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지돈, 하면 나는 2015년에 우리나라에 등장한 문학 집단이 떠오른다. 그 해에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정지돈을 필두로 오한기, 이상우, 황예인 등이 참여해 『후장사실주의』라는 잡지까지 내고, 자신들이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이들 집단의 작명을 보고,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야만스런 탐정들>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책 속에 스무 살 갓 넘은 문학청년들이 “내장 사실주의”라는 문학 집단이랄까 동아리를 만들어 전위문학을 추구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내장 사실주의를 자신이 주도하던 문학 그룹인 “밑바닥 사실주의”를 패러디 한 것이라 하니, 어쨌든 후장 사실주의와 로베르토 볼라뇨를 따로 떼서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이것이 여태까지 정지돈의 작품을 읽지도 않고 가졌던 그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모든 것이 영원했다>는 처음 읽은 정지돈이다. 이 책 말고도 몇 권의 책을 더 냈으니 독후감의 내용은 이 책, <모든 것이 영원했다>에 한정한다는 점을 먼저 밝혀야겠다. 괜히 그러하지도 않은데 적은 분량의 책 한 권으로 마치 이이의 모든 모습이 그러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변변치 않은 독후감을 읽고 계시는 분들도 꼭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한국의 볼라뇨, 라는 것. 단지 이이가 후장사실주의를 주창한 작가라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가져오는 방식부터가 볼라뇨와 매우 유사하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는 먼저 멕시코 안에서 활동했던 전위예술가(내장사실주의자)를 찾고, 이어서 약 20여 년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의 내장사실주의자들에 대해, 이어서 다시 멕시코로 돌아와 큰 전기를 맞는 것으로 어렴풋하게 기억하는데 읽은 지 좀 돼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럼 그건 넘어가고, 나치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살인 청부업을 하는 카를로스 비더의 행적을 추적하는 <먼별>, <2666>을 읽는 것처럼, 비록 볼라뇨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킨 반면, 정지돈은 실제 인물의 행적을 샅샅이 뒤졌지만, 특정인물의 수색 방식이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싶게 읽혔다. 이렇게 얘기하면 정씨에게는 억울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위에서 말한 선입견에 너무 젖어 있어서 이런 감상을 내놓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그렇게 느꼈다.

 

