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속에 호랑이 아침달 시집 12
최정례 지음 / 아침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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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월에 세상을 뜬 시인. 1955년생이니 기대수명보다 한참 덜 살았다. 아쉽지만 그게 인생인데 어쩌랴. 편히 잠들기를.


  이이의 두 번째 시집. 살아생전 세 권의 시집을 남겼다. 첫 시집 《붉은 밭》과 세 번째 시집 《빛그물》은 창비에서 냈고, 이 시집은 1998년에 세계사에서 출간했다가 절판된 것을 ‘아침달’이란 귀여운 이름의 출판사에서 2019년에 복간했다.
  1990년, 만 35세에 등단. 1990년이면 시의 파편화가 본격적으로는 진행되지 않았을 시기. 최정례의 시가 비록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지독한 자기감정의 특화 현상이 두드러지지는 않아 요즘 시들과 비교하면 무슨 뜻인지 짐작은 하겠다. 나는 이번 세기에 활발하게 시작을 하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은 그리 많이 읽어보지 않아 선뜻 입에 올리기 쉽지 않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적어도 허풍이라도. 그래서 조금의 용기와 많은 허풍을 섞어 말을 해보자면, 최정례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중심으로 잡고 시인이 보는 해당 사물의 감각을 덧칠하고 있는 거 같다. 쉽게 얘기해 시의 개별화 현상이 이미 최시인의 시에 시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시에 따라 사물의 정형에, 또는 감각으로 조금씩 치우치는 것이 정상이리라. 세상의 딱 가운데란 건 없으니까. 예를 들어 시집에 제일 먼저 실은 시를 보자.



  드디어


  그를 나무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나무가 둥글게 부풀었다
  바람이 부니
  느낌표가 되었다가
  물음표가 되었다가
  흔들렸다


  아주 멀리
  나도 이제 여행을 간다
  쓱
  나무 속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아닌 표정으로
  손바닥 내밀고
  아니야 아니야
  흔들리는 것이다  (전문)



  나무 속? 어디긴 어딘가, 죽어야 들어가는 관 속이지. 단 내가 들어가 멀리 여행을 가는 나무의 속이 관 속이고, 그를 밀어버린 나무의 속은 내 가슴 속, 또는 내 마음의 속이겠지. 그러니 1연에서는 그를 나의 나무, 내 가슴이나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것이고, 그걸 간직한 채 이제 아주 멀리 나도 여행을 떠난다는 시. 물론 독자의 독법에 따라 의미가 바뀌겠지만 내가 읽은 <드디어>는 그렇다. 사실관계야 어떻든 간에 독자가 이리 쉽게 이해 또는 오해할 수 있는 건 시어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파편화, 즉 극도로 개별화한 심상을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은 자유다. 오해할 자유도 있으니 절대 이 말은 믿지 마시라. 난 아마추어다.
  이 시도 그렇거니와 최정례의 시는 곱상하지 않다. 사물을 표현하는데 에둘러 가지도 않는다. 나무속으로도 그냥 쑥, 여행을 가는 것처럼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건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끝 장면



  한참을 걷다가 집 한 채를 만났습니다 울타리 가득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불타는 거 같앴습니다 울타리 너머로 두 남자가 보였습니다 하나는 아이고 하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장독대 옆에도 칸나가 다알리아가 붉은 꽃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꽃을 좀 줄 수 있냐고 했습니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두 말 않고 돌아서 걸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한 줄 불더니 나뭇잎들 쏟아지고 벌판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변했습니다 오래 걸었습니다 아이가 달려오며 부르는 소리 들은 것도 같습니다 꽃을 내미는 것도 같았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뒤돌아 안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돌아본 듯도 합니다 그 집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아니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래전의 꿈입니다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일까 수년을 생각했습니다 어디 먼 다른 생의 알 수 없는 끝 장면이 내 몸에 찍혀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후로 길은 길이란 길은 다 멀고 캄캄했습니다  (전문)



