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조정연구소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5
아흐멧 함디 탄피나르 지음, 박현용 옮김 / 아모르문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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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이름의 작가이지만 터키에선 ‘근대문학의 거장’이라거나 ‘터키문학의 대부’라고 불리는 작가라고 한단다. 탄피나르가 터키의 로컬 작가로만 명성을 유지하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이 그의 수필에서 탄피나르를 “네 명의 외롭고 슬픈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바람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역자의 해설에 적혀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간조정연구소>는 1954년 작품으로 1962년 작가가 죽은 후 출간이 된 장편소설이다.
  아흐멧 함디 탄피나르는 1901년생. 완전한 20세기 사람. 이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터키 공화국 수립 와중의 혼란과 이어지는 독재정치를 온통 다 겪었다는 의미인데, 1962년에 세상을 떴으니 평생 좋은 꼴 한 번 못 보고 이런 와중 속을 살다 간 인물이다. 탄피나르는 다른 지식인, 작가 등과 달리 체제에 대놓고 저항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게 큰 까탈이 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다 투사가 될 필요는 없으니.
  책의 제목이 <시간조정연구소>. 나는 책을 읽기 전에 혹시 오스만 투르크의 위대한 전통과 문화에 입각한 ‘시간개념’ 또는 ‘시간철학’이 소설 속에 담겨 있지 않을까 궁금했고, 한편으론 SF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조금쯤은 기대했지만, 정작 읽어보니 전적으로 이런 내용이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겠으나, 그것보다는 20세기 초중반까지 작게는 터키 사회, 넓게는 당대 문명, 체제, 문화 등에 대한 풍자 또는 희화화라고 읽는 것이 타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내가 지레짐작했던 시간 개념 또는 20세기 초반에 주로 독일어를 상용하는 과학자들이 밝힌 ‘시간도 변한다!’는 새로운 발견에 과도하게 집착했기 때문에 환갑, 진갑이 지난 늙은이 하이리 아르달이 등장해 자신이 쓴 책 <세이흐 아흐멧 자마니와 그의 업적>이란 책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주 조금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읽기를 중도에서 그만 두고 몇 시간을 흘려보낸 다음에야 다시 읽기를 시도했을 정도로.
  ‘세이흐’를 굳이 번역하자면 ‘maestro’ ‘장인’ 정도로 할 수 있다. 아흐멧 자마니로 말할 것 같으면, 17세기 오스만 제국 시절 술탄 메메트 4세 시대의 인물로 세계최초로 시간을 초 단위로 세분한 시간 과학자. 일찍이 그의 어록을 보자 하면,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은 모범을 따라 시계를 만들었다.”라든지, “시계는 인간의 내적 우주와 공존하고 있다.”, “시계와 시간이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적인 역할을 한다.” 비슷한 명언, 명구가 가득하다. 물론 많은 부분이 20세기 초반을 살다 간 걸출한 시계공 누리 에펜디가 평소에 즐겨 쓰던 말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기는 하지만.
  화자이자 주인공 두 명 가운데 한 명인 하이리 아르달은, 숱한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무진장한 거부의 가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재산의 거의 모두를 거덜 냈고, 이어 쥐꼬리만큼 남은 나머지 재산도 아버지가 말짱 말아먹어 이제 성당의 생쥐처럼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다. 어려서부터 읽기와 쓰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나중에 자그마치 18개 언어로 번역되고 비평을 받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세이흐 아흐멧 자마니와 그의 업적>의 저자가 되는 별자리를 타고 났는데, 사실 알고 보면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어 최종학력이 중학교 중퇴에다가, 동네 시계수리공 누리 에펜디의 공방에 놀러가 어깨너머로 시계 만드는 법이나 고치는 기술을 좀 배우려 했지만 손재주와 한 가지 태스크에 집중하는 힘이 천부적으로 부족해 전형적인 아마추어임이 금방 드러났다. 하지만 이이의 관심은 온통 시계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니 이 아니 비극이랄까.
