들, 여자아이들, 아직도 장백산, 즉 백두산 밑으로 유연히 흐르는 해란강변 옆에 잠든 아버지. 그리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인 어머니. 더 어린 시절 까뭇한 기억 속의 고향인 철원까지. 사내 나이 예순이나 여든이나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십 년이 지날 때까지 여전히 병든 아내의 발톱을 깎고, 저 만주 간도에서 함부로 아버지의 따귀를 갈기던 일본 순사에게 분노하고, 그곳에서 늙어갈 동무들의 주름진 얼굴을 상상한다.
그러나 노인의 시를 읽는 일은 다른 의미에서 슬프다. 이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시인이 나이가 들면 주변의 사소한 것에도 다 정령이 깃드나 보다. 저문 강에서 삽을 씻었던 정희성도, 신춘문예 삼관왕의 문학천재 출신 오탁번도, 한 바탕 농무를 추어 창비 시선 1번을 기록한 신경림도, 세월의 부드러움, 시간이 쓰다듬은 일상 구석의 누추하고 가련한 것들, 해 저물면 도로를 굴러다니는 낙엽 속에서도 노래를 찾는가 보다. 이런 시들을 새삼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칠십 대 후반에 쓴 민영의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에서 제일 마음을 끈 것은 본문 속에 든 것이 아니라 시집에 들어가기 전에 읽으라는, <서시序詩>였다. 전문을 소개한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꽃도 철 따라 피지 않으리라
그리고 구름도
嶺 넘어 오지는 않으리라
나 혼자 남으리라
남아서 깊은 산 산새처럼
노래를 부르리라
긴 밤을 새워 편지를 쓰리라
산마루(嶺)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기에 다시는 높은 고개 넘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겠다는 것일까. 앞 연에는 주어가 없다. 누가, 무엇이 오지 않겠다고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시는 독자마다 다 개별적인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다. 나는 그것을 시인, 민영 자신이라고 보고, 영 넘어 있는 것은 피안, 피안의 세계, 이곳인 사바의 반대편에 있는 깨달음의 장소인 죽음의 자리라고 본다. 그곳엔 꽃도 철 따라 피지 않는다는 건, 언제나 피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철, 계절이란 것이 아예 없다는 뜻일 수도 있을 터. 저 피안 너머 있는 구름 조차도 다시는 삶과 죽음의 산마루를 넘지 않는 곳에 시인은 혼자 남겠다는 다음 연. 그곳에서 노래를, 산새처럼 노래를 부르고 긴 긴 편지를 쓰겠단다. 그러니 산마루 너머 있는 것은 피안일 수도 있고 시의 세계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를 시인은 자신의 마지막 시집, 노래책이라고 여긴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달라? 제1의 목차에 둔 시에서 그는 저 오래 전에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어디로 가버린 젊은 것들을 찾고 있다.
이 가을에
가을이 깊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날아온 새들
갈대밭에 내려앉아 지친 몸을 쉬고,
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깃을 여민다.
생각해보아라
얼마나 모진 세월을 살아왔는지,
이제 너에게 남겨진 일은
그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
말없이 떠난 이들을 추념하는 일이다.
아,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
시월 상달에 이 눈부신
서릿발 치는 푸른 날빛 속에서
어디로 가야 만나볼 수 있단 말이냐! (전문)
늙은 시인을 기어이 영탄하게 만든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청년들은? 다 죽었다는 말이다. 진짜 숨을 거두었다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독자의 마음에 맡긴다. 변절도 죽음과 같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한 때는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의 “살아있는 시체들”을 숱하게 보고 있지 아니한가. 그저 시인은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 말없이 떠난, “말없이 떠난 젊은이들”을, 그들 만을 추념할 뿐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살아있는 시체”를 위한 공간은 없다. 늙은 시인에게 주어진 일은 오직 하나, 그들을 추념하는 것이며, 어느새 운동성은 휘발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노쇠, 닳음, 누추한 기억,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추억”이라고 부른다. 노 시인은 그것을 먹고 사는구나.
여든이 가까운 노인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단어는 어머니. 어느 날 밤, 이 어머니가 시인의 꿈에 나왔다.
꿈에 본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사는 이 세상
왜 이렇게 눈부신가요?
새들은 새들끼리
굴참나무 숲에서 지저귀고,
하늘에는 새털구름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어머니 계신 그 세상에도
보리이삭 파랗게 패었습니까?
저 앞 새밋들에
실개천 한 오리 반짝이며 흘러가고,
자운영 핀 밭둑 위에
노랑나비 춤추며 날아갑니다. (전문)
그림 하나 본다. 당연히 풍경화. 들에 한 오리, 2킬로미터는 족히 반짝이면서 흘러가는 실개천의 밭둑엔 자운영이 피어 있고, 자운영이 있으니 노랑나비도 춤을 춘다. 봄이 와서 세상은 이리 눈부신데 어머니 계신 산마루 넘어도 시인이 즐기는 봄 속의 들판 같으냐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늙은 아들의 시. 전형적인 노시인의 시다. 언덕마루에 올랐을까? 아니면 그것도 쉽지 않아 TV 프로 <여섯시 내고향>을 통해 푸릇 보리이삭 팬 들을 보았을까? 아무러면 어떠랴. 시집에 이 비슷한 시들이 많다. 늙은 시인들이 내는 시집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나도 이젠 시인 민영과 작별해야 할 시간인 것 같다. 모두 아홉 권의 시집 가운데 세 권을 읽었고 가지고 있으며 두 편의 시를 외운다. 그러면 됐다. 더 바라 무엇 하겠는가. 민영에게 고맙다. 덕분에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가끔 쓴 소주 한 잔에 안주 삼아 당신의 시를 읊었고 앞으로도 자주는 아니지만 또한 그럴 터이니. 당신도 나 같은 독자가 있는 것을 조금은 위안 삼을 수 있으리라. 잘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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