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78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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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행숙의 시는 처음 읽었다. 70년생으로 99년, 서른 살에 현대문학으로 데뷔하여, 2003년에 낸 첫번째 시집 《사춘기》. 첫번째 시집의 제일 앞에 실린 시 <조각공원>의 첫 행은 이렇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 부리를 넣었다 뺐다 넣었다를 시계추같이 반복한다. 그의 발가락 옆에서 「무제 II」라는 그의 이름을 보았다.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 이 문장 바로 다음 다시 “그의 발가락 옆에는….” 이라니까 여기서 “그”는 한 마리의 비둘기이고, 비둘기 옆에 「무제 II」란 태그가 놓여 있었으니 이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조각임에 틀림없다. 제목이 <조각공원>이니까. 그럼 다음 문장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추가서술에도 불구하고, 김행숙의 시는 다분히 회화성이 중요한 서술방식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두번째로 실린 <삼십세>의 첫번째 연을 보자.


  “네겐 햇빛이 필요하단다. 여자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했다. 햇빛은 어디 있지요? 난 뭔가 만지고 놀 게 필요해요. 나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도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김행숙에게 삼십 세란, 자신이 시인으로 재탄생한 나이. 갓 시인이 되어 이제 유모차에 태워져 자신에게 필요한 햇빛을 찾고 있다. 성숙한 서른 살의 여인이 갓 태어나 유모차에 오른 아이로 퇴행하는 순간이지만, 사람으로서가 아닌 시인으로 그렇다는 말씀. 이어서 같은 시의 2연.


  나는 엄마, 라고 말했다.

  얘야, 너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변했단다. 여자가 유모차를 밀던 손을 놓았다.

  구른 건 바퀴뿐이었을까? …… 내 차가 들이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었다. 나뭇잎 나뭇잎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다. 아아아, 내가 처박힌 여기는 어딜까? (하략)


  내가 엄마, 라고 부른 사람은 나를 보호하지 않고 그냥 유모차를 밀어버린다. 당연하지 시인으로 유아이지만 실제 나이는 서른 살인 걸. 그리하여 서른 살 시인은 머리를 굴린다. “구른 건 바퀴 뿐이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충동적으로 한 시집을 떠올렸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번에 빛나는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문지 시인선이 갖는 상징성. 이 가운데서도 1번의 위치에 있는 시집의 제목이 “구른 건 바퀴 뿐이었을까?”라는 의문/질문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나? 저 문지 시인선 1번에 빛나는 ‘시의 조상님’도 이제 갓 태어난 서른 살의 시인은 전혀 돌보지 않는다. 시인으로 태어나 보니, 환생하니까, 이 판도 험악하긴 마찬가지란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역시 독자의 시 독법은 전지전능이다. 내가 이렇게 읽었다는데, 그러면 그런 거지, 왜 아니꼽니?

  전지전능한 독자의 시 독법에 관한 권능으로 말하자면, 그리하여 이 시집에서는 아이,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첫번째 시 <조각공원>에서 보는 회화성은 점점 사라지고, <삼십세> 식의 아이를 빙자한 시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단, 이렇게 읽으려면 아이와 이제 갓 시인이 된 김행숙 자신의 동일화라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대책 없는 의식의 퇴행이란 골짜기로 추락할 수 있으리니. 예컨대.



  울지 않는 아이


  아주 조용하죠. 내 머릿속에서 훌쩍임들이 멎고 흘러나오던 콧물도 얼었어요.

  꺽, 하는 뭔가 한꺼번에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를 분할했지요. 다음에 온 고요는 쌔근거렸어요. 여진일까요?

  정말 아이들은 잠에 빠져버렸나 봐요. 내 머릿속은 보육원이죠. 아이들의 악몽을 덮을 이불을 준비해야겠어요.

  아이들의 악몽은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자동차 같아서 피하기가 어려워요. 자동차가 통과해 갔는데 내가 어떻게 콩나물을 사고 두부를 사겠어요?

  더 이상 울지 않는 아이는 위험해요. 아주 조용하지만

  조용히 내린 눈이 마을을 고립시키죠. 그리고 아무도 그 마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전문)



  보육원이든지 놀이방이든지 아이들이 죽 늘어서 자고 있는데 막힌 코 때문에 누구 하나가 수면중 무호흡증세가 일어나 꺽, 하고 소리를 냈나보다. 이게 악몽으로 넘어가고, 시인이 악몽을 꾸거나 말거나 어른 여자 보호자는 이 악몽이 모퉁이에서 튀어나오는 자동차 같아 손쓸 도리가 없다. 어른은 결코 악몽에 꺽, 소리를 지르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려는 마음도 없다. 아이 앞에 남은 것은 폭설이 와 고립된 고요한 시인들의 마을. 그 속에서 열라 울어야 한단다. 근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맞긴 맞는 건가, 혹시 견강부회 아닌가 싶어 캥기는 바가 작지는 않다.

