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한 율리 체의 소설 네 권을 이제 다 읽게 된다. 2018년에 <형사 실프와 평행우주 인생들>을 우연히, 별 기대 없이 헌책을 사 읽고 눈이 번쩍 띄었다가 <잠수 한계 시간>을 기점으로 이젠 ‘율리 체’라는 이름 하나만 가지고 주저 없이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이어 <새해>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인상 깊었는데 이번에 읽은 <어떤 소송>, 흠, 디스토피아 과학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까지 감상하게 되었으니 74년생 법학박사 범띠 여사가 품고 있는 상상력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한 바가 작지 않다.
  책은 1장chapter, ‘서문’으로 시작한다. 첫 문장을 인용한다.

  “건강은 완전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재 상태이며 단순히 질병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어서 건강에 대한 확장적 설명이 뒤따른다. 


  “건강한 유기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잘 상호작용한다. 자기 방어력에 관한 낙관적인 신뢰와 정신적인 힘 그리고 안정적인 영혼의 삶이 있다.” 


  즉 건강이라고 하는 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유기체로의 사회가 상호작용을 통해 모든 면에서 건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작중 무대인 21세기 중반 독일 지역에서는 모든 일상사가 공익과 사익이라는 측면에서의 건강을 위해 방법Die Methode이라는 통제 체제가 지배한다. 이것이 기본 배경. 모든 사람은 이두박근 아래에 칩을 삽입해야 한다. 책에서는 이 칩의 구체적인 용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독자는 이와 비슷한 여러 콘텐츠를 통해 칩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작가가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문장들이, 하인리히 크라머가 쓰고 베를린, 뮌헨, 슈투트가르트에서 출판된 『국가 공인 원칙으로서의 건강』 29판의 서문에서 가지고 왔다고 해서, 독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가 십상일 터. 하지만 아니다. 하인리히 크라머는 현 독일의 정치체제인 ‘방법’에 상당히 우호적인 언론인으로 등장한다. 서문 역시 율리 체가 직접 쓴 것.
  이어지는 2장의 제목은 ‘판결’. 방법의 이름으로! 방법적대적 책동을 자행한 독일 국적자이자 생물학 전공자 미아 홀에 대한 형사 사건 판결. 이라고 쓰여 있다. ‘방법적대적’이란 단어가 처음 읽을 때 매우 혼란스럽고 어색하다. 그러면 ‘방법’ 자리에 박정희 정권 당시의 ‘유신’을 대신해보자. ‘유신적대적’. 유신에 적대하는, 정도의 뜻으로 읽힌다. 그러니 책에서 말하는 방법은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 하나의 권력체라는 의미의 고유명사로 이해해야 하리라.
  이젠 단박에 이해가 간다. 생물학을 공부하는 미아 홀이라는 독일 여성이 반체제 책동을 하여 형사 사건으로 기소되어 판결을 받았다는 의미. 어떤 판결인가 하면,
  “Ⅰ. 피고는 테러 전쟁 준비를 포함한 방법적대적인 책동으로 유죄다. 국가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독성 물질을 취급하였으며 보편적 복리에 부담을 안기며 필수적 조사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사실이 있다. Ⅱ. 고로 피고를 무기 동결형에 처한다. Ⅲ. 피고는 소송 비용과 기타 필수 경비를 부담한다.”
  테러 전쟁 준비와 이에 따른 평화를 위태롭게 한 행위는 나중으로 하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독성 물질을 취급’했다는 게 무엇인가 하면, 담배를 피웠다는 것.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필수적 조사’는 개인의 건강을 위해 집안에 설치한 운동기구(미아 홀의 경우 고정 자전거)의 요구 거리까지 주행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이게 ‘보편적 복리에 부담을 안기’는 일이라는 건, 필수 주행을 하지 않아 나중에 질병에 걸리게 될 경우, 진료비 등에 세금 같은 공공 지원이 사용될 거란 뜻이다. 이 현재의 권력인 방법은 오직 하나, 건강을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 모든 집, 건물에는 태양광 판넬이 설치되어 판넬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장관을 이루는 도시. 아무리 많은 자동차가 도로를 횡행해도 태양광 에너지에서 나오는 초저음 배터리로 운행을 해서 소음과 분진 및 공해요인이 거의 없는 꿈의 유토피아.
  물론 구강 키스도 금지다. 볼 키스도 당연히 금지다. 나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모든 행위는 허용하지 않는다. 어디서 본 것 같다고? 근육질의 사나이 실베스터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할리우드 B급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보조기구를 사용해 뇌파의 교류를 통해서만 허용한다. 모든 인류는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액체교환법’이라고 혐오하는 지경까지 가는데, 이 책에선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이런 정권에게 꼭 필요한 건 경계다. 자신의 주장을 모든 땅에 다 요구할 수 없을 터이니. 그리하여 B급 영화에선 안전과 평화의 땅은 거대한 성벽 안에서만 적용되며, 이 책에서는 비록 뚜렷한 장벽은 없지만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어서 선 밖으로 나가는 건 보건법에 저촉이 된다.

  주인공 미아 홀에겐 어려서부터 우애가 각별한 남동생 크라머가 있었는데, 시를 쓰는 크라머는 통제를 견디기 힘들어했으며, 여러 여성과 여러 자세로 액체교환법을 시행하고, 방법이 지정한 선,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개울에서 낚시한 생선을, 절대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워 먹는 일을 ‘자행한다.’ 줄담배를 피우면서. 어느 날, 크라머는 쥐트 다리 아래서 지뷜레라는 아가씨와 소개팅을 하기로 해서 갔는데, 도착해보니 어여쁜 지뷜레는 강간 살인을 당한 상태였다. 경찰에 신고하고 돌아와 누나와 늘 산책하던 개울가에 앉아 있다가 지뷜레의 몸 안에서 나온 정액의 DNA가 크라머와 일치한다고 하여 체포, 영구 냉동 처분을 받는다. 크라머는 누이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유치장 안에서 목을 매 자살해버리고 만다.

  미아 홀은 동생의 죽음과 결백 여부에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그토록 우애가 깊은 남매였으니. 그래 한두 달 정도 운동도 하지 않고 동생처럼 담배를 한 대 피워본 것뿐인데 연기 냄새를 맡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이 불이 난 줄 알고 화재 경보를 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재판을 받고, 이를 항소하는 과정에서 사익대변자(국선변호사) 로젠트레터가 미아의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 크라머의 무죄를 밝히면서 일이 커진다. 커져도 너무 커진다. 이제 미아 홀은 결과적으로 모든 신문 1면을 통해 ‘방법’에 대한 불신을 선언하고, 독일 내의 모든 병들권자들, 즉 병들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동조를 얻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대변자의 위치로 오르게 된다.
  소설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디스토피아 적 SF다. 그러니 스토리의 소개는 여기서 그만두어야 한다. 시대는 종교와 이데올로기와 핵무기가 사라진 21세기 중반. 비록 모든 신과 이데올로기는 없어졌으나 이 머리 좋은 미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역사를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자에게 그가 증오하는 체제의 권력과 명망을 주면 그는 즉시 조용해지고 아주 충성스럽게 나름 뭔가 만든답시고 뚝딱”거려서 “진보에 대한 열망은 한 사회의 자기 과대평가와 개인적인 권세욕의 혼합물"(182쪽)인 것임을 증명하는 한편, 미래의 거대 권력의 우두머리 집단은 놀라운 방법으로 자기들 말고 새로운 신화가 창조되는 것을 막아버린다. 어떻게? 안 알려줌.

  사실은 지금 당신도 보고 듣고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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