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존 스타인벡 지음, 이진.이성은 옮김, 김욱동 해설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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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처럼 출판사 ‘비채’는 스타인벡의 초기 중편소설 <붉은 망아지>와 그가 쓴 최후의 소설인 <불만의 겨울>을 담아 본문만 613쪽에 이르는 바람직하게 두꺼운 책을 만들었다. ‘바람직한’이란 찬사를 붙이는 이유는 두 작품 다 매력적이라 책 한 권을 읽으며 상당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옴니버스처럼 배열되어 있으나 에피소드들이 절박하게 엮여 있지는 않은 <붉은 망아지>는 로키산맥 동쪽 옛 밀림지역을 개간하여 농장으로 만든 칼 티플린 씨 소유의 농장을 배경으로 주로 그의 아들 조디의 눈으로 바라본 것들을 그리고 있다. 세 식구와 말에 관해서 근동의 누구보다 아는 것이 많은 일꾼 빌리 벅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네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편에는 아버지와 빌리 벅이 늙은 젖소들을 푸줏간에 팔러 읍내에 나가 붉은 색의 망아지를 사와 조디가 이 망아지, 가빌란을 직접 키우는 이야기다.
  자신만의 말이 생긴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가. 평소에 말수가 적은 아이에 불과했던 조디는 망아지 가빌란을 소유함에 따라 단박에 기적적으로 신분이 상승했으니, 유사 이래 언제나 걷는 사람보다 말 탄 사람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우월한 법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망아지에 관한 에피소드는 3편에서 암말 넬리가 발정을 하여 테일러 씨에게 5달러를 주고 종마 선도그와 교배를 한 후 망아지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와 서로 연결이 된다. 물론 두 편 다 지은이가 스타인벡이니 행복한 결말은 기대하기가 쉽지 않지만.
  2편에서는 예전 이웃 농장에서 어도비 벽돌집을 짓고 살던 지타노 씨가 청바지와 청재킷을 입은 가냘픈 체구의 노인이 되어 돌아와 티플린 부인에게, ‘고된 일은 못합니다, 세뇨라. 하지만 소젖을 짜고 닭 모이를 주고 장작은 팰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못합니다.“라고 고용을 부탁하지만 농장에서는 더 이상의 인부가 필요 없어 오늘 저녁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할 터이니 내일 아침에는 가 주시라는 당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노인의 문제는 4편에서 이제 조디의 외할아버지가 몇 주 다니러 오는 일과 연결이 되는데,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개척민들을 이끌고 서쪽에서 태평양을 만날 때까지 이주민을 인솔해 온 대장이었으며, 당시에 경험한 포장마차의 행렬과 인디언들 이야기를 쉼 없이 되풀이하는 노인이다. 그의 시절이 이미 끝났음에도, 벌써 오래 전에 끝났음을 스스로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에 남아 있는 노인들.
  <분노의 포도>, <의심스러운 싸움>, <에덴의 동쪽>을 쓴 작가의 초기 작품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시절을 지내고 있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이랄 수도 있는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 재미있다. 이 작품이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추천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읽어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을 정도다. 오바마의 소설 취향이 믿을 만한지 여부와 관계 없이 말이다.


  스타인벡의 마지막 소설 <불만의 겨울>은 상당히 그럴 듯하다. 여태까지 내가 읽은 스타인벡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불황기에 주로 중서부 지방의 소시민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작품들과 스타인벡 자신의 이야기임에 거의 분명한 성장소설이었다. 그러나 <불만의 겨울>은 무대부터 미국의 중서부가 아니고 동쪽이다. 차가 막혀도 무려 뉴욕에서 세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뉴베이타운이라는 해변을 낀 작은 읍을 무대로 하고 있다. 20세기가 오기 전까지는 미국 최대의 포경선단이 운집해 막대한 재화가 주는 즐거움을 누리던 곳. 독립전쟁 당시 맹활약을 한 덕분에 독립 후인 1812년에 사략선, 즉 해적질에 관한 면허를 국가로부터 취득하여 한동안 미국을 제외한 국적의 상선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전설을 가진 홀리 가문. 이 가문의 마지막 후예가 ‘이선 앨런 홀리’이며, 아내와 아들, 딸, 이렇게 네 식구의 가장이다.