  하이리 아르달은 1914년에 열아홉 살이었다. 당연히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꼬박 4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와, 조국을 위해 싸웠으니 정부가 알아서 잘 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정부는 정부대로 알아서 잘 해줄 대상이 너무 많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는 걸 감수해가며, 별 하는 일 없이 빌빌대다가, 첫 번째 아내 에미네와 결혼을 해서 딸 제흐라와 아들 아흐멧을 낳고, 에미네가 젊어서 죽는 바람에 어린 남매를 어미 없이 키울 수 없어 열여섯 살 어린 두 번째 아내 파키제와 처형, 처제와 새 가족을 이루어 이럭저럭, 사실은 지긋지긋하게 살게 되는데, 하이리가 마흔 너머까지 그의 생활에 공통점이라고는 언제나 가난하다는 거. 그래 이런 가난한 터키 인의 이스탄불 광경이 묘사되던 중에, 언제나 자기 코를 꿰고 있는 질곡, 가족들과 될 수 있는 대로 좀 떨어져 있기 위해 커피하우스 단골이 되고, 몇 년이 지나 아내와 처형, 처제의 드레스를 제외한 집안의 거의 모든 살림과 의복을 팔아먹었을 때 쯤, 혜성같이 등장하는 하이리 필생의 은인 ‘할리트 아야르시’를 만난다. 이이는 하이리가 모종의 유산 비슷한 소송에 휩싸여 원치 않게 끌려간 정신병원에서 터키 최초로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라미즈 박사의 소개로 만나고, 할리트 아야르시는 하이리, 라미즈 박사를 규합해 정부 연구기관인 <시간조정연구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훗날 할리트 아야르시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에 대한 회상록을 쓰기에 이르니 바로 이 작품, <시간조정연구소>가 되겠다.
  졸지에 <시간조정연구소>의 부소장에 등극한 하이리는 연구소 직원의 절반을 자기 친척이나 친지로 채우고, 나머지 절반은 할리트 아야르시의 친척과 친지로 구성하는데, 처음엔 이스탄불 시와 정부로부터 거액의 예산을 받아 운영하다가, 나중에 연구소의 위상이 커지게 되면서 전 국민으로부터 벌금 또는 범칙금을 받아 운영비로 사용하는 수준에 이른다. 어떤 경우에 범칙금을 내야 하느냐 하면,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시계가 구역의 공식 시계와 맞지 않으면 5 쿠르쉬의 범칙금을 물리고, 인근의 또 다른 시계와 안 맞으면 두 배에 해당하는 범칙금을 내야 한다. 물론 이 법령이 국회를 통과했는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자. 근데 어떤 시계라도 정확한 현재 시간을 측정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잖은가. 이리하여 사람들이 좀 북적이는 거리에서 범칙금을 거두면 순식간에 거액을 모을 수 있어서 이것도 약간의 문제가 되긴 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하이리가 예리한 아이디어를 냈으니, 대다수의 시민들로부터 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한 바, 여러 차례 위반했을 경우엔 10~30 퍼센트의 벌금을 할인해 준다는 것. 정말로 난리가 났다. 이스탄불 시에서만 시행했을 때, 정말로 할인이 가능한지 터키의 온갖 다른 도시 사람들이 이 기적 같은 벌금 할인 제도를 체험하기 위해 이스탄불로 몰려오는 바람에 기차 노선을 증편했을 정도이며,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도 혁신적인 범칙금 규정을 실감하기 위해 너도나도 이스탄불 행을 감행해 때 아닌 숙박, 요식업 등의 관광수지가 폭등했다고 주장한다.
  이거 도대체 뭐야? 풍차를 향해 로시난테에게 전속력 돌격을 명하는 돈키호테. 할리트 아야르시에게 키호테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키호테는 둘시네아 공주도 구하지 못하고 풍차 날개에 걷어차여 늙은 몸이 엉망이 되지만, 능력 있고 행운이 따르는 하이리란 이름의 산초 판사를 거느린 할리트 아야르시는 교통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대단한 <시간조정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향유한다. 참 살다가 보니 성공한 돈 키호테도 다 만난다.
  그런데, 벗들이여, 친애하는 이웃들이여. 잘 나가는, 성공한 돈키호테를 우리는 따로 이렇게 부르기도 하는 것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사기꾼.”
  재미있는 작품이다. 20세기 터키를 제대로 한 번 비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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