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블루 컬렉션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7년생 카롤린 봉그랑이 1992년에 출간했으니, 이때 이이의 나이가 책의 주인공 콩스탕스와 같은 스물다섯이렸다.

 

카롤린 봉그랑의 트위터 사진.


  원 제목은 <Le Souligneur>, 우리말로 하면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고 그냥 <밑줄> 영어로 'Underline‘이다. 원래부터 넉넉한 가정에서 자란 우리의 콩스탕스는 부모가 이혼을 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엔 완전하게 성인의 나이가 됐음에도 가끔 아버지로부터 생활비 명목으로 현금지원을 받으면서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젊은 아가씨. 평소엔 그냥 백수로 지내다가 가끔 잡지에 글을 팔아 돈을 얻기도 한다. 물론 친구도 있고 친구의 아들도 있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은 ’레옹‘이란 이름의 플러시 천으로 된 장난감 당나귀다. 최대 길이가 1.2 미터 정도 되고, 잘 때 안고 자거나 가랑이 사이에 끼고 자면 좋긴 하다. 강아지나 남자처럼 스스로 온기를 뿜어내지는 못해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잡지에 글을 팔긴 해도 문학 방면엔 영 흥미도 없고,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이 그냥 가리, 아자르, 시니발디, 보가트 등의 이름으로 소설을 써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두 번 공쿠르 상을 타먹은 소설가만 애정하는 수준. 가리가 쓴 책이 겨우 서른한 권밖에 되질 않아서 이제 스물다섯 살에 불과한 내가 벌써 여섯 권을 읽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1년에 딱 한 권의 가리 책을 읽을 예정이다. 나이 쉰 살이면 몇 십 년에 걸친 가리 프로젝트도 끝날 터. 여태까지 살아온 날만큼만 더 살면 말이지.
  1992년. 그때도 파리의 예쁜 아가씨가 애인이 없을 확률은 별로 없었는데, 이 지극히 낮은 확률 안에 우리의 콩스탕스가 포함이 된다. 만일 근사한 남자만 있었어도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 텐데, 애인도 없고, 가리도 앞으로는 1년에 딱 한 권만 읽기로 작정을 해서 그냥 다른 소설책이나 한 권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동네 도서관에 들르면서 일은 벌어진다. 도서관에 들어 맨 먼저 만난 사람이 키 작고 비쩍 마르고 그냥 그렇게 생긴 사서, 지젤. 어째 ‘지젤’이라면 좀 늘씬하고 다리가 길며 우아한 목선을 했으면서도 조금 불운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당의 발레 때문에? 하여간 지젤에게 회원등록을 하고 처음으로 세 권의 책을 고른 콩스탕스. 뒤라스, 르루, 그리고 폴리냐크. <밑줄....>은 빠른 이야기가 책의 특징이다. 콩스탕스는 앞의 두 작품은 읽다가 헷갈려 그냥 던져버리고 폴리냐크를 대충 훑어보는데, 76페이지 위쪽 여백에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연필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진짜로 일이 벌어진 건 책을 반납할 때 지젤이 낙서를 발견하고 콩스탕스에게 싫은 소리를 한 마디 했던 것. 책의 뒤편, 대출 카드를 꼽는 작은 봉투(아날로그 시대의 도서관을 이용해보신 분은 금방 이해하실 것) 옆에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라고 씌어있다.
  그래 불문곡직하고 <노름꾼>을 다시 대출해 처음엔 재미나게 읽다가, 책 속에 밑줄이 그어진 부분이 의미심장. 마치 밑줄 긋는 남자, 분명히 남자가 책 속의 문장으로 자신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은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니 정작 소설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어느새 콩스탕스는 밑줄 친 부분만 집중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밑줄 친 남자를 30대 후반 정도의 중후한 남성으로 추정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를 만나 함께 밤을 보내고 혹시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1.2미터 길이의 당나귀 레옹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 지긋하게 누르면서 잠에 빠져든다. 어때? 발칙하고 경쾌하고 천진하다. 여유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스물다섯 살의 파리 아가씨가 책에 밑줄을 쳐 자신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보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실제로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종의 로드 무비? 뭔들 어떠랴. 로드 무비일 수도 있고 가벼운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무려면 어쩌랴. 시간 죽이는데 그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