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2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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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우리나라 거의 최초의 동화작가 마해송, 어머니는 마산고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한 무용가 박외선. 1939년 도쿄 태생. 시를 읽어보면 어쨌든 전쟁 이전부터 한국에 와서 살다가 전쟁도 겪고 서울고등학교와 세브란스 의학교와 서울의대 대학원을 마치고 공군 의무관으로 입대한다. 그러다가 1965년, 공군 장교임에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 모처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66년에 제대한다. 이러니 내 나라에 정이 있겠는가. 제대하고 얼마 있지 않아 미국 오하이오로 가서 의사생활을 하는 한편 활발하게 시를 써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다른 시리즈도 아니고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두 번째 자리를 얻는다. 이이는 본인이 의사로 미국에 가서 의사를 지냈고, 한 살 아래 소설가 박상륭은 1969년 캐나다로 건너가 병원 안치실의 청소부를 했다. 둘의 공통점은, 박정희 정권하고는 같은 하늘을 이고 지내기 힘들어 했다는 것. 대표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는 것. 병원에서 근무했다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은, 만일 당신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세대라면 권하지 않겠다. 2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1975년 말부터 1980년 중순까지 약 4년간의 작품이며, 2부는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펴낸 《평균율 1》(1968)과 《평균율 2》(1972)를 중심으로 실었다. 특히 2부를 열면 많은 시어들이 한문으로 씌어 있다. 당시엔 독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보다 정확한 뜻을 알리기 위하여 흔히 한문으로 쓰고는 해서 오히려 이런 표현이 당연했겠지만 요즘 세대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해독 불가능의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 독후감에서는 그런 분들을 위해 한자를 전부 우리말로 바꿔 옮기려 한다. 원문과 달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마종기는 세브란스 재학 중에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다. 혜산은 또한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을 하니, 정지용-박두진-마종기, 한국 서정시의 큰 줄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그러나 마종기는 모더니즘적 애매함과 개인적 사유에 함몰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래이되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공통의 감정을, ①자신의 직업인 의료업, 그리고 ②지리적으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의 생활이란 두 가닥의 주된 줄기에서,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의 말대로 쉬운 언어를 사용해 그리고 있다. 사실 말이 직업은 의사요, 사는 곳은 미국이라, 이지 의사라는 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깊은 성찰을 해야 하며,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시인에게 언제나 아스라한 그리움을 갖게 만드는 지리적으로 적대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증례 2>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옆집 브레이셔 할머니는 여름밤 등의자에 앉아 미국이민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뉴욕시의 교육으로 아직 안경 속에 온정이 있어도 보이는 쓸쓸한 발음, 자식은 성공을 해 옆에 없고 혼자 사는 2층방에 빛나는 과거의 사진틀.


  병원에서 위독을 알려도 그랬지. 색감 있는 카드와 항공편 꽃다발이 석양에 밝아도 방문객 없는 할머니 ㅡ 당신은 외국의사의 내 환자. 대국의 외로움은 내 눈에 보인다. 차가운 철판부검대에서 골(骨:뼈)을 자르고 얼굴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뜯어내어도, 조용하게 입 다문 당신의 외로움, 내 눈에 보인다.


  (중략)


  사람이여, 그리웁고 사랑스런 사람이여. 망자의 사지에 힘주던 핏물로써 네 몸을 이제 기억할 수는 없다. 어느날 우리의 복강에서도 이름모를 산꽃이 피고 변형된 생애가 다시 자라면, 그때 이 현세의 산란한 바람을 다스려 우리는 서로 보리라. 산골짜기 냇물 속에서 만나리라, 사람이여.  (띄어쓰기와 오기는 전부 원시를 따랐습니다. 이하 인용도 마찬가지.)



