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이석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베시 헤드가 쓴 <권력의 문제>를 읽고 이이의 작품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193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생인데, 1930년대에 백인 어머니와 당시엔 사람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흑인 아버지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니 이이의 앞에 남은 구만리 같은 한 생애가 녹록하지 않으리라는 건 처음부터 알아봤다. 아프리카 남쪽의 흑백 혼혈을 ‘컬러드colored’라고 칭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백인 아버지가 노예와 비슷한 흑인 하녀와 관계해서 낳은 자식이었으며 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경영하는 상점의 점원노릇을 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를 포함해 세상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베시 헤드처럼 거꾸로인 경우엔, 흑인 남자는 백인들에 의하여 무참한 린치를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들었다. 이이의 경우엔 어머니가 신경증 증세가 심해 아이를 낳자마자 정신병원으로 보냈고, 아이는 가톨릭을 믿는 혼혈 유색인 부부에게 입양을 시킨 후, 그래도 혈육이라고 외할머니가 열네 살이 되는 해에 법원에 데려가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의 사생아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정치활동을 하기도 하고 유명 예술가에게 성폭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쉽지 않은 시절을 살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보츠와나로 주거지를 옮기고 그곳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잠깐 했다. 그때 학교 교장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갈등을 겪은 내용을 고스란히 <권력의 문제>에서 증언하면서 남녀 간 권력의 문제를 통해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로 자리를 굳힌다. 이번에 읽은 <마루>의 경우도 극명하게 권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남자에 의한 여성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피부색의 농도와, 같은 농도의 피부색일지라도 종족에 따른 권력의 유무에서 발생하는 차별에 천착한다. 이 작품은 베시 헤드가 망명한 보츠와나의 세로웨에 정착해서 쓴 <비구름이 모일 때>, <마루>, <권력의 문제>, 그의 소설 삼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권력의 문제>보다 쉬운 문장과 구조인데다 적은 분량으로 되어 있어 무거운 주제일망정 금방 읽을 수 있다.
  유난히 비뚤어진 정신세계 때문에 지구상 어디에서나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종이 있다. 바로 백인들이다. 그들은 백인종이 아닌 다른 모든 인종의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습관이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이 되어 이제 자신들의 가치체계마저 세계에서 유일하게 옳은 것으로 판정하려고 한다. 이들은 일찍이 동양인에게 저급하고 더러운 족속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해 경멸했으나, 동양인들은 아프리카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잘 읽어야 한다.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을 칭하는 말이다. 백인들은 이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도 저급하고 더러운 족속이라고 경멸했지만, 이들은 또 적어도 부시먼이 아니어서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단다. 부시먼을 비슷하게 비교하자면 인도가 수천 년 전통이라 자랑스레 내세우는 카스트 제도에서 제일 천한 불가촉천민 계급인 수드라 정도로 이해하면 될지 모르겠다. 같은 아프리카에서 사는 흑인이라도 부시먼이 나타나면 노예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거나, 마치 나병 환자처럼 옷자락에 종(대신 빈 깡통)을 달고 다니게 하거나,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로 얼굴에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거나, 바로 앞에서 ‘더러운 부시먼’을 외치면서 온몸을 흔들며 모욕적인 춤을 추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가 들어와 곳곳에 학교, 병원, 교회가 들어섰고, 대개의 경우 선교사는 교회를 책임지며, 선교사의 아내는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보통이었나 보다. 책에서도 날 때부터 바보 천치 비슷한 수준의 덜 떨어진 선교사가 매우 진취적이라서 딱 그만큼 다른 인종에게 가혹하기도 한 덩치 큰 아내 마거릿 캐드모어 여사와 함께 아프리카에 들어와 교회와 학교를 운영하다가, 선교사가 먼저 그리운 주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이제 과부가 된 교장선생님은 성질이 급하고, 성마르고, 신경질적인 반면 늘 원기왕성하게 힘든 일을 척척 해치우면서도 뛰어난 유머 감각까지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마거릿 캐드모어 여사는 유럽 백인스럽게 과학적 사고방식에 입각해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애를 쓰며, 인간은 유전적 형질보다는 양육되는 환경에 따라 앞날이 정해진다는 굳센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아프리카까지 와서 은퇴하는 나이가 되도록 학교 선생을 하고 있지.
