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6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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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꼰대다. 꼰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고정관념이 한 번 박혔다하면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것. 키플링의 작품으로는 딱 한 권의 장편소설 <킴>을 읽었을 뿐. 그리고 곧바로 이이를 식민주의자, 국가주의적 애국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킴>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낌새가 마땅하지 못했던 것. 그리하여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자냥 님의 낚시에 걸려서였을 뿐이다. (원래 이이의 낚시 기술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서 '꾼'을 넘어 도사의 경지이긴 하지만.)
  근데 이 책으로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에 관해 생각이 바뀐다. 나는 처음엔 당연히 키플링이라고 하면 <정글북> 같은 아동 소설가로 생각했다가, <킴>으로 위에 쓴 고정관념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진짜 예상 외로 키플링의 이 단편소설집을 읽고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다. 이이가 정치적으로 국수주의자에다가 제국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식민주의자인 것은 맞지만, 소설가로 그의 작품에 한해서 얘기하자면, 키플링은 아동 소설가는 물론 아니고, 작품 속에 애국주의적인 분위기가 좀 있는 그냥 소설가,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에서 자신의 반짝이는 재능을 더욱 꽃피운 작가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은 키플링이 열아홉 살 때 쓴 작품 <백 가지 슬픔의 문>에서 시작해 작품을 쓴 순서대로 예순한 살 때의 작품 <알라의 눈>까지 스물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그러니 그의 전 생애를 걸친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텐데, 가장 놀랐던 것은 참 다양하다는 것. 저 잉글랜드의 전통 고딕소설부터 시작해 언뜻 에드가 포를 연상할 수 있는 괴기극도 있다가, 인간 본성 속에 든 권력욕을 조망하기도 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의 심성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비뚤게 만들어버리는 교조적 기독교 교육 같은 것도 있고, 헨리 제임스가 쓴 <나사의 회전>과 유사한 혼령이 등장하는 어려운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야말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명멸했던 온갖 소설장르를 한 권의 책으로 다 즐길 수 있다.
  이 가운데 재미있게 또는 공감이나 감정이입을 해가며 읽은 작품 세 개를 꼽는다면 첫째가 <매애, 매애, 검은 양>, 둘째가 <‘그들’>이요 셋째가 표제작이기도 한 <왕이 되려 한 남자>이지만 다른 것들도 이들과 견줄 수 있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단편집 좀 읽은 독자들도 키플링의 이 단편집처럼 고르게 수준 있는 것들만 골라 실은 책은 발견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키플링의 단편들이 내 취향은 아니다. 단편의 경우에 나는 작년에 우연히 발견한 독일 여자 유디트 헤르만의 《단지 유령일 뿐》 같은 지극한 심리소설을 좋아한다. 키플링은 헤르만과 거의 반대편에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단편소설의 결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키플링은 충분히 즐길 만했고, 즐겼다.
  이이는 인도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부모와 떨어져 영국에서 학교를 다닌다. 이때 자신의 경험 일부를 <매애, 매애, 검은 양>에서 묘사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학교를 마치고는 기자 신분으로 다시 인도로 가 7년을 보낸다. 그래서 그랬는지 작품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의 원시성이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단어들이 곧바로 시각을 자극하기도 하는 반면, 영국을 무대로 해서는 문제적 작가 피터 애크로이드를 읽는 것처럼 삶의 비의나 역사 이면의 오리무중(알라의 눈)을 헤매는 혼돈을 그려내기도 하니, 그의 다양한 문법은 말 그대로 종횡무진이다.
  그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이 19세에서 61세까지 무려 42년에 걸쳐 쓴 것으로, 식민지와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전쟁 중에 아들을 먼저 보낸 작가의 파란만장이 다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야 짧은 시간에 세월을 휙 지나갈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시간, 한 시간 속에 자신의 모든 성취와 실수와 후회와 안타까움과 사랑과 질투와 미움과 그냥 그런 순간들로 채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사실 독자라는 것, 책을 사서 읽는 일이 얼마나 큰 특권이냐는 말이지. 작가라는 이름의 인간들은 오직 독자를 위해 그리 오랜 세월의 경험과 축적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면 우리는 그냥 읽고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이 독후감을 읽어주신 분들이여, 오랜만에 만나는 일품 뷔페,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의 일독을 미루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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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8 0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단편집 정말 물건이죠? ㅎㅎ 저의 낚시에 걸려서 좋은 책을 만나신 듯하여 뿌듯합니다. 제 낚시 솜씨도 인정해주시니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아무튼 저도 이 단편집으로 키플링을 다시 봤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 단편집을 만나서 그런 행운을 누리시길~!

Falstaff 2021-03-08 09:41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런 책만 미끼로 걸어주시면 황공무지입지요!
덕분에 좋은 책,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