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의 꿈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네 번째 읽은 ABC(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책. 카사레스는 스스로 ABC를 써서 서명한다. 그동안 읽은 책이 차례로 <모렐의 발명>, 단편집 두 권 《러시아 인형》과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모렐의 발명>도 해설까지 합해 187쪽에 불과해 장편이라고 하기는 좀 머쓱한 측면이 있는데, ABC하고 친구로 지냈던 보르헤스까지 합해 봐도, 이런 장르, 나는 이런 종류의 작품을 “아몰랑 주의”라고 하는 바, 아몰랑 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이 책처럼 작가 서문과 본문까지 근 400쪽에 이르는 긴 글을 쓸 수 있을 수 있을지도, 그걸 또 내가 읽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 <모렐의 발명>도 그렇고 단편 작품들도 그렇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관계로, 이 책을 사기로 결정한 것도 나름대로 결심을 하고, ABC하고 좀 친해질 수 있으려나, 기대를 담았던 것인데, 다행스럽다. 어느 정도 화해를 한 거 같다. 흠. 이 말을 더 쉽게 하면, 여태까지 읽은 ABC보다 훨씬 이해하기 수월했다는 뜻도 될까? 아마 그럴 거다.
  ABC라면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멕시코의 룰포, 쿠바의 카르펜티에르(!)와 더불어 두 번 이야기하면 입 아픈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붐 문학의 선구자. 그리하여 ABC 개인에 관한 건 그냥 넘어가고 곧바로 책 이야기를 하자.
  짧은 장편 <모렐의 발명>과 단편들을 읽으면서 웬만큼 난감했던 건, 작품이 짧다보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더 압축해야 했을 터이고,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암호풀이에 더 골몰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엔 호흡을 길게 하니까 거의 끝부분에 가서 작가 스스로 마술적인 광경을 시작한다고 엄포를 놓을 때도 앞에서 뿌려놓은 이삭들을 잘 주워 모았다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충분히 포착할 수 있을 법하다. 문제의 마술적 광경에 관한 엄포 바로 이전에 가볍게, “시간은 한 번 지나가는 것”이란 요지로 이야기하지만, 그리하여 독자는 분명히 지금 한 이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만 한다면, 이후 전개되는 소설의 절정을 별로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다. 그렇다. 즐길 수 있다. 물론 오르가슴 적 카타르시스까지는 안 된다. 그래도 ABC를 읽으면서 애초에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터.
  때는 1927년. 사흘 낮, 사흘 밤에 걸친 카니발이 벌어지는 시기. 주인공인 21세 청년 에밀리오 가우나. 장소는 ‘좋은 환경’이란 뜻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아우르키사. 에밀리오 가우나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있는데 이발사 마산토니오가 경마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경마에 ‘별똥별’이란 망아지가 굉장히 유력하다고 하도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수중에 있던 35페소를 걸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로 별똥별이 별똥별 떨어지는 속도로 달려주는 바람에 35페소를 던져 1,068페소 30센타보를 벌게 된다. 여기서 68페소 30센타보는 이발사에게 팁 또는 사례금으로 주고 주머니에 1천 페소를 넣은 가우나.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친구들하고 카니발에 가서 몽땅 써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다섯 명의 친구들. 라르센은 선한 마음으로 가우나와 진실한 우정을 쌓는 인물이고 이런 성향은 책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 소위 영웅들은 발레르가 박사라는 사람을 마치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쳐있는 똘마니에 불과하다는 것이 책을 읽어가면서 드러나지만, 이렇게 힌트를 주는 것도 작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발레르가 박사라는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가우나가 꿈꾸었던 이상적이지만 결코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던 미래를 구현해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 가우나 역시 이들 멤버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래 이들 그룹은 ‘발레르가 박사와 여섯 명의 청년들’로 구성된다.
  이들의 아지트는 바야우르키사의 카페 ‘플라텐세’. 친구들이 모여 가우나의 천 페소 탕진 계획을 듣고 하는 말 좀 보자.
  마이다나 : 기차역에 신문, 잡지 파는 가판대가 마침 매물로 나왔으니 사서 운영을 해라. 비록 다 허물어진 기차역이라 사람도 별로 없지만.
  페고라로 : 북쪽 지역으로 가서 전화 한 대만 놓으면 되니까 사무실을 내고 직업소개소를 차려라.
  안투네스 : 자기 아버지한테 빌려주면 한 달에 네 배, 즉 4천 페소로 불려줄 것이다.
  이렇게 우왕좌왕 하다가 결론으로 발레르가 박사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하니, 박사 왈, 카니발에 가서 몽땅 써버리는 것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노름으로 번 돈은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조언을 해 그렇게 결정을 해버린다.
