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시피씨의 결혼 서문문고 178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 서문당 / 197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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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렌마트를 읽기 위해서는, 당신이 선택한 콘텐츠가 소설이든지 희곡이든지를 떠나서, 앞부분에 어떤 내용이 씌어있던 간에 섣불리 사건이 전개될 방향을 추측하면, 곧이어, 아 뜨거, 코가 깨질 터이니 주의하실 것. 표제작 <미시시피 씨의 결혼>과 <로물루스 대제>, 이렇게 두 편이 실려 있는 《미시시피 씨의 결혼》 역시 마찬가지다. 제목만 가지고 결혼, 이라는 단어가 주는 달착지근한 이미지 또는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는 지옥,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여지없이 오산인 것처럼, <로물루스 대제>라고 하면 일단 ‘대제’라고 했으니 늑대의 젖을 먹고 로마를 건국한 최초의 왕을 생각하겠지만 예상 외로 마지막 서로마제국의 황제, 보통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작은 아우구스투스)라 불리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주인공으로 한다.
  두 편 다 뒤렌마트의 독특한 정치관에 입각해 쓴 희곡이고, <로물루스 대제>는 여기에 역사까지 얹어 재미를 더 했다.


  먼저 <미시시피 씨의 결혼>을 보자. 눈치를 보니 1차 세계대전은 확실히 끝나 러시아 땅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자리를 잡았고,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모든 땅의 적화를 꿈꾸고 있는 중이다. 지리적으로는 어디인지 특정하지 않지만 유럽 어떤 나라의 부르주아 집안 응접실이 무대.
  프랑수아라는 이름의 설탕공장 사장이 있다. 프랑수아는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의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해 누가 보더라도 매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모범 가장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만 그렇다는 것이고, 알고 보면 겁도 없이 매년 250 명 이상의 형사범들에게 교수형을 구형하고 판결까지 받아내는 능력 있는 검사의 아내 마드레느와 열렬히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거다. 하여튼 바람피우는 남녀들 보면 대단하다. 난 하나 가지고도 힘들어 죽겠는데 둘 이상을 동시에, 그리고 일관된 거짓말을 평생 계속해야 하는 고난을 어떻게 이어가느냐고. 하여튼 길면 꼬리를 밟힌다는 만고의 진리에 따라 프랑수아 사장은 아나스타샤에게, 마드레느는 검사 남편 미시시피 씨에게 그만 증거를 남겼고, 이에 확신을 갖게 된 아나스타샤는, 젊은 시절부터 연인이었지만 여차저차 해서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의사이자 차베른체 백작이기도 한 보도 폰 위벨로에 선생으로부터 각설탕 비슷하게 생긴 독약 두 정을 얻어 프랑수아의 커피 잔에 진짜 각설탕 두 개와 함께 빠뜨려버리는 데 성공한다.
  대개 독약을 먹고 죽으면 눈으로 금방 알아챌 수 있건만, 당대 최고의 의사인 위벨로에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제공한 독약이라 육안으로는 도무지 알아챌 도리가 없었을 뿐더러, 이제 과부가 된 아나스타샤 역시 부검을 원하지 않아 그냥 ‘심장마비’라는 사인으로 장사지내고 성당의 묘역에 안치를 해버렸다. 그럼 이제 아나스타샤는 당연히 아직 미혼으로 남아 있으며, 거대한 성을 세 개 보유하고 병원까지 자기 소유로 가지고 있는 위벨로에 선생과 결혼 아니면 적어도 동거의 수순으로 넘어가야 하는 터이지만, 소심한 의사 선생은 일이 발각되어 행여나 콩밥 신세 또는 교수형, 아니면 단두대로 행진해야 할지도 모르는 공포감을 이기지 못해 보르네오 섬으로 가서 여생을 밀림 속 병원을 운영하기로 결심해 떠났다.
