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의 판도라 세계문학의 천재들 8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오해를 했던 것 같다. 출판사에 대해서. 도서출판 들녘. 이 회사가 지난 세기부터 좋은 사회과학 책을 많이 찍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줄 착각을 했나보다. 그래 이 회사에서 낸 소설책, 그것도 530쪽이 넘는 장편소설 <콩고의 판도라>를 냈다면 벨기에,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세계가 20세기 초까지 콩고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가장 악랄한 악행을 기록한 책인 것으로 짐작했다. 근대사에서 가장 포악했던 식민통치자로 이름을 올린 레오폴드 2세, 천연고무의 생산량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1차로 손목을 자르고, 그래도 달성하지 못하면 팔을 자르고, 마지막 3차까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목을 잘라버렸던 진정한 흡혈황제. 3천만 명의 콩고 인구를 9백만으로 줄어들게 만든 이 극악한 벨기에 통치시절을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을 나는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던 거였다. 그래 <콩고의 판도라>라는 제목을 단 장편소설이 진보적 출판사라고 ‘착각하고 있던 곳’에서 나왔다니 어찌 한시인들 머뭇댈 수 있었을까. 이 심정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1965년에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작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이 (내가 좋아하는 학문인) 문화인류학자이며 작가라고 한다. 게다가 2000년에 아프리카 독재자들을 그린 풍자 수필을 낸 적이 있다고 하니,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갔다. (여전히 들녘을 진보적 인문학서적 전문 출판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이 책이 놀랍게도 “세계문학의 천재들”이라는 이름의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란 거. 말 하면 뭐하나.
  책은 1974년에서 78년까지의 한 시점에서 시작한다. 토머스 톰슨이라는 이름의 여든 살이 넘은 노 작가가 60년 전을 회상하는 방식이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콩고.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전 국토를 합한 광활한 대지를 상상하라. 그리고 그곳을 온통 6~60미터 높이의 나무들이 뒤덮고 있는 광경을 떠올려라.”


  1914년 여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 이때 화자 ‘나’, 토머스 톰슨은 국가가 운영하는 보육원을 나온 열아홉 살의 반쪽 천식환자, 반쪽 평화주의자, 반쪽 작가였단다. ‘반쪽 작가’라는 건 자기 이름으로 글을 써 출간하지 못하고, 지금은 잊힌 존재지만 당시엔 대단한 성가를 누리던 대중문학의 선구자 루서 플래그 박사가 건네준 지침에 따라 80쪽 분량의 후딱 읽히는 소설을 루서 플래그 박사의 이름으로 대필해주고 푼돈이나 얻어 쓰는 대필 작가를 말하는데 한 단어로 그냥 ‘노예 작가’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니 ‘나’는 플래그 박사가 글을 써 가져오라고 한 하청 작가의 재하청 작가의 재하청 작가의 재하청 작가에 불과했던 거다. 이 해 재하청 작가에게 원청 작가가 원고를 받는 순간 난데없이 교통사고가 나 원청과 재하청 작가가 같은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는 바람에 공동묘지를 방문한 ‘나’에게 접근하는 인간이 있었으니 야심찬 변호사 에드워드 노튼.
  노튼 변호사는 ‘나’가 루서 플래그 박사의 이름으로 절찬리에 판매하고 있는 책들을 진짜 쓴 인물인줄 알고 다가와 1912년 콩고의 밀림 속으로 황금을 찾아 떠난 리처드와 윌리엄 크레이브를 살해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질지 모르는 마커스 가비라는 작자를 교도소에서 접근해 그와 크레이브 형제가 콩고에서 했던 일을 소설 형식으로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이를 실행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나’는 교도소를 방문해 난쟁이나 다름없는 집시의 아들 마커스 가비를 취재해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나’는 변호사가 아닌지라 자기가 쓰는 작품을 보다 진실성 있게 만들기 위해 살해당한 형제의 아버지 찰스 크레이버 공작에게 면담을 신청, 작품의 초고가 완성되면 복사본 한 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 받는다.
  주의를 압도하는 거구로 여섯 살 소녀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 연루되어 군대에서 쫓겨난 리처드와 크레이버 공작 가문의 명성이 아니었으면 족히 20년 형에 처해졌을 경제사범 윌리엄 형제는 보육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엄마를 통해 불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집시 난쟁이 비슷한 하인 마커스 가비를 데리고 콩고로 향한다. 약 백 명에 이르는 짐꾼을 모질게 독려하며 밀림의 중심까지 진출하고, 우연히 금광을 발견해 그들을 노동시키는 데까지 형제들의 잔인한 행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형제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마커스의 살육까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정도에서 독자는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이 책을 더 읽어, 말아.
  진짜다. 도서출판 들녘은 <콩고의 판도라>를 ‘세계문학의 천재들’이란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다. 내가 읽기로는 그러나 완벽한 2류 소설. 서미싯 몸은 자신 스스로가 “최고의 2류 작가”라고 정의한 바 있어서, 혹시 내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려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실 필요 없다. 작가의 다른 책은 당연히 안 읽어봤으니 모르지만(안 읽어볼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이 책만 가지고 판단하면, 아니, 판단은 했으나 더 이상 말로는 하지 않겠다.
  책 속에서는 자신이 대단한 문학적 재질을 갖고 있고, 이 책이 문학적으로 거의 최상급의 성취를 이룬 것처럼 자주 묘사한다. 그런데 왜 나는 책을 읽으면서 셋 중에 하나, 이건 습작이거나, 열심히는 하지만 천부적 자질이 부족한 불운한 작가이거나, 번역 도중 역자가 우리말로 너무 서툴게 옮긴 것처럼 읽었을까. 더구나 이 책은 헌책방에서 중고품을 산 것도 아니고 큰 기대를 갖고 산 새 책이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SF나 장르문학이나 이 비슷한 것들을 견디지 못한 순문학 지향의 속물의식 때문에 그렇게 읽었다고? 뭐 당신이 굳이 그렇게 우긴다면 할 말이 크게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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