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룬다티 로이는 1997년에 첫 번째 장편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써서 단 한 번 만에 부커 상을 받는다. 10년 후인 2007년에 언론에 <지복의 성자>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는 뜸만 들이다가 다시 10년이 지난 2017년에 드디어 두 번째 작품 <지복의 성자>를 출간해 두 번째로 맨-부커 상의 1차 심사(Long list)에까지 오르지만 이번에는 조지 선더스의 <바도의 링컨>에 자리를 양보한다.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의 북동부 인구 20만 가량의 작은 도시 실롱에서 태어나, 불과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해 엄마와 남자형제와, 이렇게 셋이서 외할머니 댁에 함께 성장하는데, 남자형제를 뺀다면 이 책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틸로’와 유사한 점이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작 <작은 것들의 신>에서 로이는 남부 인도 아예메넴의 피부가 검정에 가까운 힌두 귀족 집안이 격변기를 맞아 불행을 당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 반면에,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 로이는 이제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1950년대 델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징을 모두 갖고 태어난 양성자와, 저 카슈미르에서 발생한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비극을 연계시키려 하고 있다.
  ‘지복의 성자’는 누구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의 화신이다. 하즈라트 사르마드 사히드. 17세기에 활동하던 아르메니아의 유대인 상인으로 ‘신드’에서 만난 ‘아브헤이 찬드’라는 힌두교인 소년을 사랑하게 되어 인도로 왔던 모양이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믿으니 사르마드는 일단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귀의했고, 다시 몇 년 동안 맨몸으로 거리를 방랑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힌두교를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려면 먼저 이슬람을 버려야 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알몸활보의 죄가 아니라 배교의 죄로 훗날 공개처형을 당하고 마는 인물이다. 1960년대 초의 어느 날, 자하나르 베굼은 자신의 네 번째 아들,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모두 가진 아기를 출산했으나 언젠가 여자의 생식기가 저절로 메워지게, 또는 아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남편에게까지 비밀로 한 채 아들로 기른 ‘아프다브’를 데리고 하즈라트 사르마드 사히드의 영묘에 와서 간절히 기도한다.
  “제게 이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이 시기 쯤 태어난 다른 한 명의 주인공 틸로는 훗날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여가로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주로 세트와 조명 디자인을 담당한다.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며 남학생 세 명과 우정 이상의 관계를 맺는다. 같은 건축학부를 다니며 필생의 사랑이 되는 카슈미르 이슬람 해방전선의 지도자인 무사, 법적으로 유일한 남편의 자리를 갖게 될 유명 신문기자 나가, 진심으로 틸로를 사랑하지만 카스트 때문에 벌어질 가족의 반대에 애초에 순응해 그저 후원하는 선에 그치는 인도 정보국 카슈미르 부지부장 비플랍 다스굽타. 이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네 명의 갈등관계가 여러 모양으로 그려질 것인데, 그리 쉬운 그림이면 아룬다티 로이가 아니라는 점만 일러두고 상세 내용은 여기서 멈춘다.
  다시 아프다브. 아래로 다섯째 아이이자 진짜 남자애인 사키브가 생겼고, 다섯 살 때 우르두-힌디어 남학교에 입학해 불과 몇 달 만에 아랍어 쿠란의 대부분을 암송하는 총명한 재능을 뽐낸다. 여기에 부모는 머리보다 더 뛰어난 재주를 발견했으니 바로 음악. 그리하여 힌두스탄 고전음악의 걸출한 젊은 음악가 우스타드 하미드를 사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아서 아홉 살쯤 되니까 “쟤는 여자야, 쟤는 남자나 여자가 아냐. 쟤는 남자고 여자야. 여자-남자, 남자-여자”라는 놀림을 받기 시작했으며, 남동생 사키브가 할례를 할 때가 되니 더는 숨기지 못하고 엄마 자하나라 베굼은 남편에게 아이의 특징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 학교를 그만둔 아프다브는 하루 시장에 갔다가 여자가 아니니 차도르를 할 필요가 없는 우아한 여성-남성 봄베이실크를 발견하고 하도 아름다워 이이를 따라가, 결국 자신도 열다섯 살이 됐을 때 이들이 사는 집, 콰브가에 합류한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을 세속에서는 ‘하즈라’라고 부른다는 것도 배웠으며, 결혼식 등의 잔치에 불려가 노래와 춤을 팔기도 하고 더 자주는 남자 고객을 상대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버는 생활을 꾸려간다.
