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젊은 사학자 김윤희가 발칙한 역사학자라는 좋지 않은 평을 들을 각오를 하고 쓴 평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독후감을 쓰려하니 나도 덩달아 발칙한 독자가 되지나 않을까 싶어 걱정이 앞선다. 피식민 경험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완용, 하면 그냥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라고 여기며 살면 된다.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이며, 을사조약 2년 후인 1907년에 맺게 되는 정미7조약과 이어 고종퇴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일합방 서명까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이완용이 한 짓이라 단정하고 살면 편하다. 그러면 이완용 말고 당대를 살던 거의 대부분의 위정자들, 고종을 비롯한 모든 위정자들은 면죄가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매국의 죄를 가볍게 보이게 할 수 있으니까.
  우리나라 성인들 대부분 그러하듯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 책을 전혀 읽지 않다가 이제 뼈마디 쑤시고 어금니 빠질 때 되니 시간이 나 독서에 몰빵하기 시작한 나는 특히 북아프리카 사막 위에서 살던 민족들이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는 유럽 백인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국토 전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한 곳, 한 곳 심각한 타격을 입고 결국 굴복해 식민지로 떨어진 것이 많이 부러웠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빈약한 무기를 들고 백인들을 향해 독립을 외쳐 기어이 나라를 다시 뺐어오는 광경이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역사는 극소수의 지배계급이 자기들끼리 모여 굴욕적 조약의 몇 부분을 ‘이렇게 수정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도장 찍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해가며 외교권을 빼앗겼고, 국권을 들어다 바쳤다. 35년에서 보름이 모자라는 세월을 지나, 일주일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뚱보’와 ‘꼬마’ 두 방의 폭탄 덕에 또 느닷없이 해방을 맞는 우리의 현대사가 나는 슬프다.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문명을 가지고 있던 조선이란 나라에서 환경과 변화, 그것도 격변 속에서 가장 잘 ‘적응’한 자에 관한 이야기. 당신은 놀랠 수도 있다. 여전히 당신 주변에 이와 비슷한 인간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누가 져야할 것인가.
  그런데, 몽고족의 나라 원이 고려를 침공한 이후 한반도가 중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던 적이 잠깐이라도 있었나? 이것부터 솔직하게 논의를 해야 할 거 같다. 몽고라는 세계 최강, 결코 이길 수 없는 외부의 적이 침공하여 100년에 이르는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다음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이 말이 좀 걸린다면 적어도 ‘속국’의 위치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막강한 중국에 자주독립을 주장하기만 하면 그나마 명줄이라도 보전할 수 없었을 터이니 그게 최상의 방법이긴 했을 것이긴 하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면 늦어도 영조시대엔 개항을 해 유럽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상, 경제, 군사적으로 거의 제국주의 수준에 이르는 방법 말고는 없었는데,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청의 강희제나 옹정제가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명나라 초기 정화의 원정 이후 굳게 문을 닫고 있었던 터에 일개 속국인 조선이 백인 유럽에게 문을 연다는 건 난센스. 솔직히 조선이 식민지로 떨어진 책임을 묻는 일은 아프리카가 식민지가 된 책임을 묻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당시는 식민주의 시대였고, 조선은 가망이 없는 야만의 나라였다는 걸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에서는 줄루족의 대규모 전투라도 있었지....)
  좋다. 그렇다면 1876년 일본에 의하여 제물포 항이 열린 이후에라도 제도를 새로 해서 국가의 기틀을 제대로 했어야 한다고? 그게 가능했을까?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의 몇 백 년에 걸친 발전과정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수십 년 만에 뚝딱 해치우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세상에 운 좋은 놈은 당해내지 못한다고, 일본이 갑오년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에서 청나라를 꺾은 건 그렇다 치고, 1904년 북극곰 러시아와 한 판 붙어 승리를 거둘 줄 누가 알았겠나. 게다가 승전이후에 조선은 속 빈 강정인 걸 알았던지라 삼국간섭과 미국의 견제가 드넓은 만주 경영에 집중되어 일본이 조선을 먹는 건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여기에서 앞에 이야기한대로 전국적으로 지역단위의 봉기와 투쟁이 일어나 예를 들어 각 도의 관찰사가 지휘하는 군대가 막강한 일본군대에 저항하다 실패, 패배로 인해 합병이 벌어지지 않은 걸 통탄할 수밖에. 제대로 된 저항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 구한말 의병활동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봉건적 양반, 아니면 군왕제 지지자들이 이끄는, 농민 위주로 갑자기 구성된 의병들이 일본군과 조국의 정규군까지 합한 군대에 제대로 대항이나 해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터. 그리하여 누군가 왕을 대신해 국토의 양도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했으며, 감히 왕을 비난할 수 없으니 왕 대신에 누구에겐가 욕을 한 바가지 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이완용이 된 것 아닐까. 요새 매스컴의 엉터리 역사 설명에 의하여 재조명을 받고 있지만 나는 이 시절의 왕, 고종의 용렬함을 도무지 좋게 봐줄 수 없다.
  이완용을 이 책에서처럼 현실주의자이며 합리적인 근대인이라고 포장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보다 객관적 사실을 써내려간 평전을 읽어보면, 숱한 자기개발서적에 성공한 인물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들여야 하는 습관, 뭐 이 비슷한 것을 모두 종합해 갖추고 있고 그것들을 정말로 실행에 옮긴 우리 근대사의 한 명이 바로 이완용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지금까지 만 33년 반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숱한 사람을 겪었던 바, 이완용 같은 인간들이 회사에서도 잘 나간다. 그러니 자기계발 서적에서 잘난 놈들의 특징의 종합이라 하는 것.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 보면 재수 없다는 거. 이런 류의 인간들을 싫어하는 건 내 문제니까, 직장 생활 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 이완용의 처세를 배워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너무 솔직하게 얘기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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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0-05-14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쩌다보니 이직만 세번 했는데요. 어떤 회사든 아래 사람들한테 평이 좋은 사람은 회사에서 밀려나고, 윗 사람한테 평이 좋은 사람은 승승장구하더군요. 한마디로 꼴보기 싫은 인간들이 살아남기 쉬운 구조라고나 할까요. 이완용 처세를 배우고 싶진 않네요. 저는 그냥 회사에서 밉상이고 그닥 크게 성공할 가능성 없는 직장인으로 얇고 길게 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해요!

Falstaff 2020-05-14 10:47   좋아요 1 | URL
저도 지금 다니는 회사가 네 번째이자 마지막일 게 확실합니다. ㅋㅋㅋ
몇 년차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끝까지 가는 거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도 13개월 동안 120평 넓은 사무실에서 냉난방 없이 혼자 대기발령 버텨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우리나라 최장 대기발령 기록일지도 몰라요. 얇으면 잘 끊깁니다. 두껍고 질겨야 오래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