  위의 인용을 보면 미국에서 의사의 직업을 하며 평소 알던 다른 나라 출신의 할머니가 죽어, 할머니를 해부하고, 삶과 죽음이 우화의 세계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종기의 시는 어렵지 않다. 마지막 연 ‘우리는 서로 보리라’ 하는 것에서 과연 이들은 어디서 보게 되기를 기대할까. ‘산골짜기 냇물 속에서 만나리라’를 미국의 어느 곳이라고 읽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라 믿는다. 만나고자 하는 대상이 뉴욕에 살던 브레이셔 할머니일지언정 시인이자 의사와 할머니가 만나는 곳은 극동 아시아의 작은 산골짜기가 아닌가 싶다.
  <미스터 제임스 밀러에게> 라는 시에서는, 한국의 영등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제임스 밀러, 혹은 한국에 대한 일정한 시각을 갖고 있는 미국인들을 대표해서 소환한 제임스 밀러를 향해 시인은 쓰게 얘기한다.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네 묘한 조소로 끝나 버리는
  영등포가 아니다.
  영자도 순자도 봉순이도 있겠지만
  맘마상 어쩌구로 끝나 버리는
  영등포는 아니다.


  피난을 가서 장바닥을 싸돌고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워 보면 안다.
  토마토가 고기덩어리가 휴지 조각이 함께
  부글부글 오장이 끓던 꿀꿀이죽,
  그 맛을 음미해 봐서 안다.
 
  (중략)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명랑한 가발 공장도 섰겠고
  입체교차로가 드라이브에 좋다지만
  내 군대 3년의 영등포에는
  막걸리와 한기만이 있었다.


  (중략)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고국을 떠난 지 벌써 수 년,
  모든 미스터 제임스 밀러여
  내 상기되고 떨리는 목소리는
  스무살의 네 혈기 앞에서 중심을 잃는다.



  마종기가 공군 의무장교로 있던 시절의 근무지가 영등포였단다. 당시에 영등포 역전 주변은 서울에서 유명한 사창가 가운데 한 곳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의사선생으로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아는 어떤 미국인 제임스 밀러가 우연히 한국을 알고, 영등포를 안다고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개발도상국도 되지 못했던 후진국을 고국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위의 중략부분에 있다시피) “초조와 열등감이 빗물처럼 산발하고 / 공연한 내 정신의 무질서를 밤마다 토하”던 곳, “그리고는 창피해서 골방의 이불을 덮던 / 우리들의 참으로 희귀하고 진하던 청춘”의 기억까지 서성거리게 되는 것 아닐까.
  마종기가 고문을 당하던 1965년이 지나고 66년이 되면 아버지 마해송이 별세한다. 부친과 가까웠던지 시인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를 많이 남겼던 것 같다. 이 시집에서도 몇 편을 볼 수 있는데, 부모 이야기를 하면서 누선을 자극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유독 이 시의 전문을 소개하면서 독후감을 마치고자 하는 것은, ‘마종기’라는 시인의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리 쉬운 단어들만 모아, 쉬운 글을 쓰면서도 공감을 하게 만드는지, 혀를 차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부친을 닮아 동시를 쓴 듯한 기분, 그러면서도 시인의 의사 직업과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도 잘 보여준다.



  선종 이후 · 4  (善終 以後)



  가끔 당신을 만나요.
  먼 나라 낯선 도시에
  나는 지금 살지만
  나를 찾아온 환자 중에서도
  비슷한 윤곽, 안경과 대머리
  당신은 미소하시겠지만
  나는 말없이 반가와서 속으로 울어요.


  가끔 당신을 만나요.
  외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고
  가끔 당신의 살이 더 희어지고
  눈이 파래지더라도
  당신이 환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사이로
  대견하게 나를 보시는 마음을 알아요.


  고통을 끝없이 보는 고통을 아시나요.
  두려움을 지키는 두려움의 계속
  내가 그 안에서 향방 잃은 표정이 되면
  어느 여가에 여기까지 오셔요.
  창밖에서 빗속으로 불러 주시는
  한밤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 들어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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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7-3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를 정말 전혀 모릅니다. 근데 이 글을 읽으며 머리가죽이 조여오는 건 왜일까요... 쉬운 단어로 쓴 시라는 폴스타프님의 말씀에 저도 마종기님의 시집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시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 안 읽고 가끔 폴스타프님 시집 리뷰 보는걸로 감동받곤 했었거든요.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07-31 12:57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셨다니 기쁩니다.
저도 아주 한정된 시만 좋아할 뿐입니다. 요새 시는, 제 생각에, 과하게 시인 개인의 사유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 같아서 다시 우리나라 근대시를 읽기 시작한 건데, 독후감 읽기에도 좋으셨다니 기분이 좋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