  띄어쓰기, 구두점과 맞춤법은 전부 시 원문에 따랐다. 한 번 다시 읽어보시라. 무슨 뜻인지 이거야말로 애매모호. (근데 ‘애매모호’가 독일어 ‘애매모흐’에서 온 거라며? 프랑스에선 같은 뜻으로 ‘아리숑’을 쓴다던가 그렇지 아마!) 나도 읽다가 중간에서 멈추길 세 번 정도 한 거 같다. 그러다가 마음먹고 끝까지 읽었더니 뒷부분에 “오래전의 꿈입니다.” 하는 거다. 꿈속에서 걷다가 집을 만나고 집 울 안에 붉은 꽃이 있고 남자 둘이 있었는데 뭐 전형적인 개꿈이다. 그냥 꿈 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잊혀지지 않는 꿈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야망이나 뭐 그런 게 아니고 진짜 꿈. 나도 있다. 아주 밝은 여름날, 내가 조금은 관능적인 여자로 변해 남자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주황색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재떨이로 쓰는 중간 크기의 항아리에 하이힐 신은 오른쪽 발을 올리고 몸을 조금 숙인 채 깊숙이 담배 한 모금을 피우는 장면. 담배 끊기 전이었다. 시인은 하여튼 자기가 오래 잊지 않았던 꿈을 혹시 살았을지도 모를 다른 생의 끝 장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듯하다.
  최정례는 하여튼 돌아가지 않는다. <끝 장면>에서도 보라. 별다른 수사법의 구사 없이 ~했다, ~이었다, 로 끝나는 문장들이, 비록 처음 읽으면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일지라도, 줄줄이 나와 적어도 어떤 그림인지는 눈에 보인다. 꿈 이야기가 나왔다가, 독자가 매우 혼돈스러울 때 쯤해서 이게 예전에 꾼 꿈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생의 끝 장면으로 이어가는 스토리텔링 비슷하게 최정례는 시를 쓰고 있다.
  이이의 시가 거의 내가 감상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 정도 아닐까 싶다. 솔직히 요즘 젊은 시인들이 쓰는 개별적 감수성의 시, 사변의 파편화가 상당부분 진행된 시들은 내 수준에서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앞으로 그런 시들을 더 읽음으로 해서 먼저 익숙해지고 조금 더 있으면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를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시를 읽는 일은 사물이 시인이란 반사경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엔 도로나 인도가 좋아져 별로 이런 경우가 없지만 예전엔 길이 자주 푹 패여 비가 오면 웅덩이가 생기고, 웅덩이를 표면에 내 모습도, 간판 글씨와 그림도, 동무들의 옷깃도 보이고 그랬다.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과 간판 글씨와 그림과 동무들의 옷깃을 보는 일도 시를 쓰거나 감상하는 것하고 비슷할까? 그럼, 당연하다.



  길이 움푹 파이다


  빗물이 고여 있다 네가 거기 가만히 있다 얕고 투명하다 잠깐뿐이다 네가 빗물에 담겨 있는 동안 구름이 나뭇잎이 들어섰다 갔다 택시가 비켜 갔다 노랗게 흔들렸다


  너는 거꾸로 말하는구나 추악하다는 아름답다로 사랑하다는 끔찍하다로 거꾸로 서서 훌쩍이는구나 누가 네 말을 알아들을까 네가 길바닥에 엎어졌을 땐 자는 줄 알았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다시는 읽어나지 않는구나


  길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다 햇빛이 났다 새 떼가 높이 날았다 새들은 웅덩이를 끌고 어디로 날아갔나 길이 움푹 파였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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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3-16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똑같은 개꿈을 꾸고도 저렇게 생각 할 수 있다니... 다른 생의 끝 장면이 내 몸에 찍혀버린게 아닐까...시인은 왜 저 꿈에 그토록 집착했던 걸까요. 꽃을 받을걸 한 번쯤 후회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근데 폴스타프님 주황원피스 관능녀꿈ㅋㅋㅋ 어쩔까요 ㅋㅋ 항아리 재떨이ㅋㅋㅋ

Falstaff 2021-03-16 09:53   좋아요 1 | URL
주황원피스 입고 무릎 높이의 항아리에 한쪽 다리 올린 채 담배 피우는 거.... 그게 혹시 제 다른 생의 끝 장면 부근이 아니었을까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