  “신이 왜 하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
  정식으로 콰브가의 일원이 된 후 집안의 어른인 ‘우스타드’ 쿨숨비는 아프다브에게 새로이 ‘안줌’이란 여성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후 안줌과 안줌의 생모 자하나라 베굼은 오직 한 군데, 하즈라트 사르마드 샤히드의 영묘에서만 드물게 만난다. 사랑의 성인, 지복의 성인을 기념하는 곳에서만.
  안줌은 삼십 년이 넘게 콰브가에 살다가 마흔여섯 살이 되었을 때 자기가 길러온 딸 자이나브가 자기 대신 새로운 하즈라인 사이다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콰브가를 나와 국립병원과 시체 안치소에 면한 공동묘지에 터를 잡고 몇 년을 비탄에 잠겨 떠돌이 망령의 삶을 산다. 그러다가 천천히 상실에서 회복되어 공동묘지 터에 판잣집을 짓더니, 조금씩 확장해서 침대가 들어가는 오두막을 거쳐 작은 부엌이 달린 집의 순서로 여러 채의 건물을 짓고 빈털터리 여행객에게 방 두어 개를 세놓기 시작해, 또다시 몇 년이 흐르고는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완성시켜간다.
  이 게스트하우스, 카스트라면 가장 아래쪽의 몇몇 계급들과 위에 있다고 해도 계급에 신경 쓰지 않는 몰락한 인사들을 비롯한 ‘작은 것들’이 옹기종기 모인 이곳에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 사무소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기도 했던 틸로가 입주함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살인적 매연의 도시 델리, 그곳에서도 가장 추레한 곳으로 인도의 모든 지역, 계급, 종교의 차이를 위한 아주 작으나마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벌어지려고 한다.
  전작을 발표하고 20년이 지나 나온 두 번째 소설. 2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로이는 인도 남부의 한 가정에서 격변하는 시기에 발생하는 계급간 불통의 비극에서 시각을 넓혀 전 계층과 이질적 종교, 정치와 생활 속의 폭력과 다툼의 비참함, 부정과 부패 등 거의 모든 인도병印度病을 거시적으로 다룬다. 카슈미르 분쟁을 중요한 소재로 채택한 살만 루슈디의 <광대 살리마르>가 떠오르는데 그만큼의 스케일은 아닐지언정 인도와 카슈미르 내부에서 발생한 리얼리티는 독자가 카슈미르와 인도-파키스탄 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왕 카슈미르 이야기를 하려면, 카슈미르, 더 근본적으로 원래 한 국가였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가 왜 세 나라로 분리가 되었는지 근원부터 깐깐하게 따졌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1947년 영국이 물러가면서 인도 독립을 위해 파견한 마지막 인도 총독 루이스 마운트베른 남작 새끼는(얼마나 후진 인간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판국에 작위爵位가 다 뭐냐, 작위가) 인도에 관한 문화나 전통, 종교, 이런 거에 관해서는 아무 이해도 관심도 없어서, 복잡한 종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동, 서 파키스탄으로, 힌두교 및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양 파키스탄 아래로 임의로 국경을 만들어버리고 거의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초장부터 두 종교 그룹 간에 지역 이동을 할 때 부터 종교적 싸움을 벌이게 만든다. 그러다 아름다운 카슈미르 지방이 애매한 형국에 떨어져 두고두고 동족간에 서로 죽이는 난리를 치게 하고. 이렇게 카슈미르의 분할과 투쟁의 근본부터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을 거 같다. 하긴 인도 사람이 기본적으로 인도인에게 읽히려 쓴 책이니 다 알고 있으리라 전제를 했겠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말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