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 희곡전집 1 이강백 희곡전집 1
이강백 지음 / 평민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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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전주 출생의 극작가. 오랜만에 ‘라떼’ 이야기 좀 하자. 고등학생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읽을 수 있는 희곡은 유치진이 쓴 김유신 이야기든가, 화랑 이야기든가, 하긴 김유신도 화랑 출신이니 둘 다 일 수도 있고 그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문학 장르에서 제일 안 팔리는 종목이 희곡인 것은 똑같아서, 유치진 작품 말고는 한 편도 경험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때와 달라 대입 수능에서 제일 높은 빈도수로 등장하는 극작가가 오늘 읽은 이강백이라고 한다. 내 경우에 이강백을 처음 읽은 건, 이야, 놀랍기도 하지, 지금부터 딱 4년 전인 2018년 10월로 이화여대 김성희 교수가 편 《한국현대명작희곡선집》에 실린 <봄날>을 읽어보았을 뿐이다. 아쉽게도 내용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1980년대 초에 평민사가 이강백과 계약을 맺기를, 그가 그때까지 쓴 희곡 전집을 발간하고, 앞으로 나올 모든 작품 역시 평민사가 출판하기로 했다 한다. 이 책의 서문, 머리글에 작가 스스로 말했다. 저번에 한 번 얘기 했다시피, 우리나라에 유독 희곡 장르의 기록이 많이 유실된 이유가, 희곡을 쓰고, 공연을 하면, 연극이 성공을 하건 말건 하여튼 이후에는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야 보존이 될 터이지만, 길고 긴 세월 동안 희곡-연극 장르의 예술행위의 가장 큰 고객은 인구 대비 지극히 적은 수를 차지했던 “여대생”이었던 관계로 도무지 독자가 없어서, 출판사도 이윤을 내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대원칙을 지키기 위해 돈 안 되는 희곡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1971년에 등단한 이강백은 1982년, 등단 11년 만에, 서른다섯이라는 별로 많지 않은 나이에 이런 통 큰 계약을 당했으니 모르긴 해도 한 삼박사일 동안 쐬주 깨나 마셨을 거 같다. 이런 횡재를 얻어걸린 이강백은 당연히 이후에도 줄기차게 작품활동을 이어 나가, 숱한 대표작을 양산해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작가의 자리를 꿰차고, 직장에서도 같은 건물, 같은 층에서 근무하던 시인 김혜순과 가약을 맺는다. 나도 처음 알았다. 이강백과 김혜순? 슬픔치약과 거울크림?

  네이버를 통해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서 이강백을 검색해보면, “등단이래 1970년대의 억압적인 정치∙사회 상황 하에서 제도적인 폭압 체계를 상징적으로 풀어내는 데 성공한 작가로 평가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꼽은 것(들)은, 그러니까 70년대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라는 얘긴데, <셋>, <알>, 그리고 <파수꾼>이다. 전집 1은 이강백의 1971년부터 74년까지 쓴 작품 여섯 편이 들어 있고, ‘폭압 체계를 상징적으로 풀어낸’ 대표작 세 편이 모두 실려 있다. 하지만 이강백 본인은 ‘지은이의 머리글’에서 분명하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적인 상황과 연극의 관계에 대해서 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다만 나는, 우화적인 희곡을 쓰는 극작가로서 정치적인 상황이 우화적 희곡의 좋은 소재가 된다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한 소재는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은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는, 희곡전집의 초판이 나온 1982년 역시 1970년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살벌한 깡패에 의하여 독재정치가 저질러지고 있던 형국이라 새롭게 책을 펴내면서 자신이 70년대에 쓴 작품이 진짜로 유신독재를 우화적으로 비틀어버린 거라고 고백했다가는 남영동 분실 욕조의 물 맛을 볼 수도 있다고 겁을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번째는, 원래 비평가, 평론가라는 직업이 전문적으로 해몽을 하는 것이라 직접 꿈을 꾼 (극작품을 쓴) 사람의 진짜 의도는 정치와 상관없이 그냥 그걸 소재 가운데 하나로 삼아 우화적 실험을 한 것뿐인데 그게 우연히, 또는 당시의 시대상과 어울려 유독 현 정치 환경을 빗대 평론하기를 좋아하는 유명 평론가들이 자기 멋대로 평가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시어미 죽으면 시어미 죽은 슬픔보다 자기 속에 맺힌 것 때문에 앙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며느리처럼.

