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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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만. 문제적 작가 가운데 한 명. <에프F>와 <세계를 재다>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작품. 굳이 비교하자면 <에프>와 비슷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각기 다른 제목을 단 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로 약 2백 페이지 분량의 한 덩어리를 만들었는데, 아홉 편을 그대로 단편으로 읽을 수도 있고 나처럼 통째로 하나의 장편으로 읽을 수도 있다. 책의 주제 또는 작가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제일 마지막 이야기 <위험 속에서>에 소개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 아무로 몰라. 현실에서는 모든 게 뒤섞이지. 책에서만 말끔하게 분리되는 거야.”
  위 결론만 듣는다면 도무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터. 그러니 아홉 이야기의 순서와 관계없이 의도된 중구난방으로 소개해보자.
  ‘나’는 이동통신 회사에서 전화번호를 담당하는 부서의 팀장으로 아내 한나와의 슬하에 어린 남매를 남독일 호숫가 근처 평화롭지만 단조로운 도시의 주택에서 살며, 주중에는 하노버 시에 있는 직장에 매일같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한다. 쉬운 얘기로 주말부부. 바람직하게 잘 살다가 한 리셉션에서 루치아라는 여성을 알게 돼 그만 바람이 났다. 적당히 하다가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 바람이건만 차마 그렇지 못해 ‘나’는 두 집, 두 인생, 두 가정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업무를 소홀히 해 자신이 참석해야 하는 유럽 통신회사들의 회의에 부하 직원 몰비츠를 대신 보낸다. 일 대신 인터넷 포럼에 글을 올리는 것이 진짜 자신의 본질이라 단정하고 있는 몰비츠는 또 출장 때문에, 정확하게는 출장기간 동안 인터넷 접속을 못하게 될 것이란 걱정하느라 크고, 크고 진짜 큰 실수를 저질러 고객들에게 같은 번호를 부여하는 에러를 발생시킨다.
  딱 이런 상태에 에블링이라는 PC 기술자가 있었는데 끝까지 휴대전화기 없이 버티다가 주위에서 하도 지랄들을 해서, 어떻게 너한테는 연락도 할 수 없냐?, 늦게나마 개통을 하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개통하자마자 부르르 진동을 하더니 어떤 여자가 말하기를, “랄프 좀 바꿔주세요.” 그래서, 전화 잘못하셨어요, 하고 점잖게 끊었다. 집에 가 아내 엘케와 침대에 누워 자던 밤 열시에 또 부르르 진동이 오고 이번엔 남자가 “랄프! 자식, 어때? 잘 돼?” 이런. 한밤중에 잘 되긴 뭐가 잘돼? 에블링은 이제 휴대전화 때문에 일에 집중이 안 되는 지경에까지 가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자기가 진짜 랄프라는 인물로 행세해보기로 마음먹고, 여태까지 랄프라는 작자가 정한 모든 약속, 모든 행사 스케줄을 다 펑크를 내버리는데, 이 랄프라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랄프 탄너’,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영화배우. 이이의 명성과 얼굴을 담은 거대한 광고판이 대서양 너머 중앙아메리카까지 커다랗게 서 있을 정도다.
  레오 리히터라는 이름의 소설가가 하나 있어, 전직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십자포화가 쏟아지는 가운데 납치, 부상, 참수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을 뛰어다녔다가 이젠 유럽에서 조용히 살기로 결심한 동거녀 엘리자베스를 동반해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모든 나라의 독일문화원을 순회하며 자신의 문학과 사상 등을 강연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길가에 세워진 거대한 광고탑, 휘황한 조명을 받고 서있는 엄청나게 확대된 미남의 얼굴을 통해 랄프 탄너가 세계적인 영화배우라는 걸 독자가 알아차리게 된다. 중앙아메리카 지역만으로도 여행에 질려버린 레오 리히터에게 남아있는 일정 가운데 하나가 중앙아시아 지역 순회강연. 레오 리히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자기는 죽어도 중앙아시아에 갈 수 없다며 일정을 취소하는 대신에 대타를 하나 구해 대신 보내기에 이르니 마리아 루빈슈타인 여사. 역시 소설가다.
  두 명 나오는 소설가에게 리히터, 루빈슈타인, 모두 유명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부여한 건 왜 그랬을까? 나는 작가 켈만이 이름 짓기 귀찮아서였다는 데 만 원 건다. 어쨌건 루빈슈타인 여사는 광활한 스텝지역을 상상하며 중앙아시아에 도착했건만 이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진흙투성이의 엉성한 도시와 더러운 공장이 얼마나 잘 돌아가고 있는지 유럽에서 온 귀빈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후진국 정부의 웃기는 과시욕뿐. 근데 이 루빈슈타인 여사는 중앙아시아로 출국하고 일 년이 지나 더욱 인기 있는 작가로 변신해 문학상까지 받는데, 어떤 상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되게 웃긴다.
  루빈슈타인 여사를 중앙아시아로 보낸 리히터는 전직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엘리자베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어처구니없게도 콩고인 듯이 보이는 지역의 내란지역에 들어가게 된다. 근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건,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서 레오 리히터는 오히려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돌며, 심지어 이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애착을 보인다는 거. 한편 평소 자신이 레오 리히터의 작품 속 한 인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용될 것 같은 기분 나쁜 상상에 조마조마하던 엘리자베스는, 이곳에서 중앙아메리카의 한 독일문화원에 근무하던 리더고트 여사를 만난다. 근데 알고 보니 리더고트 여사가 바로 그 유명한 라라 가스파드였다는 놀라운 사실.
  라라 가스파드가 누군가 하면 인터넷 중독자 몰비츠가 거의 헌신적으로 숭배하는 여성. 몰비츠는 통신사들의 합동 세미나에 참석했으면서도 자신이 발표할 내용보다는 여전히 칼럼 속 댓글 다툼, 특별하게 랄프 탄너한테 그의 옛 애인 칼라 미렐리가 호텔 로비에서 귀싸대기를 올린 사건에 대해 어떤 반응이 올라와 있을까가 더욱 중요했으니, 이분께서 내일 발표하실 세미나는 들어보나마나 말짱 헛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이지. 정작 진짜 랄프 탄너는 이상하게 어느 날부터 전화가 똑 끊기더니 자기를 찾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지경에 처해버린다. 그래 얼굴도 가리지 않고 스타들을 닮은 사람들이 스타 흉내를 내는 게임을 하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랄프 탄너 역을 하며 잔돈을 받는 재미난 경험을 하는데, 또 다른 랄프의 도플갱어 노릇을 하는 대역배우가 나타나 진짜처럼 보이려면 동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도편달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를 당한다.
  이제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어떤 식인지 아시겠지. 어디가 진실이고 어디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야기인지 알아내는 것도 재미난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전부 다 소설 속 에피소드지만, 소설이 소설 속 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예를 들어 레오 리히터를 진짜 세상 사람이라 가정하면 상당 부분이 소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될 수 있다.
  다니엘 켈만. 하여튼 재미있는 작가다. 내게는 앞으로도 주목할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

  지금 품절이지만 e-book으로는 아직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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