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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알라딘 리커버 한정판) ㅣ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1986년 경기도 성남생. 서울여대 중문과 졸,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박사 과정 수료. 스물일곱 살 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하면서 데뷔. 서른 살이던 2015년에 낸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로 다음 해 신동엽 문학상을 받으면서 서른, 잔치를 시작했다. 슬픔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쁨 역시 혼자 오지 않는 법이라 지금은 30대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내 극작과의 서사창작 전공과정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끔 이런 대박도 있다.
이이가 신동엽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지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처음 읽는 시집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라고 하는 백 쪽 내외의 아주 얇은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을 포함해 세 권의 시집을 상재했고, 이 시집이 현재까지는 마지막, 세번째 것이다. 요새 시인들의 경향 또는 유행에 맞춰 잘 팔리는 에세이 집을 시집보다 조금 많은 권 수로 시장에 내놓고 있는데, 하여간 나는 시인이 쓴 에세이 집에 취미가 없어서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읽을 일은 없을 거 같다.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 관련 교육기관인 한예종에서 후학에게 시를 가르치는 30대 시인이니, 이이는 다른 시인들만큼, 아니다, 다른 시인들보다 훨씬 더 자주, 그리고 깊게, 과연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서 시인이 탐색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 가운데 역시 시와 시인의 노래를 사색하는 작품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오늘 독후감은 이 주제에 관해 집중해보려 한다.
시집의 2부, 77쪽에 <시>라는 제목을 단 시가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너는 참 하얗구나
너는 참 둥글구나
내게 없는 부분만 크게 보면서
흰 접시 위에 자꾸만 무언가를 올린다
완두콩의 연두
딸기의 붉음
갓 구운 빵의 완벽과 무구를
그렇게 흰 접시를 잊는다 도망친다 (후략)
이 시에서 안희연이 말하고 싶었던 건 사실 1연에서 끝났다고 봐도 좋겠다.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테두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거. 이게 안희연이 생각하는 자신의 시쓰기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어서 맨 처음으로 고백을 하고 싶지만 고백할 마음을 먹는 데만 하루 이틀 사흘이 가고, 뒤돌아 서서 말을 할지 마주보고 말을 할지 고민하는 데만 또 일주일 이주일이 걸렸다는 송창식의 노래 가사하고 비슷? 아, 그건 아닌 거 같다. 접시에 대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있으나 그게 뭔지 몰라서 완두, 딸기, 갓 구운 빵을 올려보고 별 짓을 하건만 결국 테두리만 한 번 만져보고 이내 접시를 잊고 후딱 도망쳐버린 흔적, 그게 자기가 쓴 시라는 얘기. 그런데 이런 시도, 아무리 자신이 서른 살에 큰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라고 해도 쓰고 싶으면 아무 때나 후딱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독 시가 쓰고 싶은 날이 있다. 그 날을 <영혼 없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딘들
어디에나
어디서도
그런 말들을 조약돌처럼 가지고 노는 하루가 있다
영혼 없이
시를 쓰고 싶은 날 (후략)
뮤즈가 깃들지 않으면 시는 쓸 수 없다고, 저 옛날의 사포 같았으면 그렇게 얘기했겠지만 이제 시인은 땅에 두 발을 딛고 텅 빈 하늘에 대고 자기의 노래를 부른다. 시인의 희망은;
그가 걸어오네
양손 가득 풍선을 들고
“저기 풍선 장수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앞다투어 몰려들지만
그가 풍선을 파는 법은 없네
“이 황금과 맞바꿉시다”
“원한다면 내 집이라도 내어드리리다”
그의 풍선은 너무 아름다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그는 오직 노래만 한다네
텅 빈 하늘을 향해
죽음의 천사여 나는 당신이
이 땅에서 거두어가지 못한 것을
쥐고 있다네 (<풍선 장수의 노래> 부분. 후략)
그런데 이 시보다 더 기능적 의미로 시인에 관한 것이 있으니, 이번에도 장수는 장순데, 생선 장수다. 안희연은 <생선 장수의 노래>에서 시 쓰는 작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손을 거쳐간 펄떡임을 기억합니다
먼바다의 이야기를 싣고
뜬눈으로 도착한 손님들
이제 나는 아무 동요 없이 그들의 목을 내려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를 발골의 귀재라 부릅니다
움푹 팬 도마나 휘어진 칼을 자랑처럼 내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피 묻은 장화를 보려 하는 이는 없어요
내가 더이상 누구의 눈도 들여다보지 않는 것처럼
한때는 수천의 심장을 따로 모아 기도를 올린 적도 있지요
다음 생엔 부디 너 자신으로 태어나지 말아라
내가 주는 것이 안식이라는 믿음
시간은 무자비하게 나를 단련시켰고
어쩌면 자비였을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영혼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후략)
내 손을 거쳐간 펄떡임이라고 했으니 생선 장수도 보통 생선 장수가 아니고 펄펄 뛰는 살아있는 것을 그대로 토막내 팔던 노련한 생선 장수다. 지금에 도달하기 위해 서른 댓 살 남짓의 생선장수는 도마가 움푹 파이고 칼이 닳아 휘어질 정도로 난도질을 했다는 은근한 내세움. 그리하여 독자, 즉 생선 사 가는 아저씨, 아줌마들은 자기 칼질이 어떤지만 보지말고 피 묻은 장화도 좀 봐주었으면 하는 희망사항까지 슬쩍 흘려놨다. 자신이 쓰는 시의 대상물을 향해 다음 생엔 자신으로 태어나지 말라고, 즉, 자신을 시화詩化하는 시인을 추호도 원망하지 말라는, 마치 중원의 고수 같이 선언하기도 한다. 자신의 칼질이 어쩌면 자비였을 수도 있으니까. 좋다. 시인이 이만한 기개도 없으면 되겠는가 말이지.
이것 말고도, “할아버지께서 노래를 찾아오라고 하셨다”로 시작하는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등 여러 편이 있지만 이런 시 한 번 읽어보십사, 하면서 독후감을 마친다.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죽은
밟힌
눈만 그리면 완성될 그림을
수천장 가지고 있는 사람
서랍을 열면 황금빛 새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고
모두가 새의 황금빛을 이야기할 때
죽은 듯이라는 말을 생각하느라 하루를 다 쓰는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이 많다
창밖이 너무 환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너머의 너머를 바라보느라 진흙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사람
씨앗이라고 생각했다면 영원히 캄캄한
비밀이라고 믿어왔다면 등 뒤에서 나타나 당신을 할퀴는
소란스러운 기억이 얼굴을 만든다
파묻힌 발을 쓰다듬으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착을 모르는 시계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이야기 이야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