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의 정원 대산세계문학총서 125
바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진巴金. 쓰촨 성 청두 출신으로 루쉰魯迅, 라오서老舍와 더불어 중국 근대문학의 문호라고 일컫는다 하는 작가. 쓰촨四川 성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일찍이 중국의 시선, 다른 건 모르겠고 시 쓰는 거 하고 술 마시는 거 가지고 신선의 반열에 오른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흰고양이–검은고양이 론을 들고나와 대나무 장막으로 불린 중국의 개방을 선도하고, 죽은 다음에 화장을 해 대만 해협에 골분을 뿌려 통일 중국의 꿈을 기린 키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을 배출한 지역이다. 이 사람들은 태생이 쓰촨 성이다. 비록 출신은 다른 곳이지만 쓰촨 성, 특히 성도省都인 청두成都에서 천하 패업의 꿈을 이룰 기틀을 마련했지만 결국 한 여름 밤의 몽정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린 인물로는 유비, 제갈량, 장비, 황충, 조운, 마초 등 촉한의 영웅들이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에게 쓰촨, 하면 역시 사천 탕수육, 사천 짜장 등으로 대표하는 저렴하고 매운 중국식 먹거리일 듯.

  바진은 1904년에 봉건 관료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20세기 만을 살다 갈 것으로 추측했지만, 천만의 말씀. 신해혁명으로 인한 청 제국의 몰락, 5.4 운동, 중일전쟁, 국공합작과 내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문화혁명, 죽의 장막, 개방을 모두 거치고 대망의 21세기를 맞아 백세가 넘은 2005년에야 천국의 즐거움을 맛보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 스무 살 때 베이징 대학에 지원했지만 폐병 진단을 받아 입학 시험도 치루지 못하고 요양생활을 하게 되면서 무정부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그래도 원래 있는 집 아들이라 2년 후인 23세 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이때부터 바진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휴식의 정원>에 등장하는 중요한 조연 야오궈둥이 청두 출신 해외유학파로 대학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하고 2년간 공직에 근무하다 조기 퇴직한 30대 부르주아인 것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게, 원래 다 해봐야 제대로 쓸 수 있는 거거든.

  책의 앞날개를 보면 이이의 본명이 리페이간(李芾甘)이라 나온다. 반면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중국시사문화사전엔 리야오탕(李堯棠)이라 실려 있어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데, ‘페이간’은 옛 시절 사람들이 흔하게 쓰던 소위 자字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고산, 율곡, 추사, 백범, 미당 등의 호號를 사용했듯이 중국에선 의례 자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 <휴식의 정원>은 1944년, 샤오산과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나이 마흔에 발표한 것으로 장편소설은 1946년을 끝으로 더 이상 쓰지 않았으니, 이걸 후기 작품이라 하기에는 백 살이 넘어까지 산 사람한테 우습기도 한데, 그럼 뭐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이 상수이리라. 제목 “휴식의 정원”의 원제는”게원憩園”이다. 여기서 한자어 게憩는 ‘쉴 게’, “휴게실” 할 때의 게 자. 책의 ‘일러두기’에 쓰여 있기를 “이 책은 巴金의 憩園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憩를 ‘정’으로도 발음을 하는지, ‘정’으로 발음한다면 그 때는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마터면 미칠 뻔했다. 역시 문자는 우리나라 문자가 세계 제일이다.

  하여간 중국 사람들 내력 찾으면 복잡하기가 짝이 없다. 이 사람의 무정부주의 등 할 얘기 더 있는데 하고 싶은 말 다 하면 책 얘기는 언제 하나. 그만 하자.


  소설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리고 대단히 작위적이다.

  화자 ‘나’는 대학을 겨우 반 년 다니다가 학비를 대주던 숙부가 죽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해 그간 여섯 권의 (‘크게’라고 말할 정도로는)주목받지 못한 작품을 발표한 30대 중후반의 작가. 여태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여차저차하여 16년 만에 대후방이라 불리는 고향 청두에 들러 이름만 비까번쩍한 싸구려 ‘국제호텔’의 어둡고 좁은 방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오전에 소설을 쓰고 오후엔 청두 시내를 산보하는 루틴을 지니고 있는데 며칠 되지 않아 시내에서 소학교, 중등학교, 대학교 동창을 만난다. 이이가 바로 저 위에서 소개한 바 있는 야오궈둥, 유학파, 대학교수 3년, 공직 2년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로부터 거액과 7~8백 무畝의 논마지기를 유증 받아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다 때려치우고는 스스로 얼리 리타이어를 이룬 룸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다. 1무가 30평이니 750무 잡고, 22,500평. 대강 110 마지기. 게다가 땅 한 평 팔지 않고도 청두 시내의 큰 정원이 딸린 저택을 한날 한시에 딱 현금을 주고 샀을 정도로, 은행 금고 아래에 깔린 돈이 위에 쌓인 돈에 눌려 숨을 못 쉴 정도이다.