  아나스타샤가 남편 장사지내고 몇 주 후 뛰어난 검사인 미시시피 씨가 과부를 찾아옴으로 해서 이야기는 본 괘도에 오르는 바, 알고 보니 미시시피 씨의 아내 마드레느도 우연히 연인사이였던 프랑수아 사장과 같은 병명인 ‘심장마비’로 급사해 장사를 지냈던 거다. 그것도 똑같이 커피 한 잔을 마신 다음에. 알고 보니 미시시피 씨 역시 위벨로에 선생으로부터 받은 흰색의 각설탕 비슷하게 생긴 독약으로 십계명에 의거하여 직접 자기 손으로 아내 마드레느를 처형한 것이고, 이제 살인범이 된 자신과 아나스타샤를 처벌하기 위한 방편으로 둘이 결혼해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을 전하려고 온 것.
  어떠셔? 골 아프지? 그래서 뒤렌마트를 읽기 위해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작가가 이야기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작가가 기대한대로 놀래주어야 한다니까. 물론 위에 써 놓은 내용이 희곡의 전부가 아니다. 아직 미시시피 씨의 진정한 정체나, 첫 장면에 등장해 총 맞아 죽은 상태에서 객석을 향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생 클로드라는 작자에 대해서도 찍소리 안 했으니까.
  어쨌든 이렇게 미시시피 씨와 아나스타샤가 결혼하는 것으로 겨우 1막이 끝난다.


  <로물루스 대제>는 실제로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는지는 알려진 바 없고 다만 재위기간이 475년부터 1년에 불과해, 그가 한 일이라고는 고려의 공양왕이나 조선의 고종 말기처럼 그냥 나라를 들어 바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지 않을까 싶다. 근데 아무리 이런 캐릭터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이이의 재위 말기 행적을 뒤렌마트가 변주해 놓으면 극적으로 바뀌는데, 대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겨우 1년 황위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한 일 없는 로물루스조차도 약 천 년에 걸친 로마의 피에 물든 역사를 스스로 마감시킨 현자 비슷한 모습으로 바뀐다.
  서로마제국은 훈족의 왕 아틸라가 침공했을 때인 450년대 중반에 사실상 완전히 거덜이 났다. 아틸라가 로마의 턱밑에까지 짓쳐 들어갔을 당시 로마 황실에선 작은댁이 낳은 황제의 딸을 아틸라에게 첩으로 상납을 했으며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 눈이 돈 훈족의 왕이 얼마나 공주를 못살게 굴었는지 오히려 자신이 골병이 들어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하직한 바 있다. 아틸라가 죽어 눈물을 머금고 물러가는 훈족을 쫓아 살육전을 벌이던 장군이 오레스테스인데 그의 아들이 바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이 희곡의 주인공이다.
  뒤렌마트가 그리는 로물루스는 다분히 철학자연 하는 심지 깊은 인물로 젊어서는 책읽기와 예술에 몰두했고 나이 들고는 유럽 각지, 갈리아와 게르만 등 북쪽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등 각지에서 수입해 들여온 닭을 키우는 양계에 유일한 취미를 둔 인물로 희화했으나, 극이 진행되면서 차츰 인간살이, 정치, 흥망성쇠에 관해 달통한 현자로 변모한다.
  멸망하는 왕조에서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게르만 인들에게 변변하게 대항하려 하지 않는 황제에 대한 시해 음모가 벌어지는 것도 로물루스는 당연하게 생각해 태연히 시해주동자들과 마주하여 그들의 의견에 맞장구도 쳐가며 고이 게르만 인들에 의한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쳐들어온 게르만 족의 왕 오도아케르 역시 로물루스에 비견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으로 각색한바)이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역사와 인생이 흘러가는 것에 순응한다는 내용인데, 내가 여태 헛갈리는 건, 위키백과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생몰연대가 460~511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의 재위 초년인 475에 겨우 열다섯 살. 근데 결혼 적령에 이른 딸이 있고, 그의 약혼자 에밀리안이 5년 전에 전쟁하러 떠나서 게르만 족의 포로가 됐다? 흠. 아무리 뒤렌마트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사실을 비틀 수 있었을까? 경우는 둘 중의 하나겠지. 첫 번째는 그럴 수 있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위키피디아를 어떻게 믿느냐 반문할 수 있다는 것. 나도 그래 저 앞에서 로물루스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 건데, 암만해도 뒤렌마트가 좀 오버한 거 같긴 하다. 로물루스의 별명이 소년황제였으니. 십대 소년을 이렇게 매력적이고 인생과 권력과 역사에 통달한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만든 뒤렌마트. 이 사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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