  여태 아이를 이야기했으니, 그러면 돌봐야 하는 아이를 방치하는 어른 여자는 누굴까. 누구긴 누군가. 기성세대지. 시인은 여전한 아이의 눈으로 어른 여자를 바라다본다.



  여자들의 품


  영원히 여자들 품에 안긴 여자애이기를 원했어요. 나는 그녀들의 얘기를 귀에 꽂고 다녔어요. 내 입에서 그녀들이 흘러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그녀의 테이프가 늘어져서 우린 조금씩 어지러워지거나 천천히 섞였지만

  이미 우리는 다 외워버렸는걸요.  어쩌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녹색의 시냇물이 삼부아파트 101棟 102棟 103棟…… 새를 흐르고

  우린 영원히 발을 담그고, (전문)


  그래도 아이는 여자들의 품이 좋다. 여간해 품에 안아주지 않았지만 시인, 또는 아이는 어른 여자들의 이야기를 줄창 입에 달고 살다가 급기야 어른들의 이야기를 몽땅 외워버렸는데, 그게 그래서 우리들도 발을 담았다가 이내 휩쓸려 함께 흘러야 할 삼부아파트 101동, 102동, 103동 사이의 시냇물, 뻔한 이야기, 뻔한 노래를 하게 되리라는 것. 결국은 아이들도 어른들의 이야기를 빼다 박아 하고, 빼다 박고 만다는. 기어이 다른 노래를 하고 말겠다는 각오는 없다. 다만 그러다가 어쩌다 여지껏의 것들과 다른 노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와 어른 여자 사이에 놓인 것이 바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춘기다. 수없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사춘기 신드롬 가운데 하나. 그것도 반항의 한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소수의 청소년들은 이 시기에 책에 빠진다. 시인 역시 이 가운데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이들에 관한 시 한 수가 어찌 없을 수 있으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사춘기 4


  그가 사라지자 바람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를 바람의 아들이라 불렀다. 어른들은 후레자식이라고 말했다. 돌멩이가 구르지 않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그는 침을 뱉고 사라졌다. 구름의 모양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름은 더 이상 좋은 공상의 재료가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냄새를 풍겼다. 저녁마다 갈비를 뜯었다.

  사람들은 바람의 도움 없이 책장을 넘겼다. 바람과 함께 그가 사라지자, 몇몇 애들은 정말로 책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책에서만 폭풍이 일고 운명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전문)


  여기까지 아이-여자-사춘기를 이야기했다. 이 시집 《사춘기》에는 이 세 개의 시절 외에 한 시절을 더 보탰으니, 드디어 인생을 마감했으나 천국의 안식을 맛보기를 거부한 채 구천을 떠도는 유령, 귀신 이야기다. 아이, 사춘기 청소년, 어른의 시절은 대강 때려 맞춰서 시를 이해한다고 위안하면 그만인데, 여태 내가 귀신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이 귀신 메들리에 접어들어서는 그만 눈알만 빠지려고 한다. 그래도 《사춘기》를 소개하면서 귀신 이야기를 빼놓기는 아무래도 섭섭하니 그냥 읽어보십사, 하는 서비스 측면에서 제일 짧은 귀신 이야기 한 수 소개하며 독후감을 마친다. 으떠셔? 나 착하지?


  귀신 이야기 2


  우히히, 정말 장난이 아니었어. 사람들은 귀신 들린다고들 하지만 사람에게 먹힌 귀신에 대해 들어봤니? 히히히, 그래서 늙은 귀신들은 사람을 피해서 다녔지만 내가 세상에 귀신으로 남은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피해서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재밌어, 어떤 나무나 어떤 오토바이 어떤 전봇대……에 비길 수 없이 사람을 그냥 통과할 때, 단숨에 어떤 一生이 한 줄로 정리될 때, 정말 神이 된 기분이야. 얼레리꼴레리

  나는 내 멋대로 흘러다니지만 때때로 이상하게 빨리 흐르는 피를 가로지를 때, 우우우 휩쓸리고 싶어지기도 해. 정말 장난이 아니지. 늙은이는 교활하거나 분별력이 뛰어나서 우리는 애송이일 뿐이지만 세상에 같은 살덩어리는 없어. 내가 누빈 살덩어리 사이에서라면 나는 훌륭한 거간꾼이 될 수 있지. 누구도 속일 수 없는 게 있으니, 피의 흐름 피의 향기…… 히히히, 난 네가 누군지 알고 있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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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08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요. 골드문트님 덕분에 시를 읽습니다. 비록 리뷰에서만이지만..... 그래도 역시 감성이 잘 안와닿는 저는 감성이 메마른것 맞겠지요? ㅠ.ㅠ

Falstaff 2022-03-08 14:35   좋아요 1 | URL
감성에 잘 와닿지 않는 시 = 시인이 감성에 바탕해서 쓴 시가 아님.
ㅎㅎㅎ 전 무조건 독자가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아니면 누가 그렇게 쓰라고 했나요, 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