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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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들어서 읽기도 전에 바짝 쫄아 구입을 망설였던 책이 세 권 있었다.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 막스 프리슈의 <슈틸러>, 그리고 이 책. 사실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브로흐를 제일 겁냈었고 비오이 카사레스는 약간 머뭇거린 정도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아, 비오이 카사레스를 읽기 위해 닷새가 필요했다. 464쪽에 불과한 책을. 이 책을 읽기 위해 독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경구는, 그까짓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다짐까지 해야 하는 말이 있다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군역을 치루면서 수도 없이 들은, “졸면 죽는다.”는 거. 비오이 카사레스를 제대로 읽으려면 중단편에 불과한 분량이긴 하지만 각 편을 시작하는 문장에서 끝마치는 문장까지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하면 얄짤없이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와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가 쓴 <모렐의 발명>을 읽고 탈옥한 사형수가 도망친 외딴 섬에 모렐이란 이름의 테니스 선생이 발명한 영상의 비밀, 헛갈리는 진짜 라틴 아메리카의 아몰랑 주의 소설의 진수를, 이해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 경험한 후로 다시는 함부로 비오이 카사레스를 읽으려 덤비지 말자고 각오한 것이 떠올랐다. 이 중단편집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에 실린 작품들은 등장인물의 단언을 빌어 시간도 변한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개떡으로 알고, 빛의 속도 역시 부정한다. 이게 말로 하기는 간단해도 시간과 빛의 속도를 부정한다는 건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틀을 해체하겠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이미 죽은 사람들도 어떠한 형태를 갖추었더라도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쉽게 얘기해 시공간 파괴 작업. 위에서 언급한 <모렐의 발명>에서 영상 속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나’의 영혼 또는 실체로서의 몸까지 영상에 흡수되듯이 이 책에서도 비슷한 차원의 것들이 모든 작품 속에 등장한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영혼의 문제. 예를 들어 편지를 날라주는 비둘기, 전서구의 뇌를 열어 방연석이 첨가된 무선통신 장치를 해놓으면 비둘기가 훨씬 더 효율적인 집배원 역할을 하지 않을까, 라고 개념을 잡은 한 소년은 자기네 집에서 기르는 비둘기에다 대고 닥치는 대로 뇌수술을 감행한다. 단편 <열망>의 주인공인 이 소년은 동네에서 제일 예쁘지만 사납고 공격적인 아가씨하고 결혼한 후에는 니켈로 만든 두 개의 기둥이 있고 높이가 20cm 쯤의 틀을 만들어 짐승의 영혼을 보관하는 장치를 만들어내고 만다. 한 틀에 한 영혼. 제일 먼저 틀로 초대하는 영혼은 자신이 기르던 늙은 개 마르코니. 자, 육신에서 영혼을 빼 틀에 저장해놓았으니 몸뚱이는 어떻게 될까? 어떻기는 어때, 즉시 부패하기 시작하는 거지. 그래 개는 마당을 파고 묻을 수밖에. 이 상태에서 영혼을 보관해놓았으니 늙긴 했지만 그래도 십여 년을 함께 정을 붙이고 산 마르코니는 영생의 단계에 들어간 것일까?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여쁜 아내 밀레나가 시어머니와 시누이 연합군에 맞서 하고 한 날 베르됭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틀을 하나 더 만들어 이번엔 자신의 영혼을 담아버리는 단계에 이르니, 영상에 영혼을 담은 <모렐의 발명>과 비슷하다.
  모든 작품이 이렇게 엽기발랄하다. <위대한 세라핌>에서는 알바레스라고 하는 주인공이 병이 들어 휴직을 하고 산타클라라 인근 해변에 요양 목적으로 방문해 바다를 바라보는 환상의 장면이 ① 거대한 썩은 고기(생선)로 가득 찬 원형 모양의 수평선, ② 호텔 화단의 시든 꽃, ③ 몇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고래와 크고 작은 고기들의 시체, ④ 이것을 먹기 위해 육지에서 날아든 까마귀, ⑤ 호텔에 돌아오자 라디오에서 크게 들리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⑥ 유렵의 모든 해변에서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니스에서 온 전보 등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무자비하게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아침 산타클라라 해변의 낮은 벼랑 옆에서 상상한 것에서 출발한다. 나는 바닷물이 빠지면서 바다 밑바닥에 무지갯빛 물방울이 맺힌 동안 커다란 고래 무리가 해변에서 죽어있는 것을 상상했다.”라는 작가 노트에서 보듯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자신의 뇌 속에 방연석이 첨가된 무선통신 장치가 삽입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누가 무선통신 장치를 작가의 뇌에 심었는가 하는 점인데, 나는 정답을 안다. 세상의 썩은 바닷물과 유황냄새가 나는 민물로 가득 차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비오이 카사레스의 뇌에 무선통신기 시술을 한 자는, 루시퍼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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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2-21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이 책 장바구니에만 담아두고 있었는데 사게 되면 각오하고 정신 차리고 읽겠습니다!!

Falstaff 2020-02-21 09:25   좋아요 0 | URL
에구, 잠자냥님은 내공이 깊으시니 그래도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