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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ㅣ 창비시선 169
박영근 지음 / 창비 / 1997년 11월
평점 :
박영근. 58년 개띠다. 전북 부안 출생. 시를 꼭 믿을 필요는 없지만 이 시집에 실린 <변산 기행>을 보면 신석정 고택이 있는 부안 읍내 말고 변산 반도 출신인 것처럼 보인다. 변산 입구에 폭포가 하나 있다. 직소폭포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을 받는 못.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산다는 일은 저렇게 곧게 쏟아져내리는
폭포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어이 산맥은 스스로 길을 끊어 왕포나
채석강에서 바위 절벽 아래 떨어지고
바다 끝까지 달려간 마음도
저녁 노을로 스러지고 (부분)
근데 내가 시인의 고향이 읍내가 아닌 변산반도 아닐까 염두에 두었던 건 이어지는 구절 때문이었다
방첩대나 지서 사람들이 밤새 술상머리를 두드리며 부르던
그 유행가 소리를 옛집에서 듣는다
선거장이 설 때마다 공화당 표몰이꾼들에게
말들이 막걸리와 그 질긴 만월표 고무신짝을 풀며
신명을 내던 아버지
(중략)
외롭게 춤출 때 듣던
아버지의 또다른 이름
빨치산 전향자라는 이름
(후략)
하여간 변산반도를 포함한 부안군에서 자란 똑똑한 박영근은 전주고등학교에 들어간다. 당시 전주고는 명문 가운데 명문으로 전북의 엘리트라면 당연히 전주서중과 전주고를 거쳐 서울대로 직진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정말인지 모르겠으나 빨치산 전향자로, “아들의 목숨을 사기 위해 / 한 마을을 부리던 논마지기”를 할아버지가 팔아버리는 바람에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됐으며, 알 빨갱이 출신에게 누가 있어서 온정을 베풀겠는가, 이어진 가난의 연속상영은 박영근으로 하여금 전주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만든다.
1980년에 제대를 했다고 하니, 당시 군 복무기간이 33개월이었으니까 1977년에 입대해 중동부 전선에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도 시집에 실린 <대암산>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쓸 수 없을 것처럼 상세한 고백으로 되어 있어서 해보는 짐작에 불과하지만.
살아 붙잡을 것은 물소리밖에 없었던
내 마음의 대암산
이십년이 흘러도 나는 떠나지 못하고,
귀울음으로 남아 시시때때로 울려오는 선무방송 (부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들어간 군대에서도, 대개 시인들은 복무 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비해 박영근은 높은 빈도수로 당시를 추억 또는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나도 군 시절에 관해서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아 이 시절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이후 상경한다. 먹고 살기 위해 구로 3공단에 취직을 해 밥을 벌고, 한편으로는 시를 쓰면서 잡지 동인도 하고, 유명한 《반시》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발하게 시작을 하기 시작하는데 당시만 해도 현장 노동자가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센세이셔널한 것이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이 이후에 곧바로 박노해, 백무산 등이 출현하니 가히 1호 현장시인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그러나 살림은 언제나 절망이고 오직 시만이 희망으로 다가왔으리. 그래 시인은 <희망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바람 부는 공단거리 해종일 쏘다녀도
아는 이 한사람
만날 수 없고
옷 벗은 광고선전지만 날아와 발등을 덮고
지친 내 그림자가 기대고 선
공장 담벼락엔
찢겨진 낡은 포스터
저물어 역전거리에 나가
싸구려 노래테이프를 파는 내 친구
절단기에 잡아먹힌 헐렁한 팔소매를 끌고
소줏집에서 흰소리를 치다
돌아와 눕는 밤
마음 밑바닥 싸늘한 강판엔
옛말들 쇠시루처럼 쌓여가고 (부분)
공단과 역전거리에서 하루 살림을 마치고 소줏집에서 한 잔 기울이면 마음에 싸늘한 강판, 무, 당근, 오이, 감자 등을 갈아 즙을 내는 철판 위에 옛말들이 쇠시루처럼 시인의 먹을 거리, 떡(餠)이 되어 쌓이는 것, 그게 바로 시라는 말 아니었을까. 희망은 희망이되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게 아니라 쇠시루처럼 쌓인 옛말, 하루하루의 살림을 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희망이라는.
그러나 세월은 가고 세상도 변한다. 6월 항쟁을 맞아 소위 민주화를 이루었고, 여기에 1989년 소비에트마저 무너지자, 현장에 들어와 있던 많은 동지들, 이 가운데 소위 ‘학출’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복학을 하고, 정치를 하기 위해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취직을 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박영근이 결코 보지 못한 미래엔 당당한 기득권 세력으로 고착한다. 시를 써서, 시만 써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인은 거의 없다. 이제 문학판에서 구경하기 쉽지 않은 고등학교 중퇴 학력의 시인이 되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을 하자니 어찌 그것이 쉬울 수 있었을까. 박영근은 애먼 술만 늘어간다. 그러다 성효숙과 함께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삶을 이어간다.
참 험하게 살았다. 그의 생애 앞에 놓였던 것, 그건 이것이었을까.
빙벽
겨울산은 나뭇잎 하나 붙잡을 것이 없다
침묵의 저 가파로운 칼등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바위 절벽에 얼어붙는다
어떤 생애의 화살이 날아와 꺠뜨릴 수 있을까
흉터와 외침 위에
얼음 저며드는 벽화여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된다
오오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저 겨울산 (전문)
마흔여덟 살, 2006년, 21세기에 죽은 시인의 사인이, 영양실조, 결핵성 뇌수막염, 패혈증이다. 인천 시내 판잣집에서 겨울에 물도 끓이지 못하고 살았다니, 생활인으로서는 무능하다는 말을 듣는 걸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시인으로의 문학적 기질이라 변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렇다고 이이가 평생 가난에 치어 우울하게 살았다는 증거도 없다. 원래 피해의식과 가난은 사람을 오히려 공격적으로 만드는 법. 김사인은 자신의 시에서 박영근의 성품을 묘사하며, 왈왈거리고 나이 차이에도 말 트자고 강짜를 부릴 수 있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암만 그래도 학출 빠져나간 현장, 가방끈 짧은 문학판에서의 피해의식과 가난은 그의 노래를 편하고 아름답게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터. 그가 자연을 보는 시선을 소개하며 독후감을 마친다.
달 1
한나절 바지락을 캐고 난 갯벌은
먼데 막소줏집 불빛 하나를 남겨두고
말이 없다
어둠이 노을을 삼키고
웅크린 섬들을 지우는 동안
철책이 빗장을 걸고 이빨을 세운다
한점 비린내도 없이
저렇게 바람으로 텅 비어버린
갯벌이 나는 두렵다
물이랑이
칼등을 세워
비구름 몰려오는 수평선으로 돌아간다
사나운 바람이 엉겨붙어 아우성치는
철책 위로
피를 머금은 달이, 솟는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