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제 - 강경애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7
강경애 지음, 최원식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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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에 이름을 듣지 못했던 작가. 아마 들었어도 강O애, 이런 식이어서 기억도 나지 않고 아무리 외워봤자 시험문제로 나오지 않던 카프 작가여서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저번에 읽은 이기영도 그렇고 강경애도 그렇고 꽤 괜찮은데 이들이 쓴 것을 몇 십 년 동안 학교에서 제목조차 가르치지 않았다니, 세상에 이런 손실이 있나 그래. <인간문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한다. 리얼리즘이면 리얼리즘이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또 뭐야? 오스트로프스키나 고리키 같은 부류의 작품이라는 뜻인가?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까탈을 잡지는 않겠다.
  강경애. 1906년 황해도 송화 태생. 평양숭의여고 입학, 2년 후 동맹휴학 건으로 퇴학. 이때가 1923년인데 개성 출생이지만 황해도 장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나중에 스스로 ‘국보’, ‘한국의 3대 천재’라 칭하는 양주동과 연애사건을 벌이다 결국 찢어진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양복 주머니에 땅콩을 넣고 강의실에 들어가 땅콩을 까먹으며 강의하는 습관을 들였던 양주동이 세 살 위인데, 아시다시피 이이가 젊은 시절에 계급(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절충을 주장했던 적이 있다. 이점을 주목하시라.
  강경애는 일본 유학을 하지는 않았지만 평양 최고의 여성교육기관인 숭의여학교와 당시 식민지 치하 지사들의 따님들이 주로 다니던 동덕여고(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쳤으니 지역 유지의 따님이었을 것. 그럼에도 주로 간도를 무대로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고, 심지어 진위는 모르겠으나 김좌진 장군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도 있는 강경애가 스물아홉 살에 쓴 <인간문제>에 근본적으로 탈출구, 안전한 배후가 있는 지식인 출신 운동가의 전향문제를 아주 제대로 비틀어버린다. 아니겠지만, 혹시 프로와 민족의 절충을 주장함으로써 퇴로를 확보한 양주동을 그때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하다, 뭐 아니겠지만.

  1931년에 영국 여자가 쓴 <파도>를 읽은 바로 뒤에 1934년에 한국 여자가 쓴 <인간문제>를 읽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스토리와 표현과 주장하는 바를 쓴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 즉각적으로 이해, 흡수, 소화까지 되어버리는데다 내용 자체가 펄떡펄떡 뛰는 날것이라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우리나라 프로 문학의 대표선수가 쓴 작품이어서 당연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인텔리겐치아 쁘띠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그리고 프로 문학의 공식에 의하여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치아는 완전한 악인들이거나 결국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편안한 길을 찾아 간다. 그렇다고 러시아 운동권 작품처럼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공고한 신념, 죽음을 초월하는 불사의 운동성까지는 보여주지 않아 좀 더 리얼하다.
  <인간문제>는 1934년 동아일보에 약 다섯 달 동안 연재했던 작품이다. 그래 분량도 많지 않고, 시퍼렇게 눈을 도사리고 있는 일제의 검열도 피해야 했으니 완전한 사회주의 문학이 되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고, 저절로 작품 속 사건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는 읽는 맛을 주기도 하지만 저자 입장에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앞뒤 짜임새 있는 구색을 맞춰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것처럼 읽힌다.
  황해도 모처에 있는 가상의 ‘용연동네’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먼저 원소(怨沼)라고 이름이 붙은 못에 관한 전설을 소개한다.
  예전에 원소가 생기기 전에 장자 첨지가 살았는데 곳간에 온갖 곡식과 고기와 술이 넘쳐났단다. 근동엔 몇 해에 걸친 흉년이 들어 온통 굶주림에 아이들 우는 소리만 희미했음에도 혹시나 없는 것들이 몰려올까 두려워 문을 꼭꼭 닫고 밥을 지어먹고 짐승을 잡아먹었단다. 배를 곯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어 패를 지어 장자 첨지 집을 습격해서 쌀과 살진 짐승들을 끌어냈단다. 그랬더니 첨지가 관가에 이를 발고하여 근방 농민들을 전부 잡아다가 혹은 죽이고 혹은 때려 불구를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멀리 쫓아냈단다. 그래 이제 남은 동네의 노인들과 어린 것들이 첨지네 마당에 몰려들어 울고, 울고 또 울어서, 눈물이 모여 못이 생기니 원한의 못이라 원소(怨沼)라 했단다.
  원소를 낀 용연동네에 전설 속의 장자 첨지를 빼닮은 정덕호라는 지주가 살고, 슬하에 오직 딸 하나를 두어 이름을 옥점이라 했다. 옥점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학교 교사의 아들로 몽금포로 해수욕을 겸한 요양을 떠난 신철을 우연히 만나 집에 데려온다. 시골에서 젊은 아가씨가 사내를 데려왔으니 당연히 서로 내약內約을 한 사이로 이해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신철이 옥점을 보니 그저 하루 데리고 놀만은 하지만 평생을 두고 반려로 삼기엔 부잣집 외동딸이 그랬듯 세상에 아둔패기에다 천하 게으름뱅이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수밖에.
  동네엔 어여쁜 딸 ‘선비’와 함께 사는 과부댁이 있었는데 선비가 열다섯 살 때 같은 동네 소작도 떼인 빈농이자 행실 나쁘다고 소문난 또 다른 과부의 아들 ‘첫째’도 있었다. 서로 어려서 그랬는지 첫째는 바구니 가득 싱아를 따서 담고 가는 선비를 쫓아가 싱아 한 줌을 빼앗아 먹은 적이 있었다. 근데 둘은 몰랐을 걸? 이 추억이 그들의 남은 생애를 끈질기게 쫓아다니게 될지. 이때부터 삼 년이 흐른 뒤에 그만 선비의 천사 같은 어머니가 폐를 앓다 모진 목숨을 버리고 정덕호네 몸종으로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한다. 첫째 역시 삶은 언제나 힘든 것이라 힘도 좋고 농사도 잘 지음에도 불구하고 덕호로부터 소작을 떼이고, 깊은 겨울을 날 수 없어 동네 없는 사람의 부엌을 털어 쌀을 훔쳐내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도시로 도망치고 만다.
  그럼 그림이 그려지시지? 학대와 착취를 피할 수 없는 어여쁜 하녀와, 버릇없는 주인집 딸이 혼자만 사랑해마지않는 대학생, 어려서 추억을 간직한 시골 총각이 도시로 도망. 그러나 여기까지가 아니다. 잘 생긴 대학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가출 후 소위 현장운동에 헌신하고, 와중에 서로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첫째와 한 패를 이룬다. 여기에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정덕호의 씨받이 겸 작은댁으로 들어갔던 간난이가 나중에 동네에서 도망한 선비와 역시 동패를 만들어 급속하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에 이르고, 이의 실천에까지 가담한다.
  이렇게 대강의 줄기를 그려보니 <인간문제>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이젠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스토리보다 강경애가 그려놓은 강경한 참상의 실제 모습. 그것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가난과 배고픔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진실인 현실. 가난하면 몸이라도 팔아야 하고, 싸움과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1930년대였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대로 그려내는 강경애의 철필 맛은,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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