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책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11월, 우르스 비드머Urs Widmer가 쓴 희곡 <정상의 개들>을 읽고 쓴 독후감의 초두에 나는 비드머를 이렇게 소개했다.
  “1938년 스위스 바젤에서 번역일도 하는 고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우어스 비드머.…”
  <아버지의 책>은 제목처럼 우르스 비드머가 자신의 아버지 카를에게 헌정하는 작품이다.
  한 사람이 살다가 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다. 훗날 우리는 그를 “스위스 바젤에서 번역일도 하는 고등학교 교사”이며 “스위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우르스 비드머의 아버지”로 기념할 뿐, 그의 고향에서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일종의 성인식과 이날 이후부터 쓰기 시작해 죽는 날까지 빠짐없이 기록해야 하는 책인 백서, 그가 평생을 바쳐 온 문헌학적 성취, 죽을 때까지 오직 한 여성과만 육체적 사랑을 한 순정, 모인 사람들에게 활력을 갖게 만드는 쾌활함, 생활과는 거리가 먼 학문 또는 연구에 관한 집착, 남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숙함, 자기로서는 자연스럽지만 남들은 지독하게 엉뚱하게 볼 기상천외한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버리는 기벽 등에 관해서는 전혀 덧붙이지 않는다. 사는 게 다 그렇듯이, 죽은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되지 않으면.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자 스위스에서 법으로 금지한 공산주의 활동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다. 이 틈을 타 사회주의 정당의 일종인 ‘노동 리스트’라는 이름의 단체를 발기할 당시, 화자의 아버지 카를은 비례대표 19번을 맡으라는 관계자의 부탁을 아무 생각 없이 들어주는 바람에 하마터면 지방의회 의원이 될 뻔했던 일을 말한다. 당시에 노동 리스트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큰 성과를 거두어 18 명의 비례대표를 배출했다고 하니, 정치에도 관심이 없던 무신론자 카를 입장에선 있지도 않은 하느님이 보살폈던 거였다. 그렇게 작품 상 저 뒤에 벌어질 일을 앞에서 거론하며, 이야기는 다시 아버지 카를의 소년기, 만 12세 시절로 되돌아간다.
  화자의 아버지 카를은 김나지움에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애초에 목표를 정해 공부한 것도 아니건만 5.5점을 얻은 체조 과목만 제외하고 전 과목에서 만점인 6점을 받았던 똑똑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원래 공부 잘하는 집안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경기(여)고-서울대를 가지 못하면 자식 취급도 하지 않는 집구석도 봤다. 우리 집안 같으면 집안 전체에 한 명이나 나오면 경사라고 어른들끼리 축하주 핑계를 대고 떡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을 텐데 말이지. 근데 이 카를의 집안이 그랬다. 어린 카를은 집에서 바보 취급을 받았다. 카를의 형 펠릭스는 체조는 물론이거니와 카를이 한 번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성실도와 품행점수까지 탁월한 모범생 자체였다. 그러나 형을 능가하는 것도 하나 있었다. 축구. 카를은 지역 축구단 올드 보이스 소년 2팀의 센터포워드로 말 그대로 골게터였던 것. 사실 그것도 펠릭스가 축구에 쏟는 관심이 카를이 정치에 쏟는 관심만큼 적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어린 카를. 자꾸 ‘어린 카를’이라고 하는 이유는 카를의 아버지, 그러니까 화자의 할아버지 역시 카를이어서 그러는 건데, 하여튼 카를이 열두 살이 되자, 카를은 시내의 살림집에서 난생처음 혼자 길을 떠나 부모님의 고향 마을로 걸어가는 여행길에 오른다. 부모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이 날을 위한 여행복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 검은 바지, 조끼, 하얀 셔츠, 수공업 직인이 쓰는 것처럼 생긴 모자, 가죽 배낭과 속에 빵 하나, 치즈 한 조각, 한 병의 과일즙. 이 배낭은 그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열두 살 때 카를처럼 고향으로 향할 때 지던 배낭이었다. 아버지는 카를에게 가다 보면 폭풍우가 칠 것이고, 그러면 조금 지나서 우박까지 쏟아질 터이니 얼른 조끼를 벗어 머리 위에 얹고 그 위에 모자를 쓰라고 가르친다. 그리멜스하우젠이 쓴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를 보면 유럽 산간지방의 우박을 잘못 맞으면 골로 갈 정도로 우악스러운 모양이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온몸이 무섭게 떨리도록 춥겠지만 그래야 다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물론 실제로야 그러했겠는가. 카를이 앞으로 걸어야 할 인생에서 추위와 폭풍우과 우박이 숱하게 쏟아지리라는 은유로 읽어야할 터.
  고향에 도착하니 이상한 풍습이 있는 마을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관을 짠다. 그리고 그걸 집 담 같이 보이는 곳에 보관한다. 누구나 집 옆에 쌓인 관의 수를 세서 이 가구가 몇 명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게 살다가, 누군가가 죽으면,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자신의 관에 담아 매장을 하는 풍습이다. 그리고 검은 교회. 밖에서 보면 하얀 색에 가깝지만 거대한 탑, 본당, 굉장히 작은 익랑으로 되어 있는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카를의 눈엔 천 개도 넘을 거 같은 촛불의 바다에서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다. 나이든 어른 두 명이 카를의 옷을 모두 벗기고 뜨거운 욕조에 담근 다음 목욕솔로 박박 문지른다. 포피를 젖히고 귀두까지도 그렇게 문지르는데, 이것 역시 은유인 것이, 이후 빽빽이 들어찬 마을 사람들과 예배를 진행할 때의 합창, 온 사람들이 목청을 높여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 전력을 다해 노래 부를 때, 카를의 높은 목소리가 한 순간에 낮고 우렁찬 베이스 음정으로 바뀐 걸 알게 된다. 즉 성인이 되는 의식을 치루었던 것. 이때 의식을 도와주었던 두 명의 소녀 가운데 한 명. 얼굴에 주근깨가 귀엽게 박힌 아이. 저 먼 훗날에 상봉하게 될 소녀의 이야기는 독자가 직접 확인을 하게 맡겨 두고, 성인식의 마지막 순서를 소개하자.
  카를의 삼촌이 마지막으로 제단 위에 검은 수건으로 덮여 있던 검은색의 2절판 큰 책을 꺼낸다. 절단면에 금박이 칠해져 있고 뒷면에 카를의 이름이 새겨진 책.
  “이것은 백서다. 책이 백지로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는 죽음을 맞이하는 날까지 너의 하루 하루를 이 책에 기록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 그렇게 하고 있다. 짧든, 길든 우리의 방식대로 하고 있다. 글씨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매일 저녁 세 개의 십자표를 그려 넣는다.”
  이 책은 책의 주인이 죽기 전에 누구도 읽지 않을 것이며, 죽은 다음에 맏아들이, 맏아들이 멀리 있으면 다음 아들이 읽고,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았는지 이해하고 기뻐하기도 할 것이고 눈물짓기도 할 것이다. 놀라기도 하겠고, 누군가는 무엇을 배울 수도 있다. 즉, 자신의 소설을 스스로 써내려가는 일. 삼촌은 2절판의 커다란 책과 거위 깃펜, 잉크를 건네주며 오늘부터 책을 채우라고 권한다.

