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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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편의 추리소설 또는 범죄소설을 실은 작품집. <약속>, <사고> 둘 다 되게 매력적인 범죄소설이다. 뒤렌마트가 쓴 추리소설 또는 범죄소설 전반에 걸친 짧은 고찰은 이 책의 뒤에 실린 작품해설에서 상세하게 나오니 참고하면 되겠다. 작품해설을 참고하란 말씀은 직접 책을 사서 읽어볼 만하다는 뜻이다. 도서관 이용도 좋은 방법이긴 하겠지만 이렇게 특색 있는 추리 또는 범죄소설은 책꽂이의 한 자리를 차지할 권리를 갖는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지난번에 작가가 쓴 추리소설집 《판사와 형리》를 재미있게 읽어서이다. 역시 뒤렌마트, 나는 그의 책을 읽고 실망해본 적이 없다. 20세기 스위스 문학을 넘어 독일어 문화권의 찬란한 두 별, 막스 프리슈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를 연속해 읽는 우연도 재미있다. 비슷한 시기를 살면서 현상을 보는 기본적 시각은 비슷한데도 표현방식이 이다지도 다를 수가 있을까. 열 살 차이가 나지만 살아생전 두 명이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거 같다. 성격 다른 사람들이 한 번 친하면 진짜 친해지는 일이 왕왕 있으니.
  두 편의 소설이 다 재미있는데, 독후감은 표제작 <약속>에 대해서만 쓰겠다.
  <약속>은 작가가 쿠어(Chur) 시에서 추리소설의 창작기술에 관한 강연을 하고 우연히 자신의 강연에 참석했던 전직 취리히 주 경찰국장 H 박사와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취리히로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선생의 강연은 졸렬하기 짝이 없더군요.” 라고 독설을 펼쳤던 박사는 추리소설이 현실을 왜곡한다고 비난한다. 겨울이라 빙판과 눈 녹은 물이 아스팔트에 번갈아 깔리는 바람에 긴장을 멈출 수 없던 이들은 도중에 들른 주유소에서 벤진을 보충하는 동안 맛없는 커피를 한 잔 씩 마신다. 당시엔 휘발유 대신 벤진을 사용했었나보다. 하여간 주유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한때 H 박사의 부하로 경감 직위에 있었으며 추리소설의 화자를 능가하는 천재로 바젤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까지 보유한 ‘마태’라는 이름의 노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후로 H 박사가 취리히까지 오는 차 안에서, 그리고 취리히에서 따로 ‘나’를 만나 마태 박사가 연루된 마지막 사건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다.
  마태는 유능하기는 하지만 너무 유능한 것도 세상 사는데 결코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거니와 사물이나 사건에 유난히 집착하는 성격도 있어서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다. H 박사가 은퇴를 염두에 두었을 때 당연히 마태가 후보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떠올랐지만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부적격자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때  마침 요르단에서 경찰 전문가 한 명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당시 50세인 마태를 추천했으며, 이에 자신도 매우 흡족해 해 기꺼이 수락을 하고 이제 책상을 정리할 시간이 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마태의 책상 위에서 전화기가 그를 호출한다. 전화는 그의 오랜 단골 피의자이며 14세 여자 아이를 추행한 전과가 있는 폰 군텐에게서 왔다. 지금 취리히 근교 메겐도르프에 있는 식당 겸 술집 ‘사슴’에 있으며, 자신이 숲에서 성추행 후 죽임을 당한 여자 아이를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마태가 현장에 가보니 그리틀리 모저란 이름의 소녀가 면도칼로 잔인하게 목을 유린당한 채 죽어 있어서 마태를 제외한 경찰들도 고개를 돌릴 지경이었다.
  산골 풍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메겐도르프에서는 시민들이 생각하기를, 희생자를 발견했으며 본인이 14세 어린이 성추행의 전과가 있는 폰 군텐을 범인으로 지목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린치를 가할 준비를 한 채 경찰차 두 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마태가 주민들을 설득해 무사히 폰 군텐을 취리히 경찰서에 구금을 해두었으나 그가 가장 중요한 용의자인 것은 확실하다. 행상을 하는 폰 군텐의 가방에서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 속에서 면도칼도 나왔고 상의에 소녀의 피가 묻어 있었으며 해부 결과 피살자의 위에서 아직 소화되지 않은 초콜릿을 발견했다. 그날 폰 군텐 역시 초콜릿을 한 상자씩이나 먹었던 거였으니 이것이 우연일까. 물론 용의자는 범행을 부인한다. 그러나 마태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며 용의자를 신문하는 방법까지 마태에게서 배운 그의 후임자 헨치가 폰 군텐을 연속해 스무 시간동안 신문을 한 끝에 범행을 자백하게 만든다. 잘 보시라. 자백한 것이 아니라 자백하게 만들었다는 걸. 잠을 안 잔 상태에서 연속으로 스무 시간을 신문했다면 명백한 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나 달라, 폰 군텐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다음 독방에서 목매달아 자살을 해버리고 만다.
  이것으로 사건 끝? 천만의 말씀. 이제 새로이 시작한다. 일찍이 마태는 피해자인 그리틀리 모저의 어머니한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살인범을 잡겠다고 약속을 한 바 있다. 어쨌거나 폰 군텐이 자백을 하고 자살을 해버렸으니 약속을 지켰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 드디어 요르단으로 출발하려는데 마태는 공항에서 숱한 아이들이 노래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꿔 비행기를 타지 않고 다시 취리히 경찰청사에 나타난다. 요르단에 가지 않겠다는 것. 그러나 H 박사는 이미 인사이동이 끝나 더 이상 취리히 경찰신분이 아니니 도와줄 수 없다고 선을 딱 긋는 것. 박사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 마태는 폰 군텐이 자백을 했지만 진범이 아니라는 것, 진짜 범인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 또 꽃 같은 어린아이의 목을 면도칼로 난도질 할 것이라는 생각에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범인은 그라우뷘덴과 취리히 사이에 거주하며 미국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덩치 큰 남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라우뷘덴 주 쿠어 시 근방의 목 좋은 주유소를 인수한다. 언젠가는 범인이 이 주유소에 들를 것이란 믿음으로. 그리고 금발의 딸을 가진, 취리히 경찰청의 만년 용의자였던 헬러를 주유소에 들어와 살게 한다. 이른바 낚시가 시작된 것. 금발의 딸 안네마리에게 메겐도르프에서 죽은 여자아이와 같은 빨간 치마를 입히고 주변에서 놀게 만들어 범인의 눈에 들게 만든다. 그리하여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안네마리의 엄마 헬러가 마태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Sie sind ein Schwein!"
  우리말로 하면, “넌 개새끼야!” 당신이라도 이렇게 악을 쓰겠지? 나 같아도 그런다. 이 문장을 역자 차경아는 그냥 직역을 해놓았다. “당신은 돼지야.”라고.
  어떻게 될까? 면도칼의 소녀 연쇄살인범이 안네마리라는 이름의 미끼를 물까?
  이 범죄소설을 쓴 다음에 뒤렌마트는 추리/범죄소설을 다시는 쓰지 않았다. 왜 그런지 책을 읽어보시면 저절로 알게 된다.
  독후감에서는 소개를 하지 않았지만 함께 실린 <사고>도 아주 흥미로운 범죄소설이다. 미필적 고의가 아닌 악의적 고의를 갖고 금세기의 가장 탁월한, 경탄과 존경을 받을 만한 심리적 살인을 저지른 한 명의 평균치의 인간을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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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2-1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 살 수가 없네요 ^^두 권 다 사겠습니다!

Falstaff 2020-02-20 09:0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책임지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