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유령일 뿐 민음사 모던 클래식 71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유디트, 라고 하면,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를 뎅거덩 잘라 머리끄덩이를 들고 장군의 천막을 나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과부, 또는 버르톡이 작곡한 <푸른 수염 영주의 성>에서 이제 푸른 수염과 막 결혼한 어린 신부를 연상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유디트’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1970년, 칠공년 개띠 태생 독일인 작가 유디트 헤르만을 떠올릴 거 같다. 단편 소설 일곱 편을 엮어 간행한 헤르만의 두 번째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 이젠 품절이라 당분간 구하기 쉽지 않을 이 책의 새것과 다름없는 중고를 헌책방에서 구입해 읽고는 단박에 반해버렸다. 일곱 작품의 거의 모든 주인공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여성. 유디트 헤르만은 주인공들을 가까이는 같은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이어서 아이슬란드 올루르프스부디르의 여름별장, 베네치아, 체코에 있다고 하는 소금물 온천도시 카를로비바리, 미국 네바다 주 오스틴 지역 사막에 있는 완전 허름한 호텔 인터내셔널, 몰다우가 내려다보이는 체코 프라하의 언덕배기 집, 그리고 노르웨이 트롬쇠로 보내는데, 각 지역의 자연경관에 집중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와 관심, 무관심, 신경전 같은 미묘한 신경의 뒤섞임을 집중해 탐색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섬세한 신경줄을 포착하는 눈길이 기가 막히게 내 타입이라 작가 유디트 헤르만을 도대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첫 작품 <루스>부터 단박에 빠져든다. 루스가 ‘나’에게 말한다. “절대 걔와 시작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 루스는 덩치가 좋지는 않지만 잘생긴 연극배우 라울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들 하나 있는 홀아비 라울은 루스를 소 닭 보듯 하고 심지어 같이 잔적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라울이 나에게 “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 나 때문에 루스를 배신할 거니?”라고 묻자 나는 기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나’가 라울을 사랑하게 돼서? 그건 직접 읽어보셔야 아실 것.
  두 번째 작 <차갑고도 푸른>을 제일 좋게 읽었다. 아이슬란드에서 관광 가이드를 하는 요니나와 마그누스 커플에게 사진 한 장이 소포로 도작한다. 발송인은 베를린에 사는 요나스. 요니나는 동거남 마그누스가 사진을 발견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숨기면서 독일인 커플 요나스와 이레네가 올루르프스부디르에 있는 자신들의 여름별장을 방문했던 1년 전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이슬란드의 머리 좋은 청년들은 대륙으로 떠나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떤 시점이 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이들도 10여 년간 베를린과 빈에 살다가 귀국한 경우.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요니나는 아무것도 아닌 한 순간, 다시 생각해봐도 특별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잠깐의 사이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사랑이란 원래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일곱 편 모두 다 재미있다. 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또는 그것에 관한 밀고 당김, 얽혀버린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 번째 작품 <아쿠아 알타>는 베네치아에서 은퇴 후 여행을 온 부모님을 만난 딸의 감정 같은 것을 부드러운 시각으로 그리기도 했으며, 표제작 <단지 유령일 뿐>은 자동차를 이용해 미국 일주를 결심한 엘렌과 펠릭스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지역의 한 허름한 호텔에서 남루한 행색의 도로 공사 노동자를 만나 어쩌면 진정한 인생이라 할 수 있는, 작지만 반짝이는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장면도 들어 있다.
  그럼에도 역시 이 작품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매개로 한 사람들 사이의 의견불일치, 소통단절, 의식의 이격離隔 등이다. 이렇게 말하면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사실이 그렇다. 어차피 소설은 삶의 모방임에야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공유하는데 있어서, 개인감정의 표현 방식은 대단히 중요한 법. 유디트 헤르만은 여기에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지금 화자 또는 주인공의 감정선이 이전에 있었던 어떤 계기와 연결이 되고, 또 증폭하여 독자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이 작품집에 관해서야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읽어봐야 안다고. 지금 종이책은 절판이지만 E-Book으로는 판매하고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정말 오랜만에 유디트 헤르만, 낯선 여자한테, 단 한 번의 눈길로 사랑에 빠져버렸지 뭐야.

 

 

유디트 헤르만 Judith Her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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