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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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년에 출생해 1890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미국 페미니즘의 선구적 작가라고 한다. 쇼팽의 연표를 보면1 아일랜드에서 이민 와 대단한 성공을 거둔 아버지와 19세기 중반까지 서부로 가는 경계였던 세인트루이스의 프랑스 계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한 어머니로 이루어진 부르주아 가정의 딸로 태어난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고, 자매들은 다들 어려서 죽고, 아버지의 첫 아내 케이트의 큰 어머니가 낳은 배 다른 형제들은 또 전부 남북전쟁의 남부 연합군으로 전사해버린다. 그래 외갓집에서 어머니, 외할머니, 외증조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무 살에 오스카 쇼팽과 결혼해 쇼팽이란 이름을 갖고 뉴올리언스에 정착해 8년 동안 여섯 아이를 낳는 왕성한 생식력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살던 시기가 나중에 소설을 쓰는데 주요 무대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 때 남편이 사업을 말아먹고 다시 루이지애나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잠시 3년 후 이번엔 남편이 모기에 피를 빨려 말라리아로 죽어 과부가 된다. 이때가 쇼팽이 서른두 살. 이후 2년간 당시 양가집 여자답지 않은 생활, 자유연애, 공개 흡연, 홀로 거리를 걷는 행위 등을 서슴지 않고 하고 다니다가 다시 친정이 있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고 나서 세상이 허전해 우울증이 심해지자 집안 주치의이기도 했던 산부인과 의사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단편소설을 처음 발표를 한 때가 마흔 살이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마흔에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가, <나목>으로 여성동아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천만 원의 상금을 건 1회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해 등단한 박완서 선생이 있지만 19세기에 나이 마흔이면 지금 나이로 환갑은 훌쩍 넘겼지 않을까? 하여간 케이트 쇼팽은 1904년 쉰네 살에 죽을 때까지 겨우 14년 동안만 작가로 활동하며 두 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는데, <각성 Awakening>은 이이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 대표작이며 문제작으로 일컫는단다. 쇼팽이 스무 살 이후에 살았던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에는 프랑스, 스페인에서 이민 오거나, 캐나다에 살던 프랑스계 이민들의 재 이민이 상류계층을 이루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 <각성>에도 주요 등장인물은 빠짐없이 프랑스 어를 적어도 알아듣거나 심지어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면들이 일관되게 나온다.
  흔히 미국하면 유럽에 비해 진보적인 기분이 들고는 하지만 19세기의 미국은 유럽보다 훨씬 보수, 반동적인 지역이었다. 이 책에서도 여성, 이중에서 결혼한 여성들의 미덕은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남편을 공경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없애고 가정의 수호천사가 되어 (암탉처럼2) 날개를 펼쳐 가정과 집안 살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런 관점이라면 미국의 여자들은 전부 다 질식해 제 명대로 살지 못했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이다. 낳자마자 이런 환경의 지배 아래 살면 스스로 남성에 의한 보호를 편하게 받아들이며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성>을 읽고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의 부정에 흥분한 당시 여자들도 무지하게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우연히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나라의 한 트랜스젠더가 명문학교인 청파여대에 입학하려다 재학생들의 비판으로 뜻을 꺾은 뉴스가 떴다. 고정관념이 그런 거고 언제나 무서운 것은 기득권과 권력이다. 무엇이든지 새로 시작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쓰여 있듯이 세상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나. 책을 읽어가노라면 저절로 <인형의 집> 노라가 떠오른다.
