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7
위룽쥔 지음, 홍영림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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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위룽진喩榮軍. 대학에서 공부한 건 예상외로 스포츠 의학. 무사히 졸업까지 했다. 졸업 후에 의학의 길 대신 상하이 트라마센터에서 서포팅 업무를 하다가 틈틈이 극작을 썼던 모양이다. 1971년생. 2000년부터 60여 편에 달하는 연극, 오페라, 발레극, 전통극, 신체극을 썼다니 놀라운 일이다. 중국은 각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징적인 연극과 음악극의 혼합형태(곤극, 곡극 등)가 발전해서 이이가 썼다고 하는 ‘신체극’이, 우리나라의 경우에 신체시新體詩라 불리는 것처럼 기존의 연극양식에 서구의 극 형식을 적용한 것인지, 아니면 몸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임mime을 신체극身體劇이라 했는지 문외한으로는 도무지 구별할 수 없다. 하긴 중요한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역자 홍영림은 이 작품 <손님>을 부조리극이라 규정한다. 등장인물은 단 세 명.
  작품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이 있다. 1976년의 중국을 경천동지하게 만든 사건. 7월 28일, 당시 베이징에서 불과 2백 킬로미터 떨어진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해 상당히 축소해 발표하지 않았나 싶은 중국정부의 공식집계로 242,769명이 사망한 일. 중국 정부는 과거 10여 년간 지식인 계층을 잡도리하느라고 당연히 학업에 관심이 없어 의사의 수가 엉망으로 부족한 지경에 이르러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하며, 문화혁명 기간에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현지의 상황을 알기 위해 털털거리는 고물 자동차가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먼짓길을 며칠을 달려 베이징에 도착해야 했단다.
  지진 43일 후인 9월 9일에 한 번 더 난리가 나는데, 이번엔 중국의 가장 빛나는 붉은 별, 마오가 세상을 뜬다. 절대 권력자의 죽음은 그의 아내가 벌여놓은 문화혁명의 조종을 울려 같은 해 10월엔 사인방으로 불린 마오의 처 장칭을 위시해 야오원위안, 왕훙원, 장춘자오를 체포해버린다. 우리나라에선 1976년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에서 양정모 선수가 건국이후 최초로 금메달을 따, 남한 정부도 세계에서 금메달감인줄 알았던 시기였지만, 중국은 그야말로 현대사가 격동했던 시기였다.


  여전히 문화혁명의 서슬이 퍼렇던 7월에 35세가 채 안 된 꽃다운 청춘 마스투馬時途는 상하이의 회사에 다니다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지금은 방직공장 노동자인 약 28세의 아내 모상완莫桑晩을 두고 탕산으로 출장을 간다. 일단 갔다고 생각하자.
  탕산에서 일을 마치고 거액의 물품대금이 든 가방을 메고 다시 상하이로 오는 새벽기차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버스가 죽어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길 양편에서 집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탕산 대지진 당시 무려 530만 채의 건물이 무너졌다고 한다. 붉은 혁명열사의 집안 출신, 그러니까 이른바 진골 화랑 출신인 마스투는 즉시 버스에서 내려 묻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이 와중에 물품 대금으로 받은 현금은 어느 벽돌더미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지진이 진정되고 구호상황이 끝난 후 마스투는 상하이로 돌아왔다. 하여튼 돌아왔다고 가정하자. 아직 마오가 죽기 전이라 혁명열사 가문의 진골 화랑이 불가촉 향·소·부곡 출신인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여성과 결혼한 것도 마뜩하지 않은데, 이제 탕산에 출장을 가 지진이 났다는 핑계로 거액의 현금을 횡령이나 착복, 아니면 적어도 망실한 죄를 물어 회사는 마스투를 고소해버렸고, 법원은 죄가 마땅하다는 선고를 내려 긴 형기를 만기 출소하게 됐다. 이제 마스투와 모상완한테는 상하이의 마천루 사이 중심가에 낡은 단층집 하나만 마치 알박기라도 하듯 남아 있을 뿐. 이제 그것마저 조속히 팔지 않으면 강제철거를 당할 처지에 몰렸다.


  앞에서 이 드라마를 부조리극이라 한다고 했다. 위에 적어놓은 내용은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 그런데 극의 본론 격인 2막에 들어서면 내용이 완전하게 바뀐다. 보자.
  마스투가 탕산으로 출장 가서 대지진을 만나는 것까지는 같다. 이 와중에 마스투 역시 무너지는 벽돌에 깔려 오른쪽 다리 하나가 바스러진다. 말이 바스러지는 거지, 40년이 지나도 후유증으로 다리를 약간 저는 정도면 그냥 부러진 거였을 확률이 훨씬 높다. 뼈가 바스러지면 아주 복잡한 외과수술이 필요한데 당시 절대 부족한 의사진이 그런 것까지 즉각 해주었을 턱이 없다. 이 와중에 물품대금 역시 사라졌다. 다리가 부러지고 까무러친 마당에 누군가 훔쳐갔을 수도 있고, 마스투와 마찬가지로 폐허에 묻혔을 수도 있다. 하여튼 7개월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마스투는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고 예쁜 용모에 머리도 총명한 젊은 아내 모상완을 위해 엉망이 된 도시에서 다시 호적을 정리하는 틈을 타 이름도 마신런馬新人, 다시 태어난 자로 개명해 그대로 탕산에 주저앉는다.
  모상완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은 것으로 알고 혁명열사 가문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면서 기회를 얻자 다시 공부를 해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다. 이때 마스투는 탕산에서 신문을 통해 모상완의 내력을 스크랩해두고 관찰하면서 대학 학비를 보내주기도 한다. 물론 머리가 제대로 박힌 모상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신세를 질 수 없어 우편환을 다시 돌려보내지만. 모상완은 승승장구, 이후 박사가 되고, 많은 저술을 내기도 하면서 네 살 많은 테너 가수 샤만텐夏滿天과 결혼해 여태 함께, 마스투가 살던 상하이 시내 한복판 마천루 사이의 단층집에서 살고 있다.
  마스투가 탕산으로 향한지 40년이 흘러 이제 마신런이 되어 다시 모상완을 방문했을 때, 모상완은 남편 샤만텐과 아침밥상을 매개로 소소한 일상적인 다툼을 벌이고 있던 터. 이 작자는 왜 난데없이 모상완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폐암에 걸려서 말이지. 이때 마스투는 일흔다섯, 모상완은 예순여덟, 심장병이 있는 샤만텐은 일흔둘.
  왜 왔는지 가르쳐드릴까? 싫다.


  그런데 말이지, 만일 마스투가 아예 탕산에 가지 않아서 지진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여태 상하이 중심가 마천루 사이의 단층집에서 모상완과 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세 가지를 놓고 보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극에서 자주 나오듯이 어차피 삶에 ‘만약’은 없는 거니까. 인생은 그저 한 번 살아가면 그걸로 끝.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래? 다시 저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난 싫다. 이대로 살다가 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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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8 09: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왜 왔는지 가르쳐 드릴까? 싫다에서 강한 뽐뿌의 예감이 듭니다. ㅎㅎ
저도 옛 시절로 돌아가고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으련다에 좋아요 보냅니다. ^^

Falstaff 2021-04-18 10:01   좋아요 3 | URL
이 작품은 작년에 우리나라 노 배우들이 낭독 공연을 했답니다. 연륜있는 배우들이라서 그런지 매우 환상적이었다는 소식을 들었습지요.
코로나가 끝나면 낭독 공연이 아니라 정식 공연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데, 어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대가 되는 공연입니다만 연극은 막이 올라봐야 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