  직접 이강백의 작품을 읽어보면, 이 무학, 한 번도 졸업이라는 걸 해보지 못해 가방끈이 짧다 못해 아예 없는 대학교수이자 살아있는 극작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이의 초기 작품은, 특히 1974년 작품 <파수꾼>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 하겠다는 유신 치하에서 숱하게, 이 단어를 발음할 때 느낄 수 있는 ‘숱하다’의 어감보다 73배 더한 빈도의 ‘숱하다’로, 눈만 뜨면 신문, 방송, 교장 훈시 등을 통해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 테제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단 한 명의 파수꾼만이 광야에 홀로 선 파수대에 올라 이리떼의 습격을 관찰해 경보를 울리고, 이때마다 주민들은 민방위 훈련처럼 지하실로, 대피소로 피해야 하는 일상의 연속. 만일 이것을 우화라고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페리 인데스 210번의 이솝 우화 <양치기 소년>을 떠올리겠지만, 육영수가 문세광의 저격을 방어하느라 경호실 요원이 쏜 총에 맞아, 불행하게도, 죽기 바로 며칠 전인 『현대문학』 1974년 8월호에 발표했을 당시엔 머리글에서 극작가가 직접 밝힌 우화 운운하고 관계 없이 틀림없는 세대 풍자로 읽힌다. 그러니까 결론은 평론가의 말이 진실과 근접하고, 이강백은 서슬퍼런 전두환 깡패 시절에 솔직한 말을 하기엔 너무 쫄았었다는 거다.


  이강백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다섯>이 당선이 되어 등단한다. 그러나 본인도 그렇고 평론가들도 그렇고 데뷔작인 <다섯>을 언급하는 데는 굉장히 인색하다. 이 극작가는 어려서 지금은 거의 없어진 질병인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에 장애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학의 학력을 지녔다. 외골수 청년으로 성장한 이강백은 자신의 말에 따르면 신춘문예에 당선하는 스물네 살 때까지 다락방이나 지하실 방에서 혼자만의 폐쇄적인 생활을 하며 시, 소설, 희곡 같은 것을, 특정한 장르에 목표를 두지 않은 상태로 죽어라 습작에 몰두하고 있었단다. 그리하여 희곡전집 1에 실린 여섯 작품 가운데 네 다섯 작품은 닫힌 세계, “홀로 있었다는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이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의 환경과 관계없이 추구할 수 있는 조금의 간극이 생겼지만 이이가 이십대를 시작한 60년대 중후반에 무학의 장애인으로 할 수 있는 건 창작이 거의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넘쳐나는 자의식을 원고지에 담다가 극작가로 데뷔를 하고, 언감생심 연출가로부터 자기 작품을 공연하고 싶다는 편지까지 받았으니 기분이 어땠을까?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작품은 전부 정치적이다. 또는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엄혹한 유신체제에서 이런 극작품을 생산하고 발표하고, 공연까지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우화의 탈을 써야 했다. 우화도 우화 나름이지 김지하처럼 <오적> 비슷한 신랄한 풍자는 흉내도 내지 않는 것이 만수무강까지도 아니고 그저 심신안정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으니, 이강백 정도의 우화 또는 우화의 차용도 사실 대단한 깡다구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었다.

  재미있는 작품들이다. 물론 나 역시 데뷔작인 <다섯>을 제외하고 말하는 중이다. <다섯>은 이강백의 전매특허라는 우화, 알고리즘이라기보다 프랑스 희곡에서 자주 써먹은 부조리극을, 억지로 배에 태워 신탐라국으로 데려온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들의 조국을 떠나 신탐라국으로 밀항하느라 배의 밑창에 숨은 다섯 명의 밀항자들 이야기다. 읽어보시면 좋을 듯한데, 우리나라 희곡 잘 안 읽는 거 안다. 알고도 무턱대고 읽어보라 권할 수도 없는 일. 에잇, 알아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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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0-25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강백 평민사 전집 1,2권이 있고 이 중에서 파수꾼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작품도 읽었는데 그건 전집 몇권에 수록된지 모르지만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이강백 컹렉션에 들어갔눈데...읽음 건 거의 없지만 작품이 좋은 건 분명히 알겠더이다. 다른 책들 읽느라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빠른 시일 내에 일독해야겠습니다.
타타르인의 사막 읽고 지금 나는고백한다 읽고 있는데...그 다음에 우선적으로 읽어좌야겠슴돠!

Falstaff 2022-10-25 13:58   좋아요 0 | URL
저도 예상 외로 이강백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데뷔작이 좀 답답했지만 곧바로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아, 지금 고백 읽으시는군요! 그것도 진짜 진짜 재미나던데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