  작품은 뉴올리언스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는 그랜드 아일 섬의 여름 별장에서 시작한다. 나는 첫 장면에서 존 벤빌의 <바다>를 회상했다. 벤빌의 작품에서 보면, 여름휴가를 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엄연하게 계급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휴가지에 여름별장을 보유한 족속들이고, 둘째가 별장을 통째로 세낸 사람이며, 셋째가 호텔에 숙박하며 여름을 나는 부자들, 넷째가 별장(팬션)에 방을 몇 개 빌려 약식 월세로 여름을 나는 쁘띠 부르주아, 마지막 다섯째가 현지 주민이라 했다. 이걸 보면 주인공 에드나가 안주인인 퐁텔리에 식구들은 기껏해야 네 번째 그룹밖엔 안 되지만3 이들과 또 한 가족인 라티뇰 씨 가족은 뉴올리언스의 최고급 주택가인 에스플러네이트가街의 저택에서 사는 지역의 부르주아들이다. 아일랜드와 미국의 휴양문화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모양이다. 미국 남부의 휴가지에서는 한 팬션에 부르주아부터 쁘띠부르주아, 서민들이 함께 여름을 나며 놀랍게도 친목까지 다진다.
  주로 뉴올리언스 시내에서 여름을 나기 위해 도착한 이 팬션은 예전 르브룅가家의 호사스런 여름별장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이젠 르브룅 여사가 여름별장으로 운영하며 덕택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아들, 로베르와 빅토르.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베르는 뉴올리언스의 상점의 직원으로 평범한 고용인이기는 하지만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어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며 지금은 여름휴가를 맞아 어머니와 함께 예전의 자기 집안 별장에서 손님들을 도와주면서 그들의 말벗 역할을 하고 있는 20대 청년. 눈치 채셨지? 우리의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 여사는 아들만 둘 둔 스물여덟 살 주부. 이들이 수영을 하고 돌아오며 소설은 시작하는데, 사실 말이 수영이지 에드나는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몸이 물에 뜰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중간의 내용을 대폭 건너뛰어 이야기해서, 어느 날 에드나 혼자 수영하는 법을 저절로 익히게 되고, 그러면서 보다 더 멀리 헤엄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바다에서 헤엄을 치며 어느 순간 더 이상 먼 바다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겠다는 두려움이 왈칵 솟았던 것을 기점으로, 에드나의 의식은 돌변한다. 남편에 대한 복종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던 에드나는 남편 레옹스 퐁텔리에가 “당신은 당장 방으로 가.”라고 말하자, “다시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명령하지 말아요.”라고 대꾸하기 시작해, 여태까지는 최고의 남편이고 더 이상 훌륭한 남자는 없는 걸로 알았다가 이젠 자기 자신만의 “삶의 희열”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한다. 물론 “삶의 희열”이란 구체적인 단어는 책 저 뒤편에 나오니, ‘자신만의 삶’으로 대체해 이해해도 충분히 좋다.
  앞에서 언급한 <인형의 집> 노라가 바로 이 지점에서 집구석을 박차고 너른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에드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탤 것이 있다. 최고의 남편, 제일 훌륭한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있음에도 어느새 팬션집 큰아들, 기껏해야 상점의 점원에 불과한 나이어린 청년 로베르와 사랑에 빠져버린 것. 에드나는 그것이 사랑인지 모른다. 로베르가 갑작스럽게 오늘 밤 당장 돈을 벌러 멕시코로 떠나기 전까지는. 에드나는 자신의, 자신만의 삶과 떠나버린 사랑을 가슴에 안고 뉴올리언스의 저택으로 돌아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의 벽을 향해 첫 번째 달걀을 던지게 될까.
  짧은 소설이다. 본문이 243쪽에서 끝나는 분량에서 벌써 반 이상 말해버린 거 같다. 세상을 향해 여성의 자아를 외친 소설은 결국 평등의 해협을 건너지 못했다. 케이트 쇼팽이 죽고 60년이 지나 해협에 삐걱거리는 나무다리를 놓은 후에야 비로소 선구적 작품이라 일컫는 <각성Awakening>을 다시 출간할 수 있었으니, 기구하다면 기구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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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케이트 쇼팽의 일생은 위키백과와 책 뒤편의 역자 해설 참고했음.

2.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씀.

3. 책 속에 이들의 숙소를 펜션이라 써놓았으며 여러 식구들이 하루에 세 번 한 자리에서 식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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