  흑인 동네를 간신히 벗어난 관목지대에 부시먼, 마사르와 족 여인이 땅바닥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이미 죽은 시신일지라도 절대로 마사르와의 몸에 손을 대기 싫은 주민들은, 신기하게도 고귀한 백인들이 더러운 부시먼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주는 것을 기억해내고 냅다 교회로 달려가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래 현장에 도착한 마거릿 캐드모어 여사. 여사가 시신을 보니 영양실조로 바싹 마른 두 다리에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어 굳은살이 박인 발을 한 누더기 여인. 이미 죽은 불쌍한 시신에게 무차별적으로 증오를 쏟아 붓고 있는 운 좋은 자들의 시선과 욕설을 모른 척하고 일단 병원의 안치실에 시신을 보관한 다음 장례를 위해 간호사들에게 시신을 닦으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나 간호사들이 부시먼의 시신에 손을 대? 천만의 말씀. 기어이 여사에게 한 바탕 엄한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대강대강,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가 아닌 시멘트 바닥 위에서 처리를 해버리는 수준이다. 하여간 매장을 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죽은 자의 딸을 시설에 넘기려다가 갑자기 반짝, 전에 유전보다는 환경이 우선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직접 실험해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맡아 정식 교육을 시켜가며 기르기로 결심을 한다.
  가히 신과 같은 백인이 키우는 아이더러 누가 감히 드러내놓고 부시먼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아무도 아이를 보고 더러운 혈족이라느니 덜 떨어지고 미천한 족속이라느니, 개새끼라고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어서, 세월이 조금 지난 후 미션스쿨에 입학해 학급의 절반이 무척 화가 나 있는 상태이며 간혹 다른 아이가 “부시먼 주제에!”라고 시건방을 떨어도, 보츠와나의 가장 큰 종족인 바츠와나 족이 부시먼을 노예나 개 취급을 할 때를 빼고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를 데려온 후 17년이 지나 캐드모어 선생은 제자들 가운데 특출한 학생을 발견하는 기적을 만난다. 바로 자기가 주워와 키운 소녀. 그러나 몰랐을 것이다. 소녀 마거릿은 학교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집안의 다른 흑인들 속에서 거의 완전하게 소외를 당하는 것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 소외에서 비롯한 소통의 결여를 책을 읽는 방법으로 해소하고자 했다는 것을.
  그러나 기적을 발견한 캐드모어 여사는 그 해에 바로 은퇴할 나이가 되어 열일곱 살의 마거릿에게 50 파운드를 주고 영국으로 떠나버리고, 마거릿은 여사가 기분 좋을 때 쏟아놓고는 했던 농담과 웃음, 재미와 기상천외, 그리고 무엇보다 보장되어 있을 것 같던 약동하는 행복이 여사의 귀국과 동시에 상황이 종료되고 만다. 캐드모어 여사가 마거릿에게 남긴 것은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을 정도의 학력과 50 파운드의 돈, 그리고 교훈 몇 가지. 입술연지는 바르지 말고 눈 화장은 해도 좋다. 너는 눈동자가 예쁘니까. 겨드랑이 털은 정기적으로 밀고 향기 나는 분을 칠해라, 같은 것들. 그리고 달포 후 여사로부터 엽서가 한 장 도착한다.
  “네 종족을 위해 어쩔 수 없었을 뿐, 너를 남겨둔 채 그곳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단다.”
  백인들이 다 그렇지 뭐. 마거릿이 알다시피 캐드모어 여사는 부자였을 뿐 선한 사람은 아니었다.
  넉 달 뒤, 마침 사범학교를 졸업한 마거릿 캐드모어 주니어는 ‘딜레페’라는 이름의 외딴 오지마을의 학교로 첫 교사직 발령을 받아 마치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 들면서 이제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어떻게 얽히고설켜 딜레페의 사실상 대족장인 작품의 주인공 마루와 연결이 되는지, 연결이 되기는 하지만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붐소설에서 보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핵심인물인 젊고 유능하고 신과 같은 왕이 되고자 하는 마루와 무사하게 사랑하는 사이가 될지 말지는,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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