  정웰링턴, 넓게 이야기하면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정웰링턴은 1903년에 시작한 하와이 이민 1세대 집안의 아들로 미국태생이며 시민권자로 1927년생 정도로 보인다. 이이는 1948년에 하와이를 출발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가, 열차로 뉘른베르크에 도착한 다음, 다시 국경을 넘어 헤프를 거쳐 프라하에 도착한다. 프라하에서 찰스 의대를 졸업하고 생화학과 유전학을 공부한 후, 벽지 보건소와 병원을 전전하다 연구소에 입소하게 되는데, 반공국가인 미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어서 당국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바람에 어떠한 연구 주제도 주어지지 않는다.
  정웰링턴은 태생부터 공산주의자로, 어머니 현앨리스는 상하이에 살 때부터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대단한 여성 스파이 활약을 했다. 어머니는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권유로 이경선 목사, 한흥수, 그리고 박헌영 본인과 함께 북한에 갔다가 한국전 후 1956년에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이런 내력을 가지고 있는 정웰링턴은 골수 공산주의자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을 한 후, 공산주의자 지도자 훈련학교에서 2주간 특별교육도 이수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던 정웰링턴은 미국의 대학이 일본인이 아닌 동양인에게 학위를 주지 않으려는 것을 알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화한 냉전시대와 미국 내 공산주의 말살정책 때문에 당시에 서방세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체코로 유학을 해 의사 면허증을 딴 것이다. 웰링턴, 윌리는 진지한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로 굳이 구분을 하자면 조선의용대 계열의 좌익 파르티잔이지만 체코의 비밀경찰은 윌리가 공산주의자인 것을 믿지 못한 시절이 오래 있었다. 미국 국적이 곳곳에서 그를 의심받게 만들었던 것. 정작 윌리는, 소련이 이토록 망가진 것은 레닌이 공을 들여 잘 만들어 놓은 것을 스탈린이 엉망으로 망쳐버렸기 때문이며, 이제 다시 스탈린을 배격하는 흐루쇼프의 등장을 환영하기도 한 순진한 공산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로 정웰링턴의 고민은, 이제 혁명을 마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과 세계 공산주의를 관찰한 다음이다. 진정한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현재의 공산주의 체제를 부정해야 하지만 1950년대 공산정권 아래에서 체제 부정행위는 곧바로 죽음, 숙청에 이은 처형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공산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로 태어나고 자란 정웰링턴 본인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정웰링턴의 사고방식은 전형적인 정반합, 변증법적이다. 이의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있던 때가 연구소에 근무할 당시인데, 같은 연구소에 나중에 아내가 될 안나와, 물리학을 공부하다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지 바차가 있었다. 의기투합한 세 명은 1957년 8월에 프라하 카를로비바리 연구소에서 처음 만나 일종의 세미나를 시작한다. 당시엔 불과 세 명이었지만 단 세 명이 모여도 당국으로부터 처벌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세 명이 있다면 한 명은 스파이던 시절에.
  하여튼 이상주의자 정웰링턴과 회의주의자 안나 사이에 토의는 심각해져 갔으니, 안나는 동일성에서 벗어나 차이를 획득하려 한 반면, 정웰링턴은 차이에서 벗어나 동일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이들의 결합은 누가 봐도 정상으로 볼 수 없었을 정도였지만 이지 바차가 유일하게 지지했다 한다. 하여튼 1958년에 둘 사이에 티비타라고 이름 지은 예쁜 개띠 딸이 태어난다. 백인 미국인으로 1947년에 벌써 추방당한 조지 휠러라는 이름의 거시경제학자가 체코에 있었다. 이이는 후에 체코로 망명한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초기 정착기간 동안 숙식 등의 도움을 주고, 문화를 비롯한 체코 각계의 지식인들의 회합을 주도하는 인물이 있다. 정웰링턴이 고민에 빠져 있던 시절,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이 본격적으로 벌어져, 1956년에 곽정순, 이춘자 부부, 1957년에 전경준, 송안나 부부, 1962년에 김강, 파니아 굴위치 부부가 각각 미국에서 추방당해 체코로 망명하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미스터 루다. 체코의 비밀경찰이다. 윌리가 이미 결혼해서 잘 살고 있던 1962년 초. 루다는 윌리를 찾아와 현재는 인터나시오날 호텔에 머물고 있으나 조만간에 조지 휠러의 집으로 들어가거나 왕래를 할 것으로 보이는 김강, 파니아 굴위치가 미국의 스파이가 아닌지,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평소에 친분이 있는 휠러의 집을 방문해 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담배 한 보루를 건넨다. 정웰링턴은 1957년에 이미 전경준, 송안나 부부에 관해서도 같은 부탁, 이라기보다 요구를 받아들여 정보를 전해준 일이 있고, 이들은 1958년 12월, 북한 입국과 동시에 연락이 두절되고 생사를 확인하지도 못하게 된다. 안나와 결혼한 첫 해. 그는 안나를 얻기 위하여 (송)안나를 팔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58년에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체코시민권을 요청해서 59년 2월에 허락을 받은 이후에, 미스터 루다를 비롯한 체코 당국의 의심은 사라지고, 같은 해 4월 19일에 귀화 선서를 한다. 정작 안나를 얻기 위해 체코 시민이 되었으나, 세상 사는 일이 다 그러해서 안나와의 사이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는 세상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사라졌다. 남한에서는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넘어가거나, 전향했고, 북한에서는 숙청당해 처형이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나머지 땅에서의 공산주의자는 혁명가, 투사, 성인의 반열에서 기꺼이 욕망이 가득한 야심가로 탈바꿈하여 사형당하는 것과 출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노력했고, 두 가지를 선택하지 않은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정웰링턴처럼, 어쨌거나 사라졌다.

 

  이게 책의 앞부분이다. 뒷부분은 작가 정지돈이라고 보이는 화자 ‘나’가 체코를 방문해 마르크스를 추앙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 맑시스트를 만나 함께 정웰링턴의 흔적을 추적한다.
  글쎄, <모든 것은 영원했다>를 읽어본 당신이 이 작품이 로베르토 볼라뇨에서 여러 가지를 가져와 효과적으로 변주했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지돈이 정웰링턴의 자료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는 형식은, 내가 읽기에, 유사하다. 오히려 더 미학적이기도 하다. 만일 볼라뇨가 더 철학적이라고 하는 의견을 받아줄 수 있다면.
  정웰링턴의 한 살이를 파헤치기 위해 전 세계, 특히 미국 내 조선출신 공산주의자들의 운동사도 슬쩍 넘겨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1-12-01 1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만 읽어봤는데 색다르고 좋았어요. 이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정지돈 작가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흐릿하더라고요. 실명의 동료 작가들이 나와서 더 재미있더라고요.

Falstaff 2021-12-01 10:08   좋아요 1 | URL
예. 아주 독특했습니다. 실명과 픽션, 가명과 논픽션의 흐릿한 경계, 이것도 제가 느낀 볼라뇨하고 비슷한 측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