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56
마거릿 드래블 지음, 가주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꼬박 나흘을 바쳐 책 한 권을 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출현하고 각자의 스토리와 고통과 갈등과 사랑과 이별과, 젊은이의 성장과 늙은이의 죽음까지 모두 들어있는 작지 않은 이야기. 등장한 무수한 인물들은 짧게 이름과 현재 계급과 빈부의 정도와 정치적 성향과 성격만 언급되고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보다 적은 사람들은 세 명의 여자 주인공 속에서 에피소드를 만든 후 역시 사라진다. 그리하여 책은 아기자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재미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도를 빼기가 쉽지 않다.
  1979년 12월 31일, 새해전야 파티가 열릴 리즈와 찰스 헤들린드 부부의 W.1 할리스트리트의 크고 화려한 5층 저택에서 이 만만하지 않은 소설은 시작한다. 찰스는 첫 번째 아내 나오미가 아들 셋을 두고 교통사고로 죽고, 리즈는 첫 번째 남편 에드가 린토트와 겨우 10개월의 결혼생활을 끝낸 후, 둘이 다시 결혼해 딸 샐리를 낳아 이제 아이가 넷이 됐다. 가족이 커지고 아이도 더 생길지도 모르는데다(진짜로 이후에 딸 하나가 더 생긴다.) 가정부와 입주 도우미도 두게 될 터, 죽은 나오미가 가져온 지참금을 이용해 1960년에 4만 파운드를 주고 구입한 저택이다. 그동안 런던의 집값이 어마어마하게 뛰어 지금은 무려 백만 파운드를 넘어가며, 1층에는 정신과 전문의 엘리자베스 헤들린드 박사의 진료실과 동료 두 명의 진료실로 쓰고 있다. 그러니까 리즈는 성공한 인물이다.
  같은 시간, 런던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진 북부도시 노썸에는 다른 풍경이 벌어지고 있으니 리즈의 여동생 셜리 하퍼. 과부 리타 에이블화이트에게 딸이 둘 있었다. 리즈와 셜리. 리즈는 지긋지긋한 북부도시의 누추한 집에서 합법적으로 가출하기 위하여 죽을 듯이 공부에 전념해 처음부터 의대진학을 목표로 한 자연과학 전공으로 케임브리지 전액 장학생의 신분으로 입학, 리타와 노썸의 자랑이 된다. 반면 셜리는 애초부터 반항아로 고집이 세고 물러나지 않는 성격에 거짓말과 교활한 수를 부리고 다녔다고 리즈는 기억한다. 셜리 자신 역시 전후 내핍의 시기에 불량소녀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착한 소녀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결국 ‘안심의 영역’에 머무르고 만다. 노썸의 사람들은 파티에 셜리를 초대하지 않고, 그녀의 통거위 요리로 꾸민 저녁만찬에 초대받기를 바라지만 이 ‘만찬’의 정도는 헤들린드 부부가 베푸는 파티에 비교하면 부엌 부뚜막에 앉아 식은 밥 한 술씩 뜨는 수준. 비록 셜리가 엄마의 바람과 달리 학교도 중도작파하고 바라지 않는 결혼을 했을지언정, 결코 집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를 위해 5년 동안 매 끼 음식을 해 나르는 일을 해왔다. 리즈는 오늘도 엄마한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굽은 소나무가 선영을 지킨다. 리타 에이블화이트, “셜리의 어머니는 물론, 미쳤다.”(87쪽)
  리즈는 45세. 남편 찰스가 50세. 찰스는 새해가 오자마자 새 직장을 얻은 뉴욕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다. 영국 방송계의 거물이 된 찰스가 젊은 시절이었던 1965년, 영국의 불운한 교육제도의 유산에 내재한 악을 유려하고 감동적으로 조명한 도큐먼트 시리즈, <찬란한 길 The Radiant Way>을 제작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후 이제는 영국 방송의 대표자격으로 거액의 연봉과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를 제공하는 조건의, 한 마디로 영국의 국가대표 자격으로 파견되는 거였다.
  이제 성생활의 끝 비슷한 느낌이 들자 리즈는 오히려 그것이 일종의 권력, 확실성과 능력으로 무장한 난공불락이 된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 그동안 여섯 명과 잠자리를 같이 했으니 남자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첫 남편 에드가를 시작으로, 조이, 찰스, 필립, 줄스, 그리고 이름도 물어보지 않은 덩치 큰 네덜란드 남자 한 명. 리즈가 결국 모르고 넘어가는 네덜란드 남자는 책의 뒤편에, 역시 리즈도 모르는 사이에, 등장했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레오 스틴이라는 이름의, 야코포 델라 케르치아가 조각한 성모 마리아 상에 금색 페인트를 몰래 칠해 신문에도 나고 콩밥도 먹게 되는 인간인 것으로. 물론 이 작품의 후속작에 다시 등장하게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이 인간의 난데없는 등장이 적어도 이 책 <찬란한 길>에서 발견한 마거릿 드래블의 장난기라고 읽었다. 이들 가운데 필립과는 복수하는 기분으로, 줄스와는 무모한 장난처럼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 모두, 물론 네덜란드 남자는 빼고 다 자기가 주최하는 1979년 12월 31일의 파티에 참석한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리즈는 몰랐다. 파티가 다 파한 1980년 1월 1일 새벽, 자신이 흐느끼고, 거세게 흐느끼다가 기어이 동물의 울부짖음 같은 거친 소리로 통곡을 하며, 왜 찰스가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하는지를 묻게 될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찰스가 이렇게 말할 줄은.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이렇게, 음, 진부하게 나올 줄 몰랐어. 사실 나는 당신이 내게서 벗어나서 안심할 줄 알았어.”