  그래 당장 내일 카니발이 시작되니까, 오늘 밤에 벌써 불 끄고 잠든 우리의 대머리 이발사, 별똥별을 소개해준 마산토니오를 두드려 깨워 친구들과 함께 밤기차를 타고 비야데보토로 향한다. 여기에 빠진 딱 한 명의 친구, 라르센. 만일 주인공 가우나에 모종의 위험이 가까이 온다면 기꺼이 그를 위해 도와줄 수 있는 친구는 카니발 행을 포기했고, 나머지만 해적 차림을 하고 행진하는 가장행렬에 합세해 클럽, 카페 등을 전전하며 술독에 빠진다. 물론 비용 전부는 가우나의 천 페소로 지불하고. 이들이 먹고 마시고 처음 만난 여자들에게 술을 사주고 하는 것을 보니 192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천 페소가 지금 우리 돈으로 천만 원 이상 가는 것 같다.
  술 잘 마시고 이곳저곳에서 잘 놀았던 것 같은데 이발사 마산토니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얼른,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자고 다음 날 가면 아내에게 큰 경을 치게 될 거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대열에서 사라져버린다. 하여간 이들은 카페, 거의 카바레 수준의 카페 ‘아르메논빌’에 입장해 가면무도에 참석하는데, 결정적으로 가우나의 눈에 띄는 포대 같은 옷을 입은 가면 쓴 아가씨. 그는 아가씨한테 접근해 춤을 추다가 당시 가끔 그렇게 했듯이 음악의 절반쯤 지난 후 다른 남자에게 파트너를 인계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끝난 후 그녀를 찾아 카페를 뒤지다가 잔뜩 술이 취한 상태에서 술값을 내고 밖으로 나갔고, 눈을 떠 깨질 것 같이 아픈 머리통을 흔들어보니 벙어리 남자와 세탁부인 듯한 여자가 자신을 보살피고 있었단다. 이 벙어리는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건장한 체격으로 5부 리그 축구팀의 관리인으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가우나는 밤 동안 벌어진 일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이 사육제의 마지막 날 밤, 우리의 에밀리오 가우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우나는 사육제가 끝나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야우르키사에 돌아와 직장인 람브루스키나 정비소에 다니며 현명한 마법사 타보아다에게 점을 봐, “운명은 강물처럼 미래로 흘러가지. 미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야. 거기서 자네는 지난주에 죽었고, 거기서 영원히 살고 있네. 거기서 자네는 이성적인 인간이 되었고 또한 발레르가가 되었네.”라는 희한한 말도 듣는다. 가우나를 비유하자면 이카타에 돌아온 율리시스나 황금사과를 떠올리는 이아손처럼 무언가 늘 그리워하며 상실감으로 가득한 인간이라나? 이게 무슨 뜻일까. 당연히 가우나도 물어본다. 그러나 현명한 마법사는, 예언할 수 있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복채 5페소를 요구하고 입을 다문다. 그래도 가우나는 마법사의 집에서 이 어리둥절한 말 외에도 얻은 것이 있으니, 마법사의 딸 클라라. 둘이 사랑하게 되느냐고? 물론이지. 달빛이 교교한 새해 첫날, 남반구니까 한여름 밤, 나신으로 강물에 몸을 담고 사랑을 나눈 후 결혼까지 하는데 뭘.
  거의 짐작은 하시겠지. 이 작품의 결말은 가우나의 잃어버린 사흘째 되는 밤을 찾은 일이라는 것을. ABC의 작품으로는 쉽게 읽을 만하다. 근데 ABC의 작품은 쉽게 권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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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9-1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모렐의 발명>을 갖고 있는데 몇번 들었다 놓았다 하다 아직 안 읽은 책들 중 한권이지요. 쉽게 권하는게 아니라고 하시니 읽어봐야겠습니다 (청개구리).
리뷰 올리실때 늘 줄거리 요약을 빼놓지 않으시니 대단하십니다. 워낙 집중해서 빨리 읽으시고 바로 리뷰 올리시니 가능한가요? 전 리뷰 쓸때 쯤이면 중간 중간 내용이 벌써 머리속을 빠져나간 경우가 많던데 말입니다.

Falstaff 2020-09-11 12:26   좋아요 0 | URL
<모렐의 발명>이 ABC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책이라더군요. 몽환 자쳅니다. 말이 필요없고 그냥 읽어보시면 ㅋㅋㅋㅋㅋ.
책 읽으면서 주요 내용은 조금씩 메모를 해 둡니다. 나중에 독후감 쓸 때 크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제가 기억력이 꽝이라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쓸 자신이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