  야오궈둥. 중국에선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같은 이들 중에서 친한 사람에게 앞에 늙을 로老(라오) 자를 쓴다. 그래 앞으로는 야오궈둥을 ‘라오야오’라고 칭한다. 이 라오야오가 ‘나’를 보고는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당장 ‘나’를 자기 집, 비까번쩍하기 이를 데 없는 저택의 아랫사랑으로 들이고는 쓰고 있는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머물게 한다. 라오야오는 청두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인 자오(趙) 씨 집안의 외동딸한테 장가를 들어 아들 (아명)샤오후(小虎)를 두었지만 아내가 일찍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래 자기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젊은 아내를 새로 얻어 둘이 지극히 사랑하며 살림을 꾸미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다 좋을 수 있나. 자오 집안의 안주인인 샤오후의 늙은 외할머니는 움딸이자 샤오후의 새엄마 완자오화(萬昭華)를 미워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줄창 어린 샤오후를 끼고 있으려 해서 학교도 나날이 결석이고 가끔 가더라도 땡땡이가 다반사였다. 그것도 그럴 수 있다 싶은데 문제는 외사촌들과 어울려 하는 짓이라고는 개망나니 짓에 어린 놈이 노름이고, 온갖 투정을 다 받아주어 아이가 갈수록 망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 읽기로 세상의 위안을 삼고 있던 어린 아내 완자오화 앞에 이이가 좋게 생각하던 소설가 ‘나’가 등장했으니 야릇한 관계가 몽실몽실 피어날 수도 있으리라, 하고 김칫국 마셨다면 아서라, 얼른 꿈에서 깨는 게 좋다.

  왜 책의 제목이 <휴식의 정원>이냐 하면, 친구따라 들어간 친구의 저택 대문 상부 문틀에 큰 글씨로 “게원憩園”이라 쓰여 있고, 이 정원이 실로 크고 아름다워 가벼운 산책이 가능할 정도이며 작품이 끝날 때까지 중요한 관계를 맺을 청년 양(楊)도령과 친분을 맺기 때문이다. 양도령은 저택을 판 집안의 셋째 아들이 낳은 둘째 아들이다. 복잡할 거 없다. 대가족이 살다가 할아버지가 죽자 네 형제네가 집을 팔아 재산을 나누고 분가한 것이니. 당시 셋째 아들만 죽자고 집을 파는 걸 반대했지만 하여튼 그렇게 됐다. 이 셋째 나리의 둘째 아들이 저택의 정원에 들어와 동백꽃을 꺾어 가지고 가려는 장면에서 ‘나’와 관계가 시작되고, 양도령과 양도령의 아버지, 룸펜 부르주아로 하는 일이라고는 노름과 여색밖에 없던 한량으로 말년이 고단하게 된 양도령 집안의 내력을 알아가게 된다.

  눈치 채셨나? 라오야오의 외아들 샤오후가 나이를 먹는다면 혹시 모른다. 라오야오의 기대대로 성장하면서 심성이 저절로 곧아져 바른생활 사나이로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약 59배의 확률로 양씨 댁네 셋째 나리처럼 파락호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작품은 이렇게 두 가족, 선량한 심성을 가진 어린 아내 완자오화와 파락호 예비소년 샤오후를 둔 라오야오 가족, 헌신적인 효자 양도령과 파락호 출신이며 바야흐로 본격적인 말년 불행을 맞이하고 있는 셋째 나리를 둔 양씨 가족을 대비시키면서 1940년대 중국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양념처럼 마음씨 좋고 아름답기까지 한 완자오화의 대사를 통해 소설이 사회와 독자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더 노골적인 대사도 나오지만 그래도 조금 비유적인 완자오화의 말을 인용해보자.


  “세상사가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고,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소설가는 세상을 좀더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잖아요. 눈물 흘리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모든 이가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요.”


  ‘나’는 부르주아나 영웅들의 삶 대신 천민 프롤레타리아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주로 그들의 처참한 죽음이란 비극으로 결말짓는 소설가이지만, 라오야오와 양씨 가족, 거기다가 완자오화의 영향을 받아 결말을 바꾼다는데, 흠,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웃펐다. 아무리 작가라도 자기가 쓰는 작품의 주인공을 자기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이 작품에서? 알려드릴까? 따뜻해서 뭉클한 결말도 있고 역시 별로 개연성 없는 (그래서 작위적인) 처참한 죽음의 결말도 있다. 진짜다. 결말이 두 개다.

  하여튼 내가 읽기로는 야오가문과 양씨 가문의 절묘한 대비와 자기가 쓰고 있는 소설의 결말을 짓는 것 등, 처음부터 끝까지 현대중국의 문호 바진의 (작위적) 작품 구성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몰라도, 촌스러웠다. 다만 내용도 없고 아는 것도 없이 주둥이만 발랑 까진 독자의 감상이니 선택은 알아서 하시라. 단, 이건 분명히 하자. 난 일독을 권하지 않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2-07-05 0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내용 보다도 작가와 작가 출생지 등에 얽힌 다른 얘기가 더 재밌습니다.😁

Falstaff 2022-07-05 16:31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저 위 명단에 관우가 빠졌습니다. 그이는 형주를 지키기 위해 한 번도 청두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육손, 여몽의 꾀에 빠져 죽고 말았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