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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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모리슨의 책을 안 읽어본 독자가 얇은 분량만 가지고 선택해놓고 코 깨지기 딱 좋은 책.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은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쓰는데 방법이 여하하건 간에 쉽게 줄줄 읽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의 조선생, 프랑스의 프선생 같은 구대륙의 몇 작가들만큼 난해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친절하지는 않다. 물론 내가 읽어본 일곱 권의 책들에 한해 그렇다는 얘기다.
  이 작품도 책을 열면 도무지 현대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인 토니 모리슨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준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문자를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조합해 문장으로 엮어서 그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을 비문맹자라 한다. 그러나 여간한 훈련이나 선천적 능력이 없으면, 쓰고자 하는 내용과 관계없이, 이야기를 원고지 백 장 이상의 분량으로 서술하려면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 책의 첫 부분은 문자의 해독과 조합으로 ‘글’을 쓸 수 있지만 훈련이 덜된 인물, 나중에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어린 아가씨가 쓴 문장으로 시작한다.

  노예 매매로 거액을 벌어들여 지금은 메릴랜드 근방 대 주블리오 농장의 지주가 된 포르투갈 출신의 가톨릭 교도 동 오르테가 집안이 있다. 저택에는 몸에서 정향냄새가 나며 실력 있는 주방담당 노예가 있었고, 이이는 같은 노예와의 사이에 난 딸과 주인 동 오르테가의 씨로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은 젖먹이 아들이 있는데, 이 노예의 맏딸이 바로 플로렌스다. 플로렌스는 열두어 살 때 개신교도 제이컵 바크 씨에게 팔려 우여곡절을 치루고, 바크 씨가 짓다 만 저택의 방 한 곳에 들어가 벽지에 빼곡하게, 편지는 아니지만 특정인을 위해 글을 써놓는데, 이것이 글의 첫 부분이다. 즉 미국문학의 거장인 토니 모리슨이 쓴 <자비>의 첫머리가 노예의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것.
  그러니 독자는 처음부터 매끈한 문장 대신, 덜 훈련되고 인생도 덜 살아 미숙한 시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소녀가 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과거 시제tense가 들어가야 하는 곳을 현재 시제로 쓰고, 특정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적절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모르긴 몰라도 역자 송은주는 특별히 플로렌스의 문장을 우리말로 바꾸는데 고생을 좀 했을 거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송선생을 한 번 볼 기회가 있으면, 소주 한 잔 하면서 혹시 외국인이 우리말을 배우며 드물지 않게 사용하는, 틀린 건 아니지만 어딘지 어색한 어미변화에서 힌트를 받아 번역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런 것은 이미 빌 포크너나 베시 헤드 등에 의하여 시도된 적이 있어서 낯선 건 아니다. 그래도 책을 읽다가 난데없이 이런 장면이 나오면 조금은 갑갑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다행히 이 책에선 몇 번 시도하는 플로렌스의 벽지wallpaper 소설 말고는 쉽게 읽히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
  스토리를 시간 순서대로 조금만 설명해보기로 하자.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도 아닌, 17세기의 미국. 메릴랜드 지역은 이 이전에 스웨덴의 영토였다가, 네덜란드로 소유권이 넘어가고 이후로도 복잡하게 유지되어 온 땅. 그리하여 종교 역시 침례교와 퀘이커교도, 기타 교조적 개신교 분파와 그들에게 허식 덩어리 이교도로 인식되어 온 가톨릭까지 잡탕을 이루었고, 유럽 각지에서 온 백인들이 쉴 새 없이 원주민들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해 서로 거대한 땅을 소유해 경작을 시작하던 시기. 호손의 <주홍글자> 비슷한 시대라고 짐작하시면 크게 틀림이 없으리라. 다만 <주홍글자>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장면,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와 수많은 물라토, 크리올, 삼보, 메스티소, 로보. 치노, 코요테 등의 인종들이 생겨났다.
  이때 영국의 구빈원에는 제이컵 바크라는 소년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뒀고, 아버지는 아이를 내버려둔 채 나가버려 돌볼 친척도 없는 아이는 당연한 코스를 밟듯 구빈원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글자를 습득하는 행운을 잡는다. 나이가 조금 들자 운 좋게 법률회사 사환으로 들어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재기를 드러내 특히 상업 방면으로 좋은 자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라, 훗날 한국에서는 독고탁이란 소년에게 이런 일이 집중해서 벌어졌듯,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삼촌이란 작자가 미국에서 자손 없이 숨을 거두며 좋은 기후대의 기름진 땅 120에이커를 제이컵에게 상속해버린다. 그래 제이컵은 아메리카 동부 해변의 바베이도스에서 조금 살다가 드디어 상속받은 120에이커의 농장으로 거처를 옮기며 농업과 상업을 겸업하기에 이른다. (난 눈을 뒤집고 봐도 주변에 이런 삼촌, 고모, 외삼촌, 이모가 없으니 얼마나 불행한가.)