  오랜 세월 유지해온 재화는 할아버지 대에 지구상 최고의 포경선 ‘벨 아데어’호를 베이커 가문과 공동소유 하게 되었으나, 샌프란시스코 근방에 석유가 나오기 시작해 값싼 등유가 고래 기름 시장을 빠른 시간에 대체함에 따라 포경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할 때, 정박 중인 벨 아데어 호가 바다 위에서 화재가 나 흘수선까지 홀랑 타버린다. 주인공 이선은 이 사건을 당시 동업자였던 베이커 씨에 의한 방화로 보고 있지만 아주 오래 전 일이라 증명할 방법은 없다. 화재로 보험료를 받아 그래도 여전히 부유한 삶을 살던 홀리 가문은 이선의 아버지가 전쟁 끝 무렵에 난데없이 군수사업에 투자함으로써 동산과, 저택을 제외한 모든 부동산을 말끔하게 말아 드시고 화병으로 숟가락을 놓은 바람에, 지금 이선은 하버드를 졸업한 재원이고, 예비역 대위임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출신 불법 체류자 마룰로가 사버린 예전 자기네 집 상점에서 점원 노릇을 하고 있다.
  때는 1960년. 미국은 소련과 더불어 지구에 둘 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의 종주국이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당연히 군사, 교육 등에 경쟁할 상대가 없는 최강국이었지만 안으로는 조금 더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고자 서슴없이 부정과 부패, 뇌물, 리베이트, 중상, 모략 등이 팽만하던 시기였다고 스타인벡은 진단한다. 이 속에서 이선은 잘 배운, 좋은 집안의 유일한 후손답게 예전 자기네 작은 사업체였던 식료품 가게에서 단 하나 있는 점원으로 십 수 년 간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정직하고, 청렴하고 항상 친절한 몸가짐과 유머가 풍부한 언어습관으로 인하여 점원신분이라기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뉴베이타운의 명망가 홀리 가문의 후계자로 여기게 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명망가의 후계자이면 무엇을 하나. 커다란 집만 있었지 흔한 TV도 없고, 자가용 승용차는 말할 것도 없이 시칠리아에서 홀로 건너와 생존하기 위해 오직 돈, 돈 하나만을 삶의 목적으로 얼굴에 철갑을 두르고 돈 하나만을 위해 살아온 마룰로에게 어이, 풋내기, 라는 호칭을 듣고 살아야 하는 것을. 심지어 저녁을 함께 하자고 누구를 초청해본 적도 너무 오래되어 몇 년이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결혼 후 한 번도 여행을 떠나보지도 못해 우연히 일박이일 일정으로 가까운 몬타우크의 방갈로로 떠나는 것에도 감격하여 잠을 못잘 정도임에야.
  그리하여 우리의 이선 역시 이 살벌한 시절에 자신도 돈을 한 번 왕창 벌어보자고 결심을 한다.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골목 건너 뒷문을 매개로 친구가 된 은행원 조이 모피로부터 방법을 배운 은행을 터는 것하고, 자신의 최고의 무기인 선량함과 정직함으로 무장하고 최소한의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거였다. 자세한 내용은 재미있는 책 《붉은 망아지 · 불만의 겨울》을 읽어보실 분을 위하여 여기서 그만 두겠으나, 어쨌든 선량함과 정직함을 교묘하게 섞어 거대하게 넓은 평야 지역의 토지와 자신이 여태까지 일하던 식료품 상점을 손에 쥐게 된 이선에게 또 하나의 즐거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자신과 같은 이름을 부여한 이선 앨런 홀리 2세가 미국의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나라사랑 글짓기’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히는 영광과 더불어 자기 집에도 없는 TV에 인터뷰가 방송될 예정이다.
  당시 미국은 그랬다. 다들 그랬다. 이니셜이 금색으로 박힌 지갑 속에 50달러짜리 신권을 한 장 넣어 선물하며, 우리 회사에서 구매한 물품에 대하여 매출액에 5퍼센트에 해당하는 리베이트를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의를 하면, 5퍼센트는 너무 적고 6퍼센트로 해주면 생각해보겠노라고 대답하는. 우리의 이선, 홀리 집안의 후계자는 이런 관행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자였다. 그의 주변에서는 쉼 없이 다들 그렇게 해, 유별난 짓 좀 하지 마, 너만 잘난 줄 알아, 라고 항변했지만 그는 하여간 그렇게 버텼다. 그리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가장 큰 무기가 됐고.
  스타인벡의 경향성, 사회성이 싫어 그를 선택하지 않았던 분에게 권하기에 맞춤한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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