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신동엽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회가 새롭다. 이제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건 물론, 수능시험에 가장 자주 출제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1975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신동엽 전집》은 나오자마자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금서 처분을 받고, 1979년에 창비시선 20호로 다시 찍은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역시 간행과 동시에 판매 금지에 걸려버렸었다. 하지만 내게는 부모가 사놓은 신구문화사의 《현대한국문학전집》의 마지막 18권 <52인 시집>이 있어 <껍데기는 가라>라는 제목과 신동엽이란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다. <52인 시집>이 나온 1965년 당시에는 많은 시가 당연히 4월 혁명에 관한 것이었으니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가 어린 눈에 그리 명편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이다. 오히려 학교에서 말랑말랑한 시만 배운 학생의 눈엔 좀 생경스런 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얼마나 명품인가. 그걸 너무 늦게 깨닫고 만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문



  당시엔 심지어 몇 달 후에 읽을 조태일의 《국토》마저 금서였으며, 그리하여 선배의 하숙방에서 동녘에 붉은 새벽놀이 질 때까지 밤 새 읽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참여시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던 정지용의 모든 작품도 마찬가지 굴레가 씌워졌던 시절. 이제 세대가 바뀌어 늦게나마 모든 작품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때가 왔으니 무릇 사람이라면 이런 진보에 환호작약은 아닐지언정 좋은 마음으로 흐뭇해야 마땅할 터, 그리하여 나는 흐뭇하게 생전 처음으로 신동엽 한 권을 내 소유로 사서 기쁘게 감상했다.
  1930년 부여에서 출생한 똑똑한 소년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떡잎이었던지라 열세 살 때 조선팔도에 내로라하는 5백 명의 청소년에 뽑혀 ‘내지 성지 참배단’의 일원으로 보름 동안 일본을 다녀오기도 하고, 1945년 4월에 전주사범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이때 함께 전주사범에 다니던 동기생 가운데 한 명이 키가 커서 신동엽과 별로 교분이 없었던 소설가, <수난 이대>의 하근찬이다. 전주사범에 다니면서 주목해야 할 일이 벌어진다. 당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제에 부역하던 부르주아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토지개혁을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일제 청산 대신 일제 청산을 주장하는 반민특위 지지자 무리들을 싹 쓸어버린다. 신동엽은 이에 항의하기 위한 동맹휴학에 참여함으로써 만 삼 년을 다니던 전주사범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는다. 당시 나이 19세. 애초에 내성적이고 차분하고 작은 체구로 천생 서생 체질이지만 10대 후반까지 다분히 아나키즘 적인 사상을 일구고 있었다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1930년생이면, 우리나라 근대사의 어느 세대가 그렇지 않았겠느냐만, 청소년 시절은 일제 치하와 해방직후 극심한 이념투쟁을 겪자마자 곧이어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당했으며, 살아남았다 해도 전쟁 후 공황시기를 맨 몸으로 견뎌가면서 한 가족을 일구고 다시 생을 이어가야 했던 세대다. 여기에 아나키즘 적 취향의 왜소한 시인을 대입해보면, 1950년대와 60년대까지를 살면서 감히 아나키즘 적인 발언은 하지 못하더라도 민중위주의 이데올로기적 중립 통일과 평화를 노래한 것이 당연했을 거 같다.
  한국전쟁이라는 한바탕 큰 폭풍은 신동엽의 생애도 거침없이 휩쓸어간다. 당시 단국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던 신동엽은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 치하의 고향에 돌아와 민청 선전부장을 지낸다. 아무리 신동엽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순진한 아나키즘 적 사회주의자 아니었겠나. 몇 달 후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신동엽은 부산으로 내려가 전시 연합대학에 다니다가 12월에 소집되어 국민방위군에 편입된다. 전시 중에도 최대한의 착복과 부패로 악명 높던 국민방위군에서 헐벗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그 유명한 1950~51년의 겨울을 견뎌내긴 했으나 결국 방위대가 해체되기 전에 빠져나온 신동엽은 다시 고향까지 고된 길을 걸으며 그만 민물 게를 날 것으로 잡아먹어 겨우 아사를 면하는 처지에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는 이 때문에 디스토마에 감염되어, 폐와 간을 손상, 후에 긴 세월에 걸쳐 폐결핵(의심증세)과 간암으로 조금씩 번져 결국 눈을 감기에 이르니 그의 나이 겨우 사십 세였다.
  일본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사용하다가, 순진한 아나키즘에 경도되고, 한국전쟁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스스로 겪어냈으며, 동학농민전쟁 지역인 부여 농민 집안의 정체성, 여기다가 60년대 들어서자마자 터진 4월 혁명은 그를 전형적인 리얼리즘 시인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나는 신동엽을 읽을 때마다 김수영이 말한 “시여, 침을 뱉어라!”의 가장 가까운 쪽에 서서 이 말을 그대로 실천했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이의 시에 비분강개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이란 시 한 번 읽어보자. 신동엽도 사랑시를 썼으니.



  진하게
  진하게
  모란처럼 소복함 가득 담고 오너라


  참새스런 깡통한, 날매
  가슴차게 안겨오너라


  경憬이여


  장미처럼 매선 향기
  가시로 쏘아라


  화염華艶한 눈웃음은
  다음 장章으로  (전문)



 누가 신동엽 같은 시인에게 사랑을 받았을까? 위 시에서 사랑의 객체 경(憬)은 그의 아내 인병선이다. 북한의 농업경제학자 인정식의 따님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 월남해 갖은 고생을 하다 이화여고를 마치고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신동엽과의 결혼생활을 위해 학교를 때려치우고 부여까지 내려가 양품점을 하며 남편을 먹여 살리던 여인으로 지금은 명륜동에 있는 짚풀생활사박물관장으로 있다는데, 이이의 호가 추경秋憬이다. 신동엽이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아내를 두고 저런 시 한 수 남길 수 있었으니 세상사 큰 아쉬움은 없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