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서울연극제 희곡집
홍지현 외 지음 / 서울연극협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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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를 인용하면 2019 서울연극제에는 모두 열 작품을 공연했다. 이 가운데 저작권 문제가 걸리지 않은 네 편의 희곡을 담은 책이다. 열 편 가운데 네 편만 싣고 이 책에 《2019 서울연극제 희곡집》이란 제목을 부여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엣다 모르겠다. 그거야 뭐 연극제를 주최하는 서울연극협회 마음이니 시비는 안 하겠다. 이 책에 실리지 않은 희곡 가운데 눈에 익은 것이 하나 있다. 라오서가 쓴 <낙타 샹즈>. 이 작품을 말하는지, 아니면 라오서의 작품을 중원능이 경극의 대본으로 각색한 <낙타 상자>를 일컫는지는 모르겠지만 <낙타 상자>를 2019년 서울연극제에서 공연했던 모양이다. 내가 읽은 책은 “연극과 인간”에서 출간한 중국전통희곡총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 중원능의 각색 작품이었다.

  <어떤 접경지역에서는>, <댓글부대>, <공주(孔主)들>, 그리고 <중첩(重疊)> 네 희곡 작품을 실었다. 여기서 “희곡” 작품이라고 다시 밝힌 이유는 이제 시절이 변해서 희곡에 쓰인 대로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 얘기했다시피, 희곡과 무대 사이에 드라마터지가 있어, 실제로 공연을 할 수 있게 희곡을 변화시켜준다. 그래 “책머리에”에서도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심사를 통해 선정된 것으로 공연 대본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니 참고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극작가 가운데 홍지현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1988년생인데, 2007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 본격적인 극작가로 이름을 올린 이다.


홍지현 (2007. 출처: 동아일보)

  

  홍지현이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은 시점이 2006년 12월 22일. 만 18세이며, 성균관대학 약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비록 학사경고를 받아 입학할 때부터 받기로 했던 4년 풀 장학금마저 놓칠 수밖에 없는 신세이긴 했지만.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를 보면 2007년부터 전공과목도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정을 했다는데, 지금 약사로 일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2017년에 한국예술아카데미 연구생 선발 명단의 연극-극작 부분에도 홍지현의 이름이 올라 있는데, 같은 사람일 확률은 매우 높으나 그렇다고 단정하지는 못하겠다. 데뷔한지 10년 만인 2017년에 홍지현은 <물고기도 고통을 느끼는가>라는 작품으로 “차세대 열전 2017”의 대열에 합류하는 등 연극계에선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왜 홍지현만 콕 집어서 소개를 했느냐 하면, 이이의 작품 <어떤 접경지대에서는>이 유일하게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시간적 공간은 한반도가 막 통일이 된 때, 아니, 현재 공간에서 한반도가 막 통일이 됐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어떤 접경지대’는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마을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시대가 현대이지만 휴전 상태에서 휴전선 부근이었으니 아무런 생산 시설 없이 오직 재래식 농업에 의존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도 과거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두레나 계, 이런 것과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비슷한 추렴 같은 의식이 강해 집마다 큰 비밀 없이 살고 있었다.

  막 통일이 됐으니, 국경은 당연히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올라가야 하고, 부대가 주둔했던 자리는 그동안 생산활동이 전무해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주민들을 위해 새로운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즉 지주-소작 계급으로 나뉘어 반 정도 봉건적인 농업 생활에 자본주의가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향유할 수 있는 이익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에 따라 동네의 모든 공동 사업은 “민주주의적” 다수결로 결의를 통해 결정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뿔뿔이 분열하기 시작한다. 이 정도만 소개해도 어떤 작품인지 충분히 아실 수 있을 듯.


  마지막으로 실은 작품은 이우천의 <중첩重疊>이다. 이 희곡은 절대로 희곡대로 극을 만들 수 없어서 반드시 드라마터지의 손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86세대의 남자가 대학시절에는 시위와 관련해 경찰서 정보과에 붙잡혀 갔다가 핵심 선배가 숨어 있는 곳을 불라는 형사의 노회한 심문에 휘말려, 선배가 남자의 애인과 깊은 사이라고 그럴 듯한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한 대 얻어터지지도 않고 선배의 소재지를 알려준다. 체포된 선배는 고문 받다가 죽고 애인은 학교 때려치우고 절에 들어가 비구가 되고, 남자는 선배가 체포된 지 3일만에 석방되어 그 길로 해병대에 강제 입영 당한다. 연평도에 배치되어 함정에 올라 경계근무를 서던 도중 타고 있던 배가 NLL을 침범해 북한 군대와 총격이 오가자 씩씩하게 대치하는 전라도 상병, 경상도 일병과 달리 고개를 푹 수그리고 하늘에다 대고 총질을 해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 달리 한계선을 넘는 행위는 언제나 대한민국 해병대의 함정이고, 북한군은 경고 후에 사격하는 신사적 행위만 한다.

