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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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산드로 바리코, 도대체 이 사람 누구야! 아랫배를 압박하는 요의를 억누른 채 <이런 이야기>를 마저 다 읽고 얼른 화장실 다녀오면서 머릿속에서 떠오른 의문.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음악학자, 극작가, 영화감독, 문예창작교수를 모두 아우르는 58년 개띠 아저씨란다.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피아노 분야에서도 학위가 있다고 하고,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경력도 있고, 신문에 기고하는 음악평론가, 문화시평가로도 활약했다고도 한다. 하여간 박학다식하면서도 소설도 썼는데 내가 읽은 <이런 이야기>가 이이의 여섯 번째 소설작품이라고 한다. 하여간 나는 이 책을 읽자마자 다른 작품을 얼른 책방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재미있다.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것을 기묘한 역사의 인연 속에서 이별과 회상과 끊이지 않는 애정과 사랑으로 적절하게 빚어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실행하지 못한 현대인들의 꿈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작품. 그리하여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실행하지 못한, 한때는 찬연히 빛났던 자신들의 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근데 그게 사는 거야. 한 때 꿈이었던 걸 품기만 한 채 평생을 아쉬운 마음으로 사는 거. 이 이야기는 소설이잖아.
  이야기는 1897년 7월, 이탈리아 토리노 근방으로 추측되는 시골 평야지대에서 태어난 울티모 파르리라는 남자의 한 평생을 좇아간다. 6대에 걸쳐 쇠똥을 몸에 칠하고 살아야 했던 리베로 파르리 씨는 프랑스 태생의 맹랑하고 직선적인 플로랑스라는 아가씨와 결혼해 아이를 딱 하나만 두겠다는 의미에서 첫아들임에도 ‘마지막 아들’이라는 뜻의 ‘울티모’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낳자마자 시들시들, 골골해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 몇 차례였음에도 못생기기는 했으나 ‘금빛 그늘’, 어디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 수 있고 누구나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묘한 구석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난다. 아버지 파르리 씨는 가구나 마차, 농사짓는 데 쓰는 장비 등을 고치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어느 날 피에몬테 토종 소 파소네 스물여섯 마리를 팔아치우고 백리근동에 자동차가 한 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라주 자동차 정비소”를 세워 드디어 자신 대에 몸에서 쇠똥 냄새를 지우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정비소를 세우기는 했지만 자동차 정비에 관해 어디 배울 데가 있어야지. 그리하여 프랑스 글자로 쓰인 “자동차 공학” 한 권을 사서 열심히 익히기는 했지만 파르리 씨가 불어를 어떻게 읽어.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라 엉뚱하게도 엄마 플로랑스가 책을 몽땅 외울 정도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야지대 완벽한 오지 사람들이 차를 살 때까지 기다리려면 말 그대로 하세월일 텐데 이를 어째? 집과 정비소를 담보로 은행 빚을 얻어 쓰고 그럴 즈음인 1911년의 저녁 무렵, 완벽한 운전복을 입은 한 사내가 정비소로 와 묻는다.
  “무례하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이 진흙탕 한복판에 정비소를 열었나요?”
  파르리 씨, 대답하기를.
  “들녘 한복판에서 휘발유가 떨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멍청이들을 믿고 하는 일이지요.”
  운전복을 입은 사내는 서른여섯 살 먹은 당대의 부자, 담브리시오 백작. 이런 인간들이 묵시록적 파국을 맞을 숙명으로 거의 신비스러우리 만큼 능숙하게 해치우는 일이 바로 ‘사치’다. 그리하여 담브리시오 백작은 뜻이 맞는 파르리를 자신의 정비공으로 고용을 하고 함께 자동차 경주, 즉 랠리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백작과 아버지는 ‘차’라는 달리는 기계에 집착을 하는 반면, 우리의 주인공 울티모는 달리는 차를 관찰하고 직접 타보기도 하며 느낀 바, 결국 차를 포함한 혼돈에 맞서는 규칙, 우연을 굴복시키는 질서, 급류를 길들이는 강바닥, 무한을 헤아리는 유한의 수로 자신이 평생을 걸고 탐색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길”을 선택한다. 이후로 울티모는 자신이 맞닥뜨리게 되는 중요한 인물, 사건, 경험 등을 길의 평탄과 회전과 높고 낮음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자동차만이 다닐 수 있는 길, 서킷의 재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열다섯 살이 되는 1912년, 울티모는 읍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무성영화를 보러 갔다가 바로 앞자리에 눈이 부신 아가씨가 어깨와 목, 팔을 모두 드러낸 드레스 차림으로 앉아 있어서, 그것을 기점으로 그의 어린 시절은 종막을 고했다고 하는데, 귀에서 뺨을 거쳐 목에 이르는 선, 목에서 다시 가슴으로 죽 떨어지는 선, 어깨를 통과해 팔로 이어지는 선 등을 전부 하나의 길로 형상화 시킨다. 조금 더 커 자신이 참전했던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카포레토 전투(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전투, 매우 유사한 에피소드)에서의 어처구니없는 후퇴와, 포로수용소에서 당한 구타, 미국에서 아름다운 엘리자베타와의 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활주로 등도 자신이 만들 길의 재료, 길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담브리시오 백작이 파르리의 아내 플로랑스에게 남편을 자신의 정비사로 고용하는 일을 상담할 때, 백작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로 플로랑스를 설득한다. 내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셨지요.
  “네가 너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사랑하다면, 절대로 그의 꿈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해. 네 아버지의 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터무니없는 꿈은 바로 너야.”
  이 말을 들은 울티모의 엄마 플로랑스가 대답하기를,
  “꿈에 관한 당신의 말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그런 말은 책에서만 맞아요. 실제의 삶에서는 거짓이죠. 삶은 훨씬 더 복잡해요. 내 말을 가벼이 여기시면 안 돼요.”
  그래, 이제 살아보니 플로랑스라는 젊은 엄마가 현명했다. 꿈은 아름답지만 진짜로 살아가는 것은 훨씬 더 복잡하다. 비록 이 책이 평생 꿈 하나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힘으로 온전히 버티어내는 인간에 관한 아름다운 서술이기는 하나, 이건 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책 또는 책으로 대표되는 사람의 상상력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는 거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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