 

  세월이 흘러 먼 훗날, 카를 역시 나이가 들고 몸이 쇠약해지고, 이제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물일곱 살이 되도록 독립하지 않은 아들과 아내 클라라가 미리 표를 예매한 서커스를 구경하러 간 사이, 마지막으로 시 낭송회 뒷풀이에 참석했고, 이미 잠에 빠진 아내와 아들보다 더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와 여러 개의 약을 삼키고 설핏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어난다. 6월이었음에도 아직 어두운 새벽, 카를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화장실로 가서 물을 틀고는 바닥에 쓰러져 거의 사망 상태에 이르고 만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들이 앞에 섰을 때까지 아주 잠시 더 생존해 있다가 숨을 거둔다.
  그래서 화자가 멀리 있는 맏아들 펠릭스 대신해 카를의 책을 열어 읽기는 했다. 하지만 훌륭한 지식인이었던 카를이 직접 쓴 책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을 것. 그리하여 아버지의 책이 어떻게 변주되고, 그 속에 들어 있던 아버지의 삶은 어떤 그림이 그려졌을까, 이건 안 알려드린다.

 

  좋은 책이다. 260 쪽에도 못 미치는 짧은 작품이라 별로 부담도 없는데,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전에 읽었던 우르스 비드머, <정상의 개들>에서는 절대 기대하지도 못한 위트와 유머도 많이 섞여 있고, 때로는 진지하다. <어머니의 연인>도 가까운 날 안에 읽을 예정이다. 그 책도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아버지의 책>을 즐겁게 읽었다. 책값도 싸다. 읽지 않을 이유가 없는 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1-24 1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일 것 같아요
세워둔 관과 채워갈 백지 책의 상징을 알 것 같아요. 죽음의 순간까지 주어진 시간을 채워가고, 그 내용이 아들에게 읽혀짐으로 책임을 갖게되는... 더 많은 변주가 있을듯요.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알고 싶게 만드는 리뷰!

Falstaff 2022-01-24 12:08   좋아요 3 | URL
예. 이 책 재미난데, 문지가 마케팅을 잘 안 해서 알려지지 않은 거 같아요.
비트머도 스위스 출신으로 꽤 알려진 작가라고 하던데 말입니다.
왜 아버지의 책을 아들이 쓰는 지는.... 안 알려드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