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6
앤토니어 수전 바이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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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은 역사를 찾는 이야기. 19세기 위대한 영국의 시인 가운데 한 명이라면서 가상인물 랜돌프 헨리 애쉬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한 세기가 흐른 1986년, 군의회의 하급관리인 아버지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뜻을 접은 것도 모자라 남편과 아들에게 좌절감을 느끼며 사는 어머니 사이의 스물아홉 살 아들 롤런드 미첼이 등장한다. 롤런드 미첼은 78년에 런던 프린스 앨버트 칼리지를 졸업하고 작년에 같은 대학에서 “역사가와 시? 랜돌프 헨리 애쉬의 시에 나타난 역사적 ‘증거’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스물여덟 살에 박사학위를 얻은 재원이라면 재원인데, 문학을 전공하는 바람에 1980년대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의 서릿발 같은 신자유주의 치하의 영국식 문사철 홀대 덕택에, 1951년부터 무려 35년간 애쉬의 《전집》을 편집하고 있는 블랙커더 교수의 연구실에서 시간제 연구원, 그러니까 쉬운 말로 ‘따까리’ 신세로 푸트니가街의 다 쓰러져가는 빅토리아 풍 주택의 지하실에서 애인 ‘발’과 함께 영화 <기생충> 가족과 비슷하게 살고 있다.
  애인 ‘발’로 말할 것 같으면, 나름대로 괜찮은 자질의 영문학도였건만, 하필이면 논문의 주제로 역시 랜돌프 헨리 애쉬를 선택하는 불운을 당해, 전력을 다해 학부생 치고는 훌륭한 논문을 작성했으나, 논문을 읽은 (복수의)채점자들이 모두 애인인 롤런드 미첼이 무지하게 도움을 주었고 심지어 일부는 대필해주었을 것이라 단정하는 바람에 학교를 때려치우고 IBM 볼타자기를 한 대 사서 남의 논문이나 견적서, 선적서류, 소장訴狀 등을 타이핑해주고 돈을 벌어 애인인 롤런드를 거의 먹여 살리는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발 역시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비누질 열심히 해 세수만 해도 얼굴에서 광이 날 정도로 미인이지만 고양이 오줌 냄새가 하루 종일 빠지지 않는 지하방에서 고단한 살림살이를 하느라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여지가 없어 언제나 자다 부스스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이들 커플 신세는 짐작을 하실 터.
  롤런드가 발의 눈치를 뒤통수 가득 받으면서 1986년 9월의 어느 날 오전 열 시에 들른 곳이 런던도서관. 오늘도 롤런드는 랜돌프 애쉬와 관련한 자료를 찾던 중 오랜 세월 서가에 묻혀 먼저만 두껍게 쌓인 책을 열람하는데, 예전에 애쉬의 서재를 장식하던 비코가 쓴 책 <프로세르피나>를 골랐다. 서가에 보관한 다음에 한 번도 열람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게 균일한 농도의 먼지가 네 귀퉁이를 딱 맞춰서 책을 덮고 있었다. 사서가 먼지를 털고 드디어 백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뛰어 롤런드가 책을 열었더니, 책갈피 사이에 숱하게 난삽한 메모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구둣가게 청구서, 담뱃갑을 찢어 써놓은 누군가의 이름, 파티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장 등등의 속에 놀랍게도 애쉬가 미지의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 두 통이 들어 있는 거였다. 여태까지 애쉬는 사이에 아이가 없는 아내 엘렌 부인만 죽자사자, 죽을 때까지 사랑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 롤런드는 은근히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두 장의 편지 원본에, 연구원이라면 당연하게 느낄 법한 ‘소유’ 욕심이 들어, 결국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슬쩍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만다. 이 같은 남자 주인공 롤런드의 호기심 어린 일종의 절도행위로 말미암아 900쪽에 거의 육박하는 장편소설의 막이 올라가게 되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롤런드가 실력도 있고, 그만하면 인물도 나쁘지 않은데 이렇게 빌빌거리는 건, 롤런드 정도(보다 약간 밀리는 수준)의 실력도 있고, 인물은 훨씬 좋은데다가 성공을 위한 필살기,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또는 선생들을 매료시켜버리는 천부의 능력을 지닌 퍼거스 월프라는 인간에게 자리를 뺏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롤런드는 퍼거스를 여전히 친구로 여겨 자기가 훔쳐낸 랜돌프 애쉬의 편지 초안에 대해, 바보같이, 고백을 하고, 이 사안이 아무래도 신화수집가인 이시도르 라모트의 딸이자 시인인 크리스타벨 라모트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한 술 더 떠버린다. 그래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퍼거스는 여러 가지 계산을 순식간에 해치우면서도 태연하게 크리스타벨 라모트를 전공하고 있는 두 명의 페미니스트이자 적수이자 동시에 내가 독후감에서 얘기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플로리다 탈라하세의 레오노라 스턴 교수와 링컨대학의 모드 베일리 박사를 소개해준다. 스턴 교수는 거리가 워낙 멀어 가까운 링컨에 사는 베일리 박사를 찾아가는 롤런드. 엇, 박사가 생각보다 젊다. 물론 롤런드보다는 나이가 많은 거 같은데 영국 사람들은 나이에 관해 큰 차이만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건 아시지? 그럼 뭐가 생각나시지? 불륜? 아님. 롤런드 미첼과 발은 그냥 동거상태. 게다가 둘은 젊은 것들이 벌써 (정말 불쌍하게도) 삶의 무게에 치어 언제나 살얼음판 위에 살고 있고, 베일리 박사는 애인도 없는 미혼.