  제대하고,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아내를 만나 아들 낳고 살다가 덜컥, 바람이 나서 아내 아닌 여자를 사랑하게 됐는데, 여자는 아내를 질투해 둘이 만나, 아름답지 못한 광경을 연출한다. 남자는 거의 대부분 찌질한 수컷이 하는 그대로 아내를 타박하고, 여자도 떠나버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들이 일찍 죽고, 아들을 태우는 화장터에 아빠만 가서 골분을 동산에 뿌린 다음 집이라고 돌아오니까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아내가 욕실에 목을 대롱대롱 매달고 혀를 빼문 채 죽어 있었다. 아내까지 장사를 지내고 다시 출근해 일상을 시작하려는 아침,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운전중인 남자에게 무지막지하게 울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진 남자는 동해를 향해 과속으로 달리다가 차가 전복되어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데, 기억과 상상의 공간이 수없이 중첩되어 드디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로 접어들게 된다.

  나는 86 세대의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읽고 난 다음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세번째 작품은 극단 신세계의 공동작업, <공주(孔主)들>이다. 한자어를 잘 보시라. 구멍 공孔에 주인 주主, 해서 “구멍의 주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 구멍은 여자의 몸에 있는 세 개의 구멍, 윗구멍, 아랫구멍, 뒷구멍을 말한다. 1943년의 정신대 여성부터 2018년 룸살롱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매춘의 역사가 나열되어 있다. 정신대 - 한국전쟁 중 남쪽 군인(물론 북쪽 군인은 아니다!)에게 성적 봉사를 해야 했던 여성들 - 전쟁 후 양공주 - 산업 발전 시기의 일본인 현지처 - 2000년대 룸살롱 접대여성까지. 결론은 성매매 여성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건데, 당연히 여성주의적 주장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결론 부근에 가면 2018년에 스물아홉 살의 연극배우는 이렇게 발언한다.

  “전 잘 살고 싶습니다. 시집 잘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뻐지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예쁘고, 매력적이고, 자고 싶은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다시 순결해지고 싶습니다. 그래야 진짜 공주니까. 언제까지나 공주이고 싶습니다.”


  이은진과 백두산이 만든 <댓글부대>가 두번째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창작 또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진보나 좌파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이게 분명히 2019년에 있었던 서울연극제에서 공연한 작품의 원본 희곡이다. 2019년이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만 2년 이상이 지난 시점이다. 이은진과 백두산은 과거 이명박 정부 당시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을 위하여 국가정보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가 주도한 여론 조작 사건을 빗대 희곡을 썼다.

  내가 의아했던 건, 이은진과 백두산이 진짜 좌파 혹은 진보주의자인가 하는 점이다. 좌파는 모르겠고, 진정한 진보는 현상에 언제나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2019년이면 세상에 드루킹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이미 국회에서도 관련법을 제정했던 시기였음에도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있었던 국가 기관에 의한 여론조작을 극으로 만든 건 어떤 의도였을까. 희곡을 쓴 이와 백이 진보라면, 총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 거다. 현재의 권력을 견제하고 지양하지 못하는 진보라는 것도 있나? 진보주의자한테 네 편, 내 편은 없다. 최종적인 합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현상의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을 진보주의자라고 부른다.

  이 희곡은 읽으면서 어이가 없다가, 하품만 났다가, 세상이 참 큰일이구나, 했다가, 혹시 이 사람들이 지나간 (만일 이 단어가 맞다면)촛불혁명을 최후의 혁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했다. 혁명은,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싹이 움트고 있는 중이다. 며칠 후 누가 집권을 하든지 간에. 혁명은 특정 진영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




 * 이 독후감은 월요일, 3월 7일 업로드 하려고 했지만, 대선 투표 2일 전이라 정치적 발언을 조금이라도 삼가하기 위하여 선거 끝나기를 기다려 3월 10일에 올릴 예정이다. 단지 정치적 입장 혹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고, 혐오하고, 심지어 특정인의 부고를 기다린다는 등의 저주가 난무했던, 코미디도 끝났을 것이다.

 이 사족은 투표하러 가기 바로 직전에 쓰는 글이라 누가 당선될 지 모른다. 어느 후보가 당선을 하든지 이제 미움과 반목과 저주의 난장판은 끝났으면 좋겠다. 지금 투표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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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my 2022-03-11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진보와 혁명에 대한 이야기,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Falstaff 2022-03-11 11:52   좋아요 0 | URL
아이고, 부끄럽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한 거 같아서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