  제이컵은 주로 모피와 담배를 금과 바꾸는 중개상을 한 인물로, 이제 정착을 하려니 아내를 얻어야 할 일. 그리하여 조국 잉글랜드에 건강하고 순결한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한다, 광고를 내고 현지 변호사 입회하에 일차면접, 이차면접, …, n차 면접까지 거치고 나서 다시 17세기 기준의 순결한 아가씨라는 공증을 받기 위해 순풍산부인과에서 3백년 후 1980년 영국의 스무 살짜리 세자비 간택녀 다이애나 아가씨가 받게 될 처녀막 검사까지 마친 레베카 아가씨를 배필로 맞아들이기에 이른다.
  레베카가 삼등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오기 전에 그나마 백인치고 마음씨가 따듯한 제이컵은 선장의 사생아로, 낳자마자 근 스무 해 가까이 배에서만 살아왔던 유색인 처자 소로Sorrow를 데려와 별로 쓸모는 없지만 농장 일에 투입을 했고, 최근에는 원주민 소녀 노예 리나를 쇼핑해 와 역시 가사일과 농장 일을 거들게 한 상태. 레베카가 메릴랜드에서 내린지 20분 만에 뚝딱 결혼식을 마치고 농장에 가서 보니 아무 죄 없는 리나와 왠지 모르게 서먹서먹. 세월은 둘 사이에 우정을 쌓게 하고 맏딸 패트리시안의 출산을 리나가 적극적으로 도운 다음 더욱 가까워진다. 물론 이후에 곧 죽을 세 명의 아들을 출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후. 제이컵 씨는 저 위에서 소개한 동 오르테가 씨의 식사 초대를 받는다. 지주가 중개인을 직접 만나자는 건 체면을 무릅쓰고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기 위함인 걸 알면서도 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겉멋만 잔뜩 들은 가톨릭교도가 자신이 데리고 있는 노예를 넘겨주고 대신 채무를 변제해달라는 거였다. 당시 이 지역이 포르투갈 관리 하에 있었는지, 요구를 거절하고 소송을 한다면 몇 십 년이 걸려야 하고,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몸에서 정향 냄새를 풍기는 요리사를 점찍는다. 동 오르테가가 거절할 것임을 짐작하면서. 제이컵이 요리사에게 한 발 가까이 접근하자, 요리사가 얼른 낮은 목소리로 제이컵에게 거의 간청하는 목소리로 속삭이기를, “세뇨르, 저는 안 돼요. 저 애를 데려 가세요. 제 딸을 데려가요.”
  제이컵이 생각하기를 아직 살았으면 맏딸 페트리시안과 비슷한 나이 정도 됐으니 아내에게도 위안이 되리라 싶어 그 자리에서, 가톨릭 신부에게 글쓰기를 배운 플로렌스를 집안의 노예로 데려오게 된다.
  여기서 난데없는 모리슨의 실수. 또는 나의 오독misreading. 제이컵은 동 오르테가가 속물이라 단 하나도 배울 게 없음을 단박에 알아챘지만, 그가 사는 저택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 오르테가를 방문한 거 맞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라고 저택을 짓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집을 남긴다는 걸 되살려 갑자기 숲의 나무를 몽땅 베고 그 자리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다. 원주민 출신 여인 리나는 숲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게 불길하다고 예언을 했고, 소설에서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적중한다는 소설작법 제 2장 3조에 의거, 한꺼번에 많은 인부와 자재들이 들어왔고, 이를 운송하기 위한 마차를 끄는 짐말 역시 농장에 들어오는데, 작가 토니 모리슨은, 이때 첫딸 페트리시안이 말의 발굽에 머리를 채여 죽었다고 얘기한다. 오르테가의 저택에서는 죽은 페트리시안의 또래라는 걸 염두에 두고 플로렌스를 데려왔으면서. 내 오독이었으면 좋겠다.
  불행은 언제나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서, 저택 건설 중에 우리의 제이컵 바크 씨마저 천벌을 받았는지 천연두에 걸려 숟가락을 놓고 만다. 천연두는 지금이야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당시엔 치명적 전염병이라 제이컵이 죽자마자 매장을 하고 곧바로 아내 레베카도 앓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레베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에 자신만의 처방으로 아픈 사람을 고쳐준 적이 있는 저택 건설 당시의 대장장이를 찾아오라고 플로렌스를 보내게 되고, 흑인 소녀애가 혼자 험한 시절, 험한 길을 헤치며 온갖 난관 끝에 기어이 그를 찾아 마님의 병을 돌보기에 이르는데, 왜 플로렌스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저택의 방 하나를 골라 글씨도 읽지 못하는 대장장이가 읽어보라고 벽지에다가 빼곡하게 글을 써놓았을까. 그것도 글을 다 쓰기가 무섭게 저택 전부에 불을 싸지를 거면서.
  그건 직접 확인하시라. 왜 제목을 <자비>라고 했으며, 자비로운 행위가 도대체 어떤 일이었는지도. 그러면 쉽지 않은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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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2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께서도 ‘적어도 친절하지 않다‘고 하시는데, 제가 가입해 있던 고등학교 시절 독서 서클에서 호기롭게 선정했던 책이 바로 [비러브드]여서, 다들 테이블 가운데 놓인 다과를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딩 친구들이 책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못나눴던 기억이 가물가물^^ 얇은 책이라 하셨는데도 리뷰보니 내용이 일차원이 아니네요. <비러브드> 먼저 재도전하고 <자비>를 나중에. 저는 숙제 하나 또 얻어 갑니다.

Falstaff 2021-04-23 14:17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적도 있으시군요. 그래도 알찬 학창시절을 보내셨습니다.
<빌러브드>도 재미있고, <솔로몬의 노래>도 잘 읽힙니다.
저는 토니 모리슨이 현대를 배경으로 한 책을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조금 더 불친절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지까짓 것이 소설밖에 더 됩니까. 그냥 읽으시면 되지요 뭐. ^^

2021-04-23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3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