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이상화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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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이시우李時雨라는 명문가 서방님이 숙녀 김신자 여사와 금슬이 좋아 아들 네 형제를 낳았는데, 첫째가 중국에서 장관급 대우를 받았던 독립투사 상정相定이요, 둘째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탄압을 무릅쓰고 저항의 노래를 그치지 않았던 시인 상화相和요, 셋째가 사학자, 사회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내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까지 지낸 상백相伯이고, 막내가 문필가이자 수렵인으로 이름을 낸 상오相旿였으니 비록 이시우 선생이 네 살 먹은 막내 상오를 남기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 했다 하더라도 아들 농사 하나는 알뜰하게 하고 간 셈이다. 그러나 이 네 형제가 하나같이 고급한 공부를 마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이오, 나아가 해방을 위해 무력투쟁에까지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대구 일대의 큰 부자였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일우 선생은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사숙을 시켰고, 경성 유학을 거쳐 일본 유학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을 정도의 부와 혜안이 있었던 거였다. 심지어 둘째 상화는 더 나아가 프랑스 유학을 바라보고 일본의 대학 대신 아테네 프랑세라는 아카데미에 보냈는데, 그만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꿈을 접고 귀국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단다.
  이상화는 열일곱 살 당시에 벌서 현진건, 백기만 등과 동인지를 만드는 등의 문학 활동을 시작한 바 있고, 스물두 살 때 인 1923년엔 홍사용, 박종화, 박영희, 김기진 등 당대의 쟁쟁한 젊은 시인들과 함께 「백조」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1922년. 3.1운동의 실패를 당한 창백한 인텔리겐치아들이 좌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낭만 또는 퇴폐적인 경향의 시를 발표했을 때로, 일 년 후 발간한 「백조」 3호에 이상화도 <나의 침실로>를 게재하니 같은 동인지에 실린 시의 편편을 보자 하면,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박종화의 <사의 예찬> 등이 있다. 훗날 대하역사소설 <금삼의 피>와 불멸의 <월탄 삼국지>를 쓴 월탄月灘도 처음엔 시로 시작한 것은 다들 아실 터. (<월탄 삼국지>하니까 저 먼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 읽은 삼국지가 바로 <월탄 삼국지>였다.) <나의 침실로>는 인용하기에 많이 길어서 비슷한 경향의 상화의 대표적 퇴폐 시 <말세의 희탄> 전문을 소개한다.



  말세의 희탄



  저녁의 피 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 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전문)


  상화의 시 속에도 당시 창백한 지식인들의 허무의식이 숨어 있고, 또 스물세 살의 청년에게 이런 감각이 유난히 빨리 스며드는 경향이 있다. 「백조」 자체가 동인들이 특정한 문학적 취향이나 정치적 목적을 공유했던 동인지라기보다 훗날 소위 청록파처럼 그냥 얼굴을 알고 지내고 가끔 만나 술잔 깨나 기울이던 ‘자칭 문인’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을 실어 폈던 것이니. 어쨌거나 한 집단, 정확하게 말하자면 식민지 조선에서도 문학이 발전하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승화되지 못한 거친 슬픔이나 죽음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피할 수는 없었을 터, 라고 넘어가면 될 듯하다. 솔직히 살면서 왕년에 이런 종류에 한 번, 물론 잠깐, 몰두해보지 않은 청춘 있으면 두 명만 손들어 보시라.
  도쿄에서 아테네 프랑셰라는 아카데미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 이상화는 다음 해인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다. 세상에나 가장 부르주아 적인 시인 이상화가 카프 발기인이라니. 당시에는 진짜 무산자 가운데 카프에 가입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당대의 천재로 일컫던 이용악 정도밖엔 없었을 것이니까 그것도 그냥 넘어가자. 애초부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희망하는 문학 장르가 그것이라는 말이니까. 이 당시 발표했음 직한 시 한 편을 읽어보자.



  구루마꾼


  ‘날마다 하는 남부끄런 이 짓을
  너희들은 예사롭게 보느냐?‘고
  웃통도 벗은 구루마꾼이
  눌 붉혀 든 얼굴에 땀을 흘리며
  아낙네의 아픔도 가리지 않고
  네거리 위에서 소 흉내를 낸다.  (전문)


  구루마는 요새는 보기 힘든데 양쪽에 고무타이어가 달린 바퀴 두 개가 달린 손수레로, 흔히 이야기하는 손수레보다는 크고, 전에 ‘리어카’로 불렸던 이송수단이다. 시장이나 역에서 사람들의 짐을 날라다 주고 삯을 받는 사람들을 구루마꾼, 나중엔 리어카꾼으로 불렀으며 거의 대부분 빈민으로 알았지만, 흠, 나중에 알고 보니 동대문 시장 리어카꾼은 30여 년 전 화폐가치로 권리금이 1억을 넘었다고 한다. 물론 1920년대엔 틀림없이 빈민이었을 거 같다.
  이렇게 살던 이상화에게 1926년은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된다. 바로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에 발표하고, 이 시 때문에 개벽은 판매금지라는 불벼락을 맞는다. 이 시가 좀 길다. 소싯적에 시에 곡조를 붙인 노래 깨나 목이 터지라고 불렀던 거라,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작이기도 하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갑부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로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전문)



  이 시는 읽을 때마다 참 먹먹하다. 유신시대, 5공 시절에도 막걸리 한 잔에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기도 했다. 하여튼 이상화는 이 일이 있을 후에 본격적인 요시찰 인물이 되고, 다음 해인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테러가 벌어지자 또다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웬만하면 본격적인 룸펜 시대로 접어들어야 하건만, 백부 이일우 씨 일가가 워낙 막강해서 그랬는지 학교에서 교직을 맡기도 하고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서른여섯 살이 되던 1936년, 맏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기 위해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유랑하고 돌아와 다시 한 번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는 등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해방 두 해를 남겨둔 1943년, 위암으로 생을 접는다.
  이렇게 또 한 명의 강직한 저항 시인은 역사 뒤로 사라지고, 해방이 온다. 분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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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12-0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덕분에 까마득한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를 다시 읽게 되었네요. 시인 이상화가 이렇게 강직한 분이셨음을 새삼 다시 느꼈습니다.

Falstaff 2020-12-03 09: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솔직히.... 요새 시의 개별화, 파편화 현상에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어 옛 시를 다시 찾기 시작했답니다. ㅋㅋㅋ 다 인생입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