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대산세계문학총서 160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마카닌 지음, 안지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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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마카닌이라는 이름은 몇 번 들어 보았다.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는 작가 약력, 위키피디아 내용, 책 뒤편에 달린 연표 등으로 이이의 한 살이를 유추해보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들의 전형적인 생을 보는 듯하다. 소비에트 연방의 남서쪽에 위치한 오렌부르크의 작은 도시 오르스크에서 1937년에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수학과 기계공학을 공부한 후 군사학교 등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1960년대 중후반부터 출판사에 다니며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 소비에트가 조종을 울린 것을 목도한 후 이른바 포스트 소비에티즘 문학의 기수로 이름을 높일 작품들을 여럿 쓰고, 고향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한 로스토프의 크라스니에서 노년 대부분을 지내다, 2017년 그곳에 묻힌 작가. 이렇게 간단하게 평생을 요약하는 건 사실 고인 입장에선 좀 섭섭하리라. 노년에는 매년 올해의 노벨 문학상이 내게 떨어지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다가 번번이 미역국을 마셨으나, <아산>을 읽어보시면 단박에 아시겠지만, 아후, 내공이 보통 아니다. 앞으로도 이 사람의 작품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읽어보기 위해 서슴지 않고 지갑을 열 의향이 있다.
  먼저 ‘아산’에 대하여.
  무대는 21세기 2차 체첸분쟁이 아직 덜 끝난 시점이다. 아직도 완전히 끝난 상태라고 보기 힘든 분쟁지역이긴 하지만. 물론 주인공 알렉산드르 세르게이치 질린 소령이 캅카스 지역으로 파견을 온 것은 1994년 12월에 시작한 1차 체첸분쟁 중이었으며, 주인공의 회상에 의하여 독자는 1996년에 휴대전화 위치정보 서비스를 통해 존재가 발각이 난 초대 체첸공화국 대통령 조하르 두다예프가 미사일의 정밀타격에 당해 아예 존재도 없이 사라지기 전, 두다예프와 만난 기억까지 호출하니 체첸분쟁 전반을 거의 아우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캅카스의 수도 그로즈니에는 러시아 연방국의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고, 그곳에 일찍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엔 용맹을 떨쳤으나 이후 급격하게 전투력을 상실해 이제 사령부 내부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장군’이란 호칭으로 근사한 집무실에 아무 방문객도 없이 노상 책만 읽는 바자노프 장군이라고 있었다. 그래도 장군의 봉급을 받으려면 타이틀이 하나 있어야 하는 법, 이이는 ‘현지인과의 교류 담당관’이란 모호한 직책을 부여받은 바, 이게 딱 장군의 기호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이가 이젠 거의 잊혀버린 체첸 역사와 민속에 관해 누구보다 깊게 공부를 했고, 구전으로 전해온 민족의 우상 가운데 최고의 우상인 ‘아산Asan'을 발견했다. 아쉽게도 장군은 작품 후반에 잘못 계산된 다량의 폭탄테러를 당해 형체도 없이 사라지지만.
  그리스를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파죽지세로 동진을 할 당시 흑해 북쪽 역시 대왕의 검정 말 부케팔로스의 발굽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이 속에 체첸의 선조들도 갖은 곤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 또는 그리스 군대를 피하여 체첸 사람들은 산 속으로 도망해 현재까지 삶을 이어왔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은 이들에게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이런 공포는 세대를 거치면서 막강한 힘, 패배를 모르고 오직 파괴만을 위한 절대적 힘의 상징으로 뇌성벽력과 천둥을 다스리는 신 비슷한 우상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 ‘알렉산드로스’가 수 십 대를 거친 체첸 사람들의 발성기관을 통해 ‘아산’으로 된 것이라고 바자노프 장군은 추론한다.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가장 강력했던 우상으로 두 팔이 달린 거대하고 웅장한 새의 모습을 지녔으며, 이슬람과 달리 혈연에 근거한 복수, 즉 죽은 아비에 대한 복수를 아들에게 하는 것도 용인하던 우상, 신으로, 아직도 체첸 산山 사람의 영혼에 모태에서부터 간직된 불분명하고 희미한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체첸 산 사람들이 우리의 주인공 알렉산드르 세르게이치 질린 소령을 ‘아산 질린 소령’이라고 부르는데, 이름이 알렉산드르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비록 소령이 전투부대 지휘관이 아니라 유류품, 그러니까 휘발유, 경유, 등유, 항공유, 윤활유 등, 하여간 병참 3종을 다루는 부대장이 자신들에게 강력한 힘을 쓸 수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책의 중간 이후에 전투만 했다하면 후퇴할 줄 모르는 막강한 전투력의 알렉산드르 흐보로스티닌 소령이란 작자도 등장해 체첸 사람들이 ‘아산 흐보리 소령’이라 부르는 것도 질린 소령의 경우와 같다.