  찰스가 왜 이혼을 요구하는지는 그냥 궁금해 하시도록 내버려두겠다.
  독후감의 첫 단락에 세 명의 주인공이라고 했다. 리즈는 확실하게 주인공이고 나머지 두 명을 소개한다. 1952년에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 장학생으로 합격을 하고 케임브리지를 선택한 두 명의 똑똑한 친구, 알릭스 보웬과 에스터 브로이어.
  좀 복잡한 가계를 그려보자. 리즈의 동생 셜리의 아랫동서의 삼촌이 알릭스 보웬의 시아버지다. 모르시겠나? 쉽게 그냥 똑똑한 알릭스의 남편 브라이언 보웬 역시 노썸 출신이라는 것. 알릭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영국문학을 공부했고 정의파 브라이언은 좌파 지식인이자 소설가로 “1970년대와 80년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상투적이고 사실적인 대작”을 구성하고 있으나 여간해서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1980년엔 재정이 위태로운 성인교육원의 인문학장으로 박봉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알릭스는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들만 수용하고 있는 가필드 교도소에서 주 1회 영문학 강좌를 하며 재소자들의 건전한 의식을 함양하는 대가로 차비에도 못 미치는 강의료를 받고 있다. 첫 남편 세바스찬과 결혼했던 날 밤까지 처녀의 몸이었으며 결혼을 하자마자 자신이 더 이상 갈망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걸 알아버려 아들 니콜라스만 돌보며 살던 중 세바스찬이 캐나다 비트족과 어울리다 익숙하지 않은 마리화나에 취해 별장 수영장에 빠져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됐다가 브라이언을 만났다. 첫 아들 니콜라스는 스물두 살이지만 실업급여를 받아 생활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현대언어학을 전공한 에스터 브로이어는 양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엔 처자식이 있는 콜린 린지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친오빠 솔Saul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고백하며 이상하게도 조카라고 주장하는 젊은 여자와 작은 아파트에서 동거를 했다. 나중엔 이탈리아의 천재 괴짜에다가 괴물인 이탈리아 유부남 클라우디오 볼페와 깊은 유대를 지니는데 그가 선물한 야자나무를 위도가 높은 런던에서 화분에 심어 키우다가, 키우다가, 키우다가 결국 반半 고의적으로 얼려 죽이는 날 클라우디오의 부음을 전해 듣는다. 평생 홀로 살고 미술사에 거의 독보적 지식을 갖고 있지만 딱 그 수준에 만족해 사는 숨은 수재. 이는 오스트리아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1935년에 극적으로 가족을 이끌고 런던에 도착할 수 있었던 유대인의 딸이라는 정체성도 한 역할을 했을 터이다.
  위와 같은 주인공 소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명백하게 “1980년대 초반 영국의 지역과 계급에 대한 상투적이고 사실적인 대작“이다. 여기에 다분히 제인 오스틴이 말한 것처럼(책에서 직접 오스틴의 말을 인용한다.) 세 개 가량의 가문에 집중하면서 심리상태까지 치밀하게 묘사를 해놓았다. 1979년에 집권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와 1981년에 임기를 시작한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으로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손아귀가 장악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과학적 발전과, GDP적 증가를 별개로 하고, 개인적 행복은 급격하게 하락하게 된다. 인류는 비로소 1980년대에 와서야 선진국이라고 하는 건, 가장家長 혼자 벌어서 가족을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나라를 일컫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며, 신자유주의의 극단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2020년 3월과 4월에 걸쳐 5주 만에 아메리카에 창궐한 COVID-19 바이러스 하나로 미국 내에서만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2,600만 명의 실직자가 발생한다.
  이런 현상을 예상해서가 아니라 선량한 사회주의자인 알릭스의 남편 브라이언은 지하철 입구에 손으로 쓴 “탄광 파업자에게 온정을 베풀어주셔요.”란 피켓을 들고 동전을 떨어뜨려주는 시민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던지며,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를 본 알릭스로 하여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열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1987년에 출간한 이 책은 런던과 북부 도시 노썸으로 대표하는 자본과 노동의 양 측면을 조망하는 “사회진단소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처음부터 시리즈로 쓰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타고난 호기심>, <상아의 문>이 이 책의 후속작이 되면서 삼부작의 첫 권이란 타이틀을 달게 된단다. 흥미로운 책이지만 책의 내용을 따라가기는 그리 쉽지 않다. 만일 읽어보시려면 메모장을 옆에 두고 적어도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노트해가며 읽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힌트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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