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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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한 아디치에의 소설책은 올 클리어. 우습기도 하지, 이이의 데뷔작을 제일 끝으로 읽었으니. 민음사에서 더 이상 내지 않을 것 같은 시리즈인 “모던 클래식”을 통해 읽은 순서로 치면 <아메리카나>,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단편집 《숨통》이었는데, <아메리카나>가 단행본으로 개정판이 나온 것을 보면 다른 책들도 단행본이든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처럼 세계문학전집으로 이름만 바꿔 개정판이 나올 것 같다. 그건 출판사 사정이니까 뭐, 알아서 하겠지.
  소감? 단도직입적으로 독후감 시작하자마자 소감? 좋다. 읽는 도중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왜 그랬냐고? 읽어보시면 안다. 국가와 국민과 사회정의를 위해 활수하게 선행을 베풀고 정부에 저항도 하는 큰 기업가 유진 아치케 씨가 가정에서는 지독한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고, 가족의 아무도 이 무시무시한 정신적, 육체적 독재자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질식할 듯한 분위기. 여기에 가늘고 긴 손가락과 창백한 피부색, 금발머리를 한 예수에 대한 교조적인 복종과 계율과 의식과 터부 속에 짧은 생애지만 살면서 자신이 웃어본 적이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 추쿠카 자자와 딸 캄빌리, 그리고 아내 비어트리스.
  그럼에도 이 소설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 유진 아치케 사장이 지난 시대의 대표적인 나이지리아 작가 아체베의 작품에서 본 인물, 자신은 이보족 전통의 문화를 고수하지만 아들만은 영국인의 종교를 좇아 신문물을 익혀 성공하는, 이 장면에서 ‘아들’역인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유진 사장의 의식으로 보면 아직 살아있는 여든이 넘은 늙은 아버지는 시대에 뒤떨어져 지옥의 유황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불쌍한 이교도에 불과하여 그저 가끔 돈 푼이나 집어주고 거의 부자의 연을 끊고 지낼 정도로 가톨릭 환자 증세를 보인다. 현명한 여동생이자 나이지리아 대학의 교수이지만 몇 달째 봉급이 나오지 않아 결코 부유하지 않은 과부 이페오마가 정의하듯이 유진 사장은 전형적인 식민지 시대의 산물이다. 식민지가 만든 괴물이 사회의 최정상부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이지리아가 아직도 반(半)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 그러나 내가 읽기로 애국자이자 엠네스티 월드에서 인권상을 수상할 정도의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한 유진 아치케 씨 본인이 가정 내에서는, 자신이 속한 민족이 오랜 투쟁 끝에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던 식민주의자였다.
  유진 씨는 그리하여 아버지의 토속문화를 철저하게 이단시하고, 같은 가톨릭이라 하더라도 이보족의 언어로 찬송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에 대해 반감이 없는 여동생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 오소독스하고 질서정연한 부르주아 지식인, 엘리트 중의 엘리트, 비교할 수 없이 도덕적인 삶과 헌신, 기타 모든 허망한 가치관을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두면서 가족 구성원에게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는 절대자. 이에 대한 대가로 풍족한 삶과 성당의 제일 앞자리 가족석과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을 보장한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뜻과 어긋나게 행동할 때 식민주의자로서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이게 바로 가혹한 처벌이다. 오른손은 글씨를 써야 하니 아들의 왼손 손가락을 불구로 만들고, 아들과 딸의 발등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임신한 아내의 배를 단단한 나무로 된 탁자로 내리쳐 낙태하게 만들고 심심하면 안와골절을 유발하는 펀치력도 자랑한다. 아디치에는 의도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내가 본 가정 내 아치케 선생은 자신이 완전히 벗어났다고 의심 없이 생각하는 과거의 식민주의자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도로를 닦고, 학교를 지어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제도를 개선하고, 공장을 지어 산업을 발전시키고, 선진 농업을 도입했다는 명목으로 모든 산물을 착취하며 잔인한 폭력으로 저항을 짓밟은 세력들.
  나이지리아의 유일한 정론지 《스탠더드》 신문의 사설을 통한 독재자와 독재 권력에 양심적 투쟁을 벌이며,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열심인 외적으로 선한 사람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점점 질식해가는 가족 구성원을 지켜보는 일. 여기에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이끌어가는 인물 셋만 더 꼽으라면, 옛 나이지리아의 지혜롭고 순수한 정서를 잃지 않은 유진 아치케의 아버지 파파은누크와 현명하지만 현실적이기도 한 이페오마 고모. 제삼세계에서 바람직한 사제상을 만드는 아마디 신부 역시 백인 사제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20세기 말에 반(半)식민지 상태의 사회에서 적절한 사제의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계속되는 쿠데타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들에 의한 독재정치에 나라는 점점 부패해가고, 폭력과 허위와 기만에 허덕이다가 더 이상 나이지리아라는 땅에서 살 수 없는 질식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미국행 비자를 얻기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 길고 긴 줄을 선다. (이 장면은 이이의 다른 소설에도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이때, 대사관 앞의 긴 줄에 섰던 이페오마 고모의 친구,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동료 교수 치아쿠는 끝까지 나이지리아에 남겠다고 각오하며 고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학력자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 약자들을 남겨두고 가지. 독재자들은 계속 군림해. 약자들이 저항을 못하니까. 너는 이게 순환 고리라는 것을 모르니?”
  1970년대 초, 내 부모도 미국 대사관 앞에 줄을 섰었다.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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