  그럼 한갓 3종 병참부대장 질린 소령의 파워를 소개한다.
  이이는 정식으로 체첸 반군이건 체첸 농민군이건 간에 전투를 해본 적이 없다. 수송용 장갑 수송차와 일반 트럭, 그리고 몇 대의 지프를 가지고 연료를 수송하는 일을 한다. 휘발유는 전쟁의 피와 같다. 현대전에서 휘발유는 저 옛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애마 부케팔로스가 먹던 건초와 같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 시대의 탈것은 왕이나 장군뿐만 아니라 사병들까지 모든 병력을 실어 나르니까. 화기, 불기와 유난히 친한 유류품을 체첸 반군이 득실거리는 산악지역과 관목지역을 통과해 정확하게 배달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한편 체첸 반군 입장에서도 휘발유가 전쟁의 피인 것은 마찬가지라서 비록 습격을 할지언정 휘발유, 경유, 등유 등을 실은 차는 결코 폭파하지 않는다. 자신이 탈취해 쓰기 위하여. 과거 체첸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기 전 두다예프와의 담백한 논전을 통해 질린 소령은 이 문제를 타개할 방법을 스스로 찾았으니, 체첸 반군과 거래를 하는 거였다. 그들의 약탈을 막으려면 죽는다. 반면에 총을 겨누고 휘발유를 내놓으라는 반군한테 2백 달러, 한 통에, 라고 조건을 제시하면 적어도 돈은 받을 수 있다. 물론 죽지도 않고. 게다가 이슬람을 믿는 용감한 민족 체첸 사람들은 신용이 확실하다. 한 번 빚진 건 반드시 갚는다. 그걸 명예로 아는 사람들이라서.
  그래 질린 소령이 만일 무한대로 군대 기름을 팔아먹는다면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할 것. 소령에겐 변하지 않는 선이 있다. 내 몫은 십분의 일. 일단 이렇게 정해지자 소령은 캅카스의 어떤 병참부대보다 정확하게 보급에 성공하는 능력 있는 지휘관이 되었으며, 러시아 연방군은 물론이고 체첸 반군에게도 막강한 힘과 거래술을 지닌 유명인사로 등극한다. 물론 이런 소령의 모습을 눈꼴시게 바라보는 몇 안 되는 인간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번 돈으로 뭐 하냐고? 분명히 얘기할 것은, 처음엔 자신의 목숨을 도모하고자 유류품을 판매했던 거라는 점. 그러다보니까 저절로 돈이 생긴 것이지 처음부터 축재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라는 것. 하여튼 부정한 돈이 모이고 또 모이자 그는 러시아의 큰 강이기는 하지만 이름이 나지 않은 강가에 적당한 크기의 땅을 사고, 적당한 크기의 집을 짓고 있는 중이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정숙한 아내와 딸과 함께 여유 있는 만년을 보내고 싶은 꿈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맞다. 냉철한 거래와 단칼에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고 공적 비품의 불법 판매를 통한 사익을 취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소령은 한 편으로 센티멘탈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달이 뜨는 저녁이 되면 자기만의 장소인 앞이 탁 트인 벤치에 앉아 아내에게 휴대전화를 해 딸 이야기, 집 짓는 이야기 등 사소한 일상을 시시콜콜 짚어가며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줄도 안다.
  작가 마카닌은 체첸 분쟁을 심할 정도로 비틀어 버린다. 부정과 뒷거래와 의사소통의 부재와 알력과 미치광이들의 싸움과 인질 등, 사실 알고 보면 역사 이래 모든 전쟁에서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부정, 즉 정의가 아닌 일들을, 매우 매우 매우 시니컬하게 보여준다. 그래 러시아에서는 특히 참전 용사들이 마카닌에게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하는데, 세상의 어느 전쟁이 정의로웠던 적이 있었나. 애초에 정의란 없다. 전쟁에서는.
  불과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책은 소위 ‘남성용’이라는 딱지가 붙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이젠 역자마저 안지영, 여자다. 여자가 번역한 군인, 전쟁터 장면, 특히 욕설의 경우엔 남자 역자보다 아직은 맛이 찰지지 못하다. 하지만 상당히 고급한 욕설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긴 한다. 그래 특히 1장의 경우엔 자주 과도하게 욕설의 원 뜻을 노출시켜 오히려 독자를 좀 불편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고비만 넘기면 누구든지 아주 재미있게 6백 쪽이 넘는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다. 독후감을 읽는 당신, 한 번 도전해보심이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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