  곧바로 직진하자.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인 랜돌프 애쉬는 정말로 사석에서 크리스타벨 라모트를 만난 적이 있고, 애쉬가 편지를 보내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편지로 우정을 돈독하게 한 적이 있다. 그래 롤런드와 모드는 의기투합, 크리스타벨이 만년을 보낸 링컨 근방의 실코트 성城 근처를 둘러보러 갔다가, 때마침 휠체어에 문제가 생겨 곤경에 빠진 베일리 부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생각하지도 못하게 진짜로 실코트 성과 크리스타벨이 최후의 숨을 쉰 탑의 방에까지 들어가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모드 베일리는 라모트의 시 가운데 인형에 얽힌 작품을 암송하며 놀랍게도 랜도프 애쉬와 크리스타벨 사이에 오간 수십 통의 편지, 처음엔 문학과 시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해 점점 열렬한 사랑의 속삭임으로 변하는 (숨긴)편지뭉치를 발견하게 되면서 작품은 극적인 장면에 돌입하게 된다.
  크리스타벨 라모트는 1825년생으로, 조부모 장 밥티스트 라모트와 에밀리 라모트 시절이었던 1793년 공포정치를 피해 프랑스 브르타뉴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가문의 후예로, 독신 고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서레이의 리치몬드에 집을 얻어 블랑슈 글로버와 동거를 하다가, 블랑슈의 독려에 힘입어 대표작 <요정 멜루지나>를 발표한, 당대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진가가 밝혀진 시인, 이라고 설정했다. 역자 윤희기의 해설을 보면, 랜도프 헨리 애쉬와 크리스타벨 라모트는 실제 19세기 시인이었던 로버트 브라우닝과 크리스티나 로세티를 모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번역시는 전혀 읽지 않는 나는 별 관심이 없었고, 블랑슈 글로버 양이 74쪽에선 1861년에 테임즈 강에 빠져 자살해버리고 만다고 했으면서 401쪽에선 또 1860년에 ‘물에 빠져 자살’한다고 했을까가 더 궁금했다. 물론 블랑슈의 자살에 관해서도 입을 떼면 좋을 일이 없을 듯.
  책은 이렇게 두 커플, 1980년대 롤런드 미첼과 모드 베일리, 1860년대 랜도프 헨리 애쉬와 크리스타벨 라모트 커플을 대비시키고 있으며, 현재 시점에 거론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총 출동해서 연구 자료를  갖고자 하는 소유욕의 끝장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가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내용은 더욱 모르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벌이는 난장판. 이야기가 거창하고 장황해서 그렇지 자기 취향하고 맞기만 하면 날밤 새우는 건 일도 아닐 작품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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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29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거 사놓고 아직 안 읽은 책인데, 제 취향에는 맞을 거 같은데... 이번 연휴에 읽어볼까요? ㅎㅎㅎ 근데 이것도 인물 관계도 그리면서 읽어야 하는 책인가요?!!!

Falstaff 2020-04-29 14:23   좋아요 0 | URL
옙.
한 세기가 넘게 복잡하게 꼬인 인간들이 등장하니 관계도는 그리셔야 할 거 같네요.
뭐 4대조모가 누구인지 막 언급을 하는데, 흑흑... 제가 잘 못 살았나봅니다. 증조부